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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화, 속절없는 존재를 연민하는

고충환



박미화, 속절없는 존재를 연민하는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의 얼굴들부터 무심하거나 생각이 거세된 듯한 몸짓들이 혼재하는...어느 날 우연히 들어선 공간에서 사무치게 느꼈던 삶과 사람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 또는 그 속절없음에 대한 잔상들을 오롯이 새겨넣고 싶다...존재를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일상이다. 
-작가 노트


꽃다지, 홀스타인종 수소, 태어난 지 3일 만에 엄마와 떨어져 고기로 길러졌다, 4개월 때 비육농장으로 팔려 가 몸집 키워 두 살 때 도축되었다(2021.8.10.)...L씨의 친구 청년, 고철 덩어리 배를 이리저리 기워 바다로 내보냈다, 선박회사는 서둘러 유족과 합의했다, 검찰수사는 없었다(1988)...문에 기록된 삶...딸을 문 위에 뉘였다, 작은 관이 도착할 때까지,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내 딸의 이름은 카탸였다, 카튜센카...일곱살에 사망했다...미상 犬, 늙고 병들었다고 나를 공터에 생매장했어요, 누군가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틀 만에 무지개다리 건넜어요(2020). 

점심 후 다섯 대의 차에 실려 온 시신들이 땅에 묻혔다, 그중 한 대의 차에서 아기를 안고 있던 여인이 내던져졌다, 아기는 엄마의 젖을 문 채 죽었다(1942, 폴란드)...존 브라운, 59, 백인 목사, 노예 반대론자, 교수형(1859)...이수단, 중국서 위안부, 이름 빼고 한국말 다 잊어, 끝까지 한국 땅 못 밟고 선물 받은 인형을 아이라 여기며(2016)...소원이, 16개월, 입양된 지 8개월 만에(2020)...김귀정, 대학생, 10여 분간 천여 발 최루탄, 토끼몰이식 진압에 희생(1991)...라이카, 떠돌이 개, 최초의 우주여행, 스푸트니크 2호,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관(1957.11.3.)...바르스, 리시치카, 발사 28.5초 로켓 폭발...프츨카, 무시카, 우주에서 하루 보내고 우주선 고장으로 숨지다(1960.12.1.)...도안 응이아, 6개월 아기, 빈호야, 베트남(1966)...쿠르디(2012-2015). 

그리고 어서어서 캄캄하거라, 는 얼핏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이르기까지 말들이 빼곡한 공책이 10권도 넘었다. 


꽃다지라는 이름은 작가가 붙여준 것일까. 카튜센카와 그의 딸 카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아마도 사람들이 소원을 이루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여줬을 소원이에게는, 떠돌이 개 라이카에게는, 빈호야와 그의 6개월 된 아기 도안 응이아에게는 또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쿠르디는? 인터넷에 찾아보니 난민 아기라고 했다. 기사를 보니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그렇게 얼핏 들었던 것도 같고 본 것도 같은 일도 있었고,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된 일도 있었다. 예컨대 1957년 11월 4일 스푸트니크 2호와 함께 편도 우주선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떠돌이 개 라이카도 그랬다. 우주 경쟁이 치열했던 냉전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했다. 르네 지라르는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와 제도와 국가가 희생양 제도 위에 건립되고 유지된다고 했다.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희생양을 지목해 민중의 잠재적인 폭력성을 전가하고 해소하고 잠재우는 일에 제도의 운명이 걸려있다. 요새 말로 치자면 좌표 찍기와 프레임 씌우기를 제도의 본성으로 정의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공책에 적힌 말들이 하도 많아서 작가는 아마도 그때그때 바로 찾아볼 수 있도록 포스트잇을 가장자리에 따로 붙여두었다. 혐오 범죄, 난민, 노동, 동물 밀렵, 인디언, 목포 6월 같은 글귀와 함께. 이로써 작가의 작업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겠다. 작가는 존재를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일상이라고 했다. 이 말은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역사가 꼭 그렇지 않은가. 역사야말로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그리고 작가에게 일상이란 사실상 작업 그러므로 예술이기도 하다. 그렇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을 매개로 작가의 역사관이, 생활관이, 그리고 예술관이 하나로 만난다. 다르게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역사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생활철학과 생활감정을 근거로 한 것인 만큼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공감을 얻고, 그 자체로 작가의 예술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반영한다. 

주지하다시피 역사에는 큰 역사가 있고, 작은 역사가 있다. 다르게는 위로부터의 역사와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있다. 정치사와 경제사와 사회사가 전자에 속한다면, 생활사와 민속사와 풍속사가 후자에 속한다. 다루는 서사의 종류도 다른데,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가 전자의 서술형식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서술형식은 신화와 설화와 민담의 그것에 가깝다. 여기서 작가의 서사를 어느 한쪽으로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불쌍한, 작고 여린, 그리고 여기에 때로 이름도 없는(그리고 대개는 죽은) 존재들에 바친, 스케일로 보아 작은 역사와 미시 서사 그리고 생활사에 가깝지만, 정작 그 내용으로 치자면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 그러므로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사유의 결과로 보이는 만큼 큰 역사와 작은 역사가 현실을 사는 구체적 실체인 개인 속에서 융합되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작가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의 희생양에 관심이 많다. 작업을 통해 희생양을 기리고, 기념하고, 기억하고, 기록한다고 해야 할까. 희생양을 위로하고, 연민하고, 오마주한다고 해야 할까. 그 오마주의 대상이 무차별적이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에 구별이 없고 차별이 없다. 하나같이 희생양이라는 동질성을 얻고, 동류의식으로 묶여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개와 양과 고라니와 고양이와 새와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개와 양과 고라니와 고양이와 새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자연에서 왔다는 의미일까. 자연이 엄마라는 뜻일까. 엄마는 아기와 똑같이 강아지도 안고 있다(피에타). 엄마는 풀도 안고 있다(헌화). 피에타? 헌화? 하나같이 망자를 오마주한 것이 아닌가. 공감 그러므로 감정이입, 다시 그러므로 망자를 향한 사무치게 그리운 애착과 속절없음이 차고 넘쳐서일까. 

