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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도시의 불빛, 꿈처럼 아롱거리는, 신기루처럼 먼

고충환



김성호/ 도시의 불빛, 꿈처럼 아롱거리는, 신기루처럼 먼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는 새벽녘의 어스름한 여명 속에 다 쏟아놓고 싶다. 삶의 아픔, 상처, 혹은 사랑까지도...밝고 화사한 것보다는 어둠 속에 짙은 그리움이 느껴지는 그림, 추상적인 듯하지만 보는 이의 감성을 툭 건드리는 그림...나의 그림은 삶을 향한 따뜻한 위로다. (작가 노트) 


새벽이 왔는데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삶이 준 상처와 아픔으로 뒤척이느라, 때로 사랑으로 번민하느라 깨어있는 사람들이다. 김성호는 새벽을 그린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새벽이기보다는 밤새 뒤척이고 번민하는 사람들의 새벽을 그린다. 그러나 정작 그가 그려놓고 있는 새벽 그림 어디에도 뒤척임도 없고 번민도 없다. 없다기보다는 잘 보이지 않는다. 푸르스름한 새벽의 공기가 그 위로 내려앉아 뒤척임을, 번민을 덮어서 가리기 때문이다. 새벽의 온기가 뒤척이는 사람들을, 번민하는 사람들을 감싸 안으면서 위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밤새 뒤척인 사람들, 밤새 번민한 사람들이 다시 새벽이 온 것에 안도한다. 새벽은 그렇게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재생한다. 

그러나 위로는 새벽의 본성이기보다는 새벽에서 찾아낸, 그러므로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의 것이기도 한, 새벽의 기질이다. 다시 말해 작가가 발굴해낸,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감성이 보아낸 새벽의 물화된 형식으로, 새벽에서 찾아낸 색감과 질감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재생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새벽은 풍경이다. 그리고 풍경 자체는 객관적 현실이기보다는 주관과 객관이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직물이다. 새벽에서 나에게로, 내 쪽에서 새벽으로 건너가고 건너온 것의 상호작용이다. 결국 나의 무엇이 어떻게 건너갔는지에 따라서 새벽의 색감이 결정되고 질감이 결정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정서와 감성마저도. 그 색감과 질감이 온기와 함께 위로를 주는 느낌이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다(그 자체 일정한 추상과 생략으로 드러난 작가의 그림과도 무관하지 않은).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기술이다. 미처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을 끌어들여 그림을, 그림의 의미를 확장하는 기술이다. 사물 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에 충실하면 암시는 줄어들고, 그 정도가 느슨하면, 그 구조가 성글고 구멍이 숭숭하면 암시의 몫은 그만큼 더 커진다. 그 구멍을 저마다의 의미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 점에서 암시는 그림 속에 관객을 참여시키는, 그림이 숨겨놓은 의미를 완성하도록 관객을 초대하는, 환대의 기술이다. 

그렇게 비록 작가의 그림에 눈에 보이는 뒤척임도 없고 번민도 없지만, 꿈꾸듯 아롱거리는 도시의 불빛이 뒤척임을 그리고 번민(불빛 아래 잠 못 이루는 누군가)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암시적이다. 그렇게 비록 작가의 그림에 손에 잡히는 위로도 없고 치유도 없지만, 작가가 새벽에서 찾아낸 기질, 그러므로 색감과 질감이 온기(흡사 도시의 불빛을 감싸 안는 것 같은 어둠)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암시적이다. 그렇게 먼발치서 아롱거리는(마치 사람들이 꾸는 꿈처럼), 때로 아득하게 가물거리는(흡사 붙잡을 수 없는 욕망처럼 먼) 도시의 불빛을 매개로 한 작가의 그림이 번민하는 사람들을 감싸 안으면서, 삶의 상처와 아픔을 새벽의 반투명한 대기 속에 품어 안으면서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만든다. 


