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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내면 풍경,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구축한

고충환




김영옥/ 내면 풍경,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구축한 



실을 붙이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절제와 자기반성적 성찰, 느림 그리고 빛의 잔상을 기하학적 추상 이미지로 표상한다...실을 붙이는 행위는 자기 내면과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반복된 동작을 통해 자기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되고, 그렇게 붙여진 실 위에 쌓인 물감층이 삶이 되었다...실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자기 내면의 추억을, 기억을, 욕망을, 관계의 감정을 구축한다. (작가 노트) 


현대미술을 확장 시킨 계기가 여럿 있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오브제의 도입을 들 수 있다. 형식적이고 조형적인 요소를 위해 오브제를 도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브제의 도입으로 오브제가 원래 속해 있었던 현실성과 일상성을 담보하려는 기획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이 있는 그림은 물론이거니와 비록 추상적인 그림에서마저도 오브제는 자신의 작업을 현실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고 방법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들이 이런저런 오브제를 자신의 작업에 도입하지만, 작가 김영옥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실(명주실)을 도입한다. 

왜 실인가. 실에는 무슨 각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인가. 아마도 이러한 실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 곧 작가의 작업을 읽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 면면히 흐르는 사실상의 주제 의식을 추정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 꼭 그렇지도 않지만, 예로부터 실은 여성 주체의 가사며 생활사와 관련이 깊고(예컨대 바느질과 뜨개질), 그런 만큼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반영한다. 한편으로 실은 가늘고 길다. 그래서 시간을 상징하고 기다림(작가의 표현으로 치자면 느린 그러므로 기다리는 삶)을 상징한다. 민속학적인 경우로 치자면 무병장수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은 관계를 상징한다.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피하고 싶은 관계를 상징하고, 술술 풀리는 실타래가 좋은 관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실은 연결을 상징한다. 흔히 인연을 연결된 실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존재론적인 경우로 치자면 삶과 죽음의 연결을, 이승과 내세의 연결을, 그러므로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삶(뫼비우스의 띠?)을 상징한다. 이처럼 실에는 생활사에서 유래한 의미부터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삶으로 나타난 존재론적인 의미에 이르기까지 문명사적인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오브제로서 실을 도입한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의미 부여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화면에 실을 붙이는 행위에는 반복 수행을 통해 자기를 치유하는 기능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반복 수행은 수행의 한 방법론으로서, 무슨 일이든 반복하다 보면 도가 통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반복 수행을 통해 자기에 몰두하고(자기_타자와 투명하게 대면하고), 동시에 자기를 잊는(자기_타자 그러므로 어쩌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몰입을 통한 치유는 비록 작가의 개인적인 작업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상처와 더불어 산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의미가 그렇다면 형식은 어떤가. 작가는 화면 위에 실을 붙이고, 그 위에 채색을 입힌다. 그렇게 기하학적 형태가 강한 색면추상을 예시해준다. 밝은 면과 상대적으로 어두운 면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화면이 감각적 쾌감을 준다. 여기서 촘촘하게 덧붙여진 실이 결을 떠올리게 하는데, 아마도 작가 자신의 내면에 연유한 결, 그러므로 마음의 결을 표상할 것이다. 마음에 울리는 소리, 그러므로 내면의 소리를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자기 내면에 내적 질서의 성소를 구축하려는 기획이라고 해도 좋다(실제로도 예로부터 기하학적 형태는 질서를 표상한다). 

그렇게 하나의 화면 속에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크고 작은 면이 어우러지고 있다. 그리고 어떤 면은 흡사 창문처럼 보이고, 부드럽고 온건한 빛의 기운이 흘러드는 문틈처럼도 보인다. 아마도 실제로 관찰한 빛, 그러므로 물질적인 빛을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내면의 빛의 기운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희미한 기억으로 남은 빛의 잔상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기억으로 남은? 주지하다시피 창문은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며 관문을 상징한다. 아마도 작가는 그 통로를 통해 빛의 질감으로 자신을 감싸던 유년의 기억을 되불러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기 치유와 정화를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색면추상은 자기 내면에 질서의 집을 지으려는 기획으로 보이고, 따스한 빛의 질감으로 남은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계기로 보인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색면추상은 엄격하면서도 따스한, 부드럽고 온건한 느낌이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근작에서 좀 더 유기적인 형태로 변신을 꾀하는데, 화면 속에 산과 같은, 능선과 같은 풍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를 어필시키는 것이 그렇다. 기하학적인 형태로부터 유기적인 형태로, 색면추상으로부터 풍경화로의 변신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이처럼 소재가 달라진 만큼 바탕화면을 이루는 실의 용법 또한 다르다. 이번에는 일정한 크기로 자른 토막 실을 중첩해 산을 만들고 풍경을 일구는데, 마치 먹그림에서의 준을, 필을, 획을 떠올리게 된다. 빛의 질감을 형용하던 마음의 결이 풍경의 결로 옮아왔다고 해야 할까. 

이처럼 모든 존재에는 결이 있다. 마음에도 결이 있고, 풍경에도 결이 있다. 질 들뢰즈는 인간의 의식에도 결(주름)이 있다고 했다. 결은 접혀 있어서 접힌 부분은 잘 안 보인다. 아마도 상처가 깃든 자리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존재(그리고 풍경)의 결은 동시에 존재(풍경)의 상처이기도 할 것이다. 

촘촘한 결이 있는가 하면 성근 결도 있다. 결에 변화를 주면서 울울한 산세를 표현하고, 완만하게 흐르는 능선을 표현하고, 산맥과 산맥이 연이어진 계곡을 재현한다. 그리고 산 위에는 해(아니면 달이라고 해도 좋을)가 떠 있어서 산 능선을 부드럽게 비치고 있다. 작가가 유년의 기억으로부터(그러므로 창문을 통해) 소환한 빛의 질감이 또 다른 표현을 얻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작가는 마블링 기법을 도입해 산인지 하늘인지 모를, 멀리 보이는 산이라고 해도 좋고, 산 위로 내려온 하늘의 기운이라고 해도 좋을, 그리고 그렇게 산과 하늘의 경계를 허무는 풍경을 예시해준다. 

기하학적인 형태와 유기적인 풍경, 그리고 여기에 비결정적인(움직이는?) 하늘이 어우러져 현실 속 풍경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른 느낌의 풍경을 예시해준다. 아마도 현실 속 풍경은 다만 참조할 뿐, 색면추상과 마찬가지의 기억을 더듬어 그린 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이상향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내면 풍경을 그린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색면추상과 풍경이, 기하학적 형태와 유기적인 형태가 사로 구별되면서 합치된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Exposed in light_code of life>라고 부른다. 삶의 코드를 빛으로 드러낸다는 의미다. 빛의 질감을 매개로, 그리고 여기에 실의 질료를 매만지는 손길을 통해 자기 내면의 추억을, 기억을, 욕망을, 관계의 감정을, 그러므로 삶을 표출한 그림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실제 하는 창문이며 현실 속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구축한 내면 풍경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자기 치유며 정화를 실현한 그림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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