언젠가부터 인류세란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인류의 적은 인본주의 그러므로 인간중심주의라는 의미로 읽고 싶다. 인류의 적은 인류라는 뜻으로 읽고 싶다. 그렇게 읽고 싶다기보다는 실제로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적과 각을 세우기보다는 차라리 망자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연민하고, 오마주하기로 했다. 그렇게 작고 여린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연민이, 죽은 것들이 자아내는 사무치는 그리움이 작가의 작업에는 있다. 엎어진 아기가, 날개 부러진 새가, 무심한지 슬픈지 덤덤한지 내면적인지 모를 바닥에 던져진 얼굴이, 표정이, 얼굴도 없는 몸통이, 팔이, 다리가, 누워있는 기둥이, 기둥조차 없는 기단이, 깨진 유리창이 침묵으로서 증언하는 속절없는 아우라가 있다. 


그렇게 작가는 공책에 적힌 말들(그러므로 사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실체를 부여해준다. 흙을 빚어 형태를 만드는데, 전체적인 양감을 봐가면서 다만 표면에 저부조 형식으로 얕게 새김질해 흙덩어리 고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표정한 덩어리가 오히려 표정을 함축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빗어 만든 흙덩어리를 가마에 굽지도 않았는데, 더 적게, 라는 주제 의식을 실천한다는 의미도 있고, 흙 자체로부터 표정을 그러므로 어쩌면 흙 자체의 본성을 끄집어내고 싶어서이다. 

미술사에 보면, 말년에 미켈란젤로는 형상 문제로 번민했다. 돌과 같은 질료 속에는 에이도스 그러므로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이 숨어있어서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창조가 무색하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작가 역시 흙의 본성, 흙의 에이도스를 감각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표정을 부여해주기보다는 흙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실현하도록 조력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근작에서 흙 조형물은 흙 고유의 본성을 간직할 수 있었고, 심지어 전시가 끝난 연후에는 다시 흙 통으로 들어가 처음의 말랑말랑한 흙의 원형질 그대로 되돌려질 참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흙에서 나서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 존재의, 그러므로 속절없는 존재의 알레고리를 본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속절없는 존재의 알레고리로 치자면 흙보다 더한 것이 재다. 그렇게 작가는 심지어 재로 그림을 그리기조차 한다. 흙에서 나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재에서 유래했으니 다시 한 줌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마는, 이런 속절없는 재료로 속절없는 형상을 빚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거기서 속절없는 존재가 속절 있는 존재로 전이되고 승화하는 것을 본다. 죽은 것들이 말을 하는,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흔들어놓는 역설을 본다. 


한편으로 공책에 빼곡한 말들은 신문지에 그린 일련의 드로잉에서 또 다른 형식을 얻는다. 신문지 위에 덧칠하고, 연필로 눌러 쓰고, 그 위에 다시 커터칼로 새김질했다. 이중으로 눌러 쓰고 새김질한 것인데, 쓰면서 기록하고, 재차 칼로 새기면서 그 말의 의미 그러므로 상처를 새겨넣은 것이다. 쓰는 것도 기록이고 상처도 기록이지만, 상처가 쓰는 것 그러므로 기록된 역사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흔히 역사는 남지만, 상처는 다만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한 속설을, 여기서 작가는 뒤집고 있다. 더욱이 상처는 역사보다 더 생생하고, 더 깊고, 진정성이 있다. 그렇게 역사는 때로 의심하게도 하지만, 상처는 몸에 아로새겨진 것이므로 추억으로, 분노로, 그리움으로, 폭력으로, 슬픔으로, 무의식으로, 다른 주체로, 흔적으로, 자국으로, 연민으로, 징후로, 증상으로,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갈아타고 변신하면서 계속 살아남는다. 

그렇게 역사를 새기고, 상처를 새기고, 그리고 어쩌면 작가 자신의 다짐과 의지를 새겨넣은 일련의 드로잉이 360점의 모자이크로 모였다. 역사적 현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념하는 아카이빙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작고 여린 것들의, 죽은 것들의, 속절없는 것들의, 이름도 없는 것들의 역사를 세우는 기념비적인 성격이 있다고 해야 할까. 천에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면서 텍스트를 새겨넣은, 2017년 후반에서 2019년 초까지 1년 반 동안 하루에 한 개씩 마치 일기처럼 쓰고 만든, 400여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종전 시리즈 작업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해도 좋다. 작업의 성격상 앞으로도 계속 덧붙여지고 확장되고 변주될 현재진행형의 작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기쁜 이야기보다는 상실을 이야기할 때 더 공감이 간다고 했다. 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비극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극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극에 대한 감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비극은 삶을 정화하고(아리스토텔레스), 죽음은 삶을 세척 한다(프로이트). 그러므로 어쩌면 상실 그러므로 결여와 결핍, 비극과 죽음에 대한 잃어버린 감을 되찾는 것, 존재에 대한 연민을 회복하는 것, 그러므로 타자를 맞아들이는 것(레비나스)이 인류세의 유령을 잠재울 수 있다. 좀 거창하게는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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