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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회화는 어떻게 자기표현이, 몸이, 감각이, 그러므로 자기가 되는가

고충환




김시원/ 회화는 어떻게 자기표현이, 몸이, 감각이, 그러므로 자기가 되는가
 


분방하게 화면을 가로지르는 붓질이, 붓질에 가해진 격렬한 제스처로 흘러내리거나 튀겨나가면서 정착된 물감 자국이, 농밀하거나 건조한 붓질 자국이 여실한 비정형의 얼룩이, 알만한 혹은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들이, 그 자체 드로잉이라 해도 좋을 휘갈겨 쓴 텍스트들이, 알만한 형상이 영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암시적이거나 추상적인 형상들이, 형상이라기보다는 유기적인 덩어리들이, 그리고 여기에 밑칠이 겹쳐 보이는 중첩된 화면이 한눈에도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고 액션 페인팅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리 말로 치자면 몸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추상표현주의와 낙서 회화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합체된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오롯이 자국과 흔적과 얼룩으로 그린 암시적인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무슨 자국? 무슨 흔적? 바로 그 자국과 흔적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암시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이 혹 숨겨놓고 있을지도 모를 의미를 캐내는 것이 곧 작가의 작업을 읽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한가지 문맥을 한차례 쌓아 올리고 완전히 다른 장면으로 전환하는 순간을 그린 것이라고 했고, 문맥 만들기와 문맥 부수기를 반복하면서 적절한 경계를 찾아가는 그림이라고 했고, 오롯이 직선적인 감각만이 살아있는 단순하고 강한 상태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했고, 새로운 언어의 예측할 수 없는 부분마저도 과감하게 허용한 그림이라고 했다. 혹은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작가가 지향하는 경향성의 회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맥을 쌓고 전환한다는 것, 문맥을 쌓고 몸을 튼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문맥으로부터 다른 문맥으로 갈아탄다는 것이고, 하나의 감정선으로부터 다른 감정선으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탈맥락과 재맥락의 기술일 수 있다. 이를테면, 먼저 문맥을 쌓는다. 그러므로 관성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몸의 관성을 좇아 그리고, 감각의 관성을 따라 그린다. 그리고 문맥에서 탈주하고 몸을 튼다. 문맥을 해체하면서 그러므로 어쩌면 부정하면서 다른 문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관성적인 그리기, 알만한 그리기에서 빠져나와 불현듯 침입해 들어오는 새로운 그러므로 낯 설은 감정선에 자기를 내어준다. 그 감정선을 오롯이 맞아들인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마저 낯선 자기_타자를 받아들인다. 그림이란 결국 자기를 표현한 것이고, 낯선 언어 그러므로 낯선 표현마저 자기일 것이므로. 

그렇게 문맥을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한다. 문맥 속에 정주하고 탈주하기를 거듭한다. 무슨 말인가. 문맥을 긍정하고 부정하기를 반복한다. 자기를 긍정하고 부정하기를 거듭한다. 변증법의 논리다. 긍정을 부정하고 부정을 긍정하다 보면 결국 큰 긍정에 도달한다고 보는 논리다. 그러므로 부정마저도 긍정에 복무하고 종사한다고 보는 논리다(헤겔의 이성의 간계). 몸 그러므로 감각이 알고 있는 그리기와 나 자신에게마저 낯선 그러므로 예기치 못한 그리기의 돌발적인 출현과 간섭이 길항하고 부침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이, 그러므로 완결이 끝내 보류되는 과정이, 다시 그러므로 잠정적인 어쩌면 항상적인 과정만 있고 완결은 없는 무작정 열린 과정이야말로 회화일 수 있다
자크 데리다의 차연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림을 그릴 때 일어나는 일, 그러므로 회화와 주체가 상호 긴밀하게 자기를 교환하는 일, 다시 그러므로 회화의 생리를 그린 그림 혹은 회화의 생태학에 부합하는 그림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회화 자체를 주제화한 회화, 중층회화 혹은 메타회화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앞서 그림은, 특히 작가의 그림은 자기표현이라고 했고, 감각이라고 했고, 그러므로 자기라고 했다(자기의 현현? 자기의 외화?). 작가의 말에서처럼 오로지 직진할 뿐인 감각만을 좇아 그리는 것, 여기에 때로 자기 자신에게마저 낯선 새로운 언어, 낯선 표현마저 마다하지 않고 맞아들이는 그리기, 그러므로 감각적인 그리기, 어쩌면 반무의식적인 그리기일수록 더 그렇다. 그 그리기 속에 작가는 자신의 자국을 남기고, 흔적을 숨겨놓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림 속 어디에 어떻게 자신을 숨겨놓고 있는가. 여기서 다시, 어쩌면 문맥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행위 속에 그 답이 있을 수 있다. 문맥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행위를 회화의 논법으로 풀어쓰면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한다는 말과도 같고, 드러내고 숨기기를 거듭한다는 말과도 같다. 여기서 그림이 자기라고 한다면, 그려지는 것도 자기고 지워지는 것도 자기다. 드러나는 것도 자기고 숨는 것도 자기다. 

그리고 여기에 롤랑 바르트의 너무 많이 고쳐 쓴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이론이 있다. 옛날 종이가 없던 시절에 종이 대신 양피지를 썼다. 종이처럼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쓴 걸 지우고 다시 썼다. 그렇게 비록 최종적인 텍스트만 보일 뿐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 무수한 지워진 텍스트를 숨겨놓고 있다. 그 양피지 위에 내가 누군지 쓴다. 내 감각을 좇아서 그린다. 그리고 아니다 싶어 고쳐 쓴다. 불현듯 침입해 들어오는 낯선 감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시 내가 누군지 고쳐 쓴다. 낯선 감각으로 처음 감각을 덮어서 가린다. 그래도 내가 누군지에 대한 최초 정의의 흔적은 남는다. 덮어쓴 감각 아래로 처음 감각이 희미하게 비쳐 보인다. 나는, 나의 정의는 그렇게 중층화된다. 덩달아 그림도 중층화된다. 그러므로 나는 지워진 나들의 총체다. 내가 그린 그림은 나를 거쳐 간, 내가 지운 감각들의 집합이다(참고로 후기구조주의에서 주체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감각, 몸, 그러므로 자기와 동일시되는 그리기를 매개로 진정한 자기(불교에서의 진아)를 찾아가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이고 여정일지도 모른다. 비록 추상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자기반성적인 그림의, 혹은 그리기의 전형적인 경향성의 회화를 예시해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플라잉 요가를 매개로 작가가 어떤 정신적 상태에 도달하여 본인 스스로 그러므로 자기_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지만 계속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작업(2019)을 다시 본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주어진 모든 답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자신(자기_타자)과의 합일을 그러므로 전인을 추구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직 희미한 자국을 남길 뿐. 손에 잡히지 않는 흔적으로나 남을 뿐. 그 자국과 흔적으로 겨우 유추해볼 수 있을 뿐. 그 자국이, 그 흔적이 감동을 주고, 감각적 쾌감을 준다. 나 역시 그럴 것이므로. 나 또한 그 무모한 질문을 멈추지 못할 것이므로. 회화적인, 너무나 회화적인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라는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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