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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휴식, 상실감 그러므로 자기_타자와 투명하게 대면하는

고충환



김정숙/ 휴식, 상실감 그러므로 자기_타자와 투명하게 대면하는 



인적 없는 해변에 다만 하얗고 빈 플라스틱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의자 옆으로 의자보다 큰 키의 칠흑같이 짙은 그림자가 길게 누워있다. 하얀 의자와 칠흑 같은 그림자가 강하게 대비되는 것으로 보아 시간을 알 것도 같다. 뚜렷한 대비로 보아 정오쯤일까. 유난히 짙고 긴 그림자로 봐선 정오를 지난 2, 3시쯤일지도 모른다. 그림 전면에는 의자의 그림자보다 더 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아마도 건물이나 가게의 차양이 만든 그림자일 것이다. 이처럼 그림자는 그림을 확장한다. 그림 속에는 없는 건물이나 가게를 암시하는 것이다. 인적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림을 확장하면 사람이 영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정작 그림 속에는 없는 사람들이 재차 그림을 확장한다. 

암시의 힘이고, 부재의 미학이다.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것, 정작 그림 속에는 없는 것을 상기시켜 그림 자체를 확장하고 그림이 내포한 의미를 확장하는 것이 암시라고 한다면,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 비록 지금 여기에 없지만, 그때 그곳에 존재가 있었음(그러므로 한때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부재의 미학이다. 그렇게 암시의 기술과 부재의 미학은 하나로 통한다. 그리고 그 통함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그곳에 있었지만 지금 여기에는 없는 존재를 다시 되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빈 의자가 부재 하는 존재를 상기시키고, 그러므로 어쩌면 그리움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아가 혹 빈 의자는 나를 위해 예비 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 인적 없는 해변에, 하얗고 빈 의자에 마냥 앉아 쉬고 싶다는, 넋을 놓고 싶다는, 나를 잊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투사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여기에 그때 그곳을 그대로 되불러오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림은 비록 현실을 모티브로 한 것이지만, 사실은 작가의 욕망을 그린 것이고 환상을 그린 것이다. 실제로도 이 그림은 한강 변을 거닐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하얗고 빈 플라스틱 의자에서 착상된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한갓 빈 의자지만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욕망을 매개로 빈 의자가 자기 자신으로 전이 될 수 있었고, 작가의 환상 속에서 한강 변이 해변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그렇게 인적 없는 해변이, 빈 해변이, 작가의 의식 속에서 확장된(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기억이 소환한) 해변이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적막하고 쓸쓸하고 평화롭다. 세상에서 외떨어진 휴양지 같다고 해야 할까. 미셸 푸코는 휴양지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여기서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와 같으면서 다르다. 둘 다 초장소 그러므로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같다. 반면 유토피아가 실제로는 없는데 다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만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헤테로토피아는 실제로는 있는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부재 하는 장소 혹은 잠정적으로 지워진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다르다. 