최근 한국회화의 한 경향으로 도시 회화(어반스케이프)와 서울 진경이 거론된다. 도시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지금 여기의 현실을 반영하는 경향성의 회화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 자체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리얼리티(현실주의)를 얻는 한편으로,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에게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여기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면서 느끼고 체감하는 정서적 감정에 가깝다. 쉽게 말해 마음 둔 곳이 고향이고, 마음 가는 곳이 고향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그 고향을 상실했다.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부유하고 방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이라는 말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실제로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 둘 곳을 정하지 못해 부유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 도시의 포용력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게 도시는 상실한 사람들의 불안정한 거처가 되었고, 타자들의 임시거소가 되었다. 

그렇게 보기에 따라서 도시는 징후고, 증상이며, 질병일 수 있다. 그리고 새벽의 파르스름한 공기로 상실한 사람들을 감싸 안는, 위로하고 치유하는 작가의 그림이 그 진단과 관련이 깊다. 그렇게 밤과 새벽 사이를 스펙트럼으로 가진 작가의 그림은 도시 회화와 서울 진경의 목록에 도시야경을 추가한다. 지금까지 도시는 회색 도시, 콘크리트 도시, 삭막한 도시, 무표정한 도시, 그리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필름 누아르에서처럼 냉정한 도시로 수식된다. 그 수식에 정서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여백은 없다. 작가의 그림이 그 수식에 틈을 내고 여백을 만든다. 화려한 도시, 욕망 도시, 잠 못 이루는 도시의 불빛으로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정서를 일깨운다. 

그러나 그렇게 작가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의 질감은 무분별한 욕망을 형용하는 도시의 불빛을 광고하는 제스처(이를테면 네온사인으로 유혹하는 거리의 불빛과도 같은)로서보다는 욕망을 연민하는 공감의 제스처(이를테면 사람들이 꾸는 꿈처럼 아롱거리는, 마치 위로하는 것 같은 불빛)에 가깝다. 그렇게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에게, 도시에 마음을 묻은 사람들에게 상실한 고향을 되돌려준다. 먼발치서 바라본, 꿈처럼 아롱거리는, 붙잡을 수 없는 욕망처럼 먼 도시의 불빛으로 도시에 멜랑콜리와 노스텔저의 정서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다시, 도시를 꿈꾸고 그리워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마치 욕망을 겨루기라도 하는 것 같은 마천루들, 멀리 다리가 보이는 한강 변, 한갓진 느낌의 버스 종점, 빗물로 번들거리는 도로 위로 새벽을 여는 차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가로등이 흐릿한 조명을 흘리고 서 있는, 흡사 잊힌 시간을 소환한 것 같은 골목길, 막 뒤로 사람들의 실루엣이 비쳐 보이는 포장마차, 건너편에서 내다 본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의 불빛, 그 불빛을 받아 희롱하듯 일렁이는 수면 위에서의 빛의 유희, 그리고 아마도 공중에서 보았을 활주로의 불빛과 같은, 작가가 그린 모든 그림에는 불빛이 있다. 

대개는 멀리서 내다보거나 내려다본 그 불빛들은 거리두기 탓일까, 가물거리는, 꿈을 꾸듯 아롱거리는, 몽롱한 느낌이다. 정적이고 고독한, 고즈넉하고 소외된, 쓸쓸한 것 같기도 하고, 저마다 사연을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이다. 아마도 작가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이런 정서적 환기며 공기의 질감은 거리두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거리두기는 사물의 본성을 가장 잘 파악하게 해주는, 실제 거리라기보다는 심미적 거리로서의 미학적 의의가 있다). 

멀고 아득한 느낌의 이 일련의 그림들은 사물 대상의 실체보다는 분위기가 강하고, 주변의 어둠과 대비되면서 도시의 불빛이 흘리는 아우라가 강조되는 편이다. 정서를 그림 안쪽으로 모아들이는(혹은 같은 말이지만, 도시의 불빛을 정서의 질감으로 환원하는) 경향으로 인해 극적이다. 마치 연극무대에서의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은, 가장자리의 어둑한 부분이 화면 가운데를 에워싸는 핀홀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도 같은 극적인 효과를 준다. 

그렇게 도시의 야경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시적이고, 서정적이고, 감성을 파고드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새삼 도시의 야경을, 도시 자체를, 도시에서의 삶을, 그러므로 어쩌면 삶 자체를 다시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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