한편으로 푸코가 예로 든 헤테로토피아(휴양지 외에도 비록 그 결은 좀 다르지만, 군대와 기숙사 같은)가 다 그렇지만, 휴양지 역시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세상으로부터 외떨어졌다는 것이 일탈 그러므로 휴식과 해방을 주지만, 동시에 그 휴식과 해방이 임시적이라는 것, 그래서 다시금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공존하는 것이 그렇다. 그 이중성과 양가성(그러므로 휴식과 불안이 공존하는)이야말로 도시 외곽 풍경을 그린, 휴양지를 그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관통하는 핵심 정서라고 해도 좋고, 그 정서적 질감이 그대로 작가의 그림에도 있다고 해도 좋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일전에 이처럼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을 주제화한 적이 있다. 그 결은 좀 다르지만, 친숙함과 낯섦 그러므로 캐니와 언캐니가 공존하는(그러므로 캐니가 자기의 한 본성으로 언캐니를 예비하고 있는) 집에 대한 양가감정을 그린 것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이 다 그렇다. 작가가 세계를 보는 눈 그러므로 세계감정이라고 해도 좋고, 작가가 세계를 느끼는 정서적 질감이라고 해도 좋다. 그대로 작가의 회화적, 작가적 아이덴티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것으로 보아 콘도의 테라스를 저 홀로 지키고 있는 빨간색 빈 의자가 그렇고(화려한 외출을 꿈꾸는 작가의 욕망? 그러면서도 슬쩍 불안의 기미가 보이는?), 열린 커튼 사이로 해변이 보이는, 창문 크기만큼의 빛 조각이 방안에 면을 만드는, 접힌 파라솔이 보이는 정경이 그렇고(작가는 접힌 파라솔이 팬데믹으로 우울한 사람들을 상징하고, 활짝 편 파라솔 아래 진정한 휴식을 되찾고 싶다는 욕망을 상징한다고 했다), 하얀 거품을 밀어 올리며 밀려갔다 밀려오는 바다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으면 좋을 것 같은 해변의 빈 벤치가 그렇고(모든 바다는 경계다. 그러므로 경계 너머를 상상하게 만든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구름의 정경으로 보아 꽤 높은 건물의 레스토랑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빈 테이블이 그렇다. 여기에 작가는 곧잘 한강 변을 산책하는데, 여기에도 역시 앉아서 아름드리나무를 쳐다보고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빈 벤치가 있다. 

앞서도 말했듯 하나같이 인적이 없는 고요하고 적막하고 평화로운 정경들이며 풍경들이 세상의 변방을 떠올리게 하고, 휴양지를 떠올리게 하고, 휴식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그리고 거의 모든 그림에 사람들이 없는 대신, 빈 의자가 있어서 의자에 자기를 대입하게 만든다. 감정이입과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그리고 부재를 통해 존재(한때 존재했었음)를 증명하는 부재의 미학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기에 슬쩍 불안의 기미가 복선처럼 깔리는데, 그림 밖에 있을 어떤 상황(현실? 그렇다면 정작 그림 속 상황은 비현실? 작가의 욕망?)을 암시하는 그림자가 그렇고, 때로 빨간색 의자가 그렇다. 

진정한 휴식은 없다. 진정한 휴식은 없는 탓에 우리는 진정한 휴식을 꿈꿀 수 있고, 진정한 휴식 자체도 계속 꿈꾸는 대상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진정한 휴식이란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까마득하게 잊힌 것들을 표상할 수 있다. 어쩌면 상실한 고향, 돌이킬 수 없는 유년, 존재가 유래한 아득하고 아련한 원형적 기억을 찾아 뒷걸음질 치면서 더듬어 찾는 과정이며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가 그린 적막한, 고요한, 평화로운 그림 속 정경이, 풍경이 일상에 지친 영혼을 달래주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복원하고, 재생한다. 햇빛 좋은 날들만큼이나 짙은 그림자로 표상되는 상실감과 투명하게 대면하게 하면서 그렇게 한다. 


이외에도 작가는 팬데믹으로 장사를 접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쇼윈도 장식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손바느질 맞춤 정장 집을 그려 보이는데, 생활전선에 대한 연민과 함께, 일상에 반응하는 생활감정이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현실성을 획득하게 만든다. 그리고 해골을 모시고 있는 갓집을 그려 보이는데, 전통에 대한, 뿌리에 대한, 존재의 유래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심의 흔적이며 결과라고 해도 좋다. 여기서 해골은 전통에 대한 존경을 의미할 것인데, 여기에도 역시 바니타스 그러므로 인생무상의 전언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가의 감정이 유독 그런 쪽으로 쏠린다고 하기보다는 보편 인간의 부조리한 조건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표출된 것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각별하게 와닿는 그림이 구스타브 클림트의 그림을 차용하고 각색한 <삶의 알레고리>다. 태어나고, 살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삶이고, 그 와중에서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삶이다. 

그렇게 적막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그려 보이는 작가의 그림은 휴식의 와중에서도 자기성찰의 끈을 놓지 않는 것, 상실감 그러므로 자기_타자와 투명하게 대면하기 위해 진정한 휴식의 계기를 찾고 꿈꾸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진정한 휴식보다는 휴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곱씹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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