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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혐오와 정화 사이

고충환




김병준, 혐오와 정화 사이 



작가 김병준은 9.11테러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고, 그 여파로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코로나 이후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범죄를 매체를 통해 접했다. 여기에 세월호와 21세기의 전쟁(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문명사회에 대한 회의가 혐오를 주제화하게 했고, 폭력적 현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전 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돼 한 몸처럼 움직이는 현실에서 폭력적 현실은 나와 무관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고전적인 경우로 치자면 나비효과를 미디어가 들어서 더 가속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여기에 폭력적 현실을 실어 나르는 미디어가 난립하면서 오히려 폭력적 현실에 둔감하고 무감하게 만들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풍문을 타고 들려오는 소문이 흉흉하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처럼 불안은 분명 현실이지만, 동시에 정작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막연하고 실체가 없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그렇게 불안은 현대인의 징후이며 증상이 되었다. 존재론적 혹은 실존적 조건이 되었다. 

작가는 그렇게 폭력적 현실에 노출된 희생양을 그린다(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모든 건전한 사회며 제도적 현실은 이런 희생양 제도 위에 건립되고 존속한다). 미디어에서 소환된 사람들을 그리는데, 각색하는(그러므로 어쩌면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특정인을 익명적인 주체로 만들고, 이로써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의(그리고 나의) 폭력적 현실로 만든다. 그들은 대개 얼굴이 없고 표정도 없다. 있다 해도 아마도 상처를 표상할 비정형의 얼룩이 덮어 가리고 있어서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없다기보다는 덮인 채 가려져 있다. 가리는 것을 통해 오히려 더 잘 드러내 보이는 역설적인 문법을 구사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지우고 뭉개는 과정을 통해 숨어있는 얼굴(숨어있는 슬픔? 연민?)을 캐내고 발굴하는 암시적인 문법을 구사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침묵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마이미스트 마르셀 마르소는 마임 그러므로 침묵은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미처 말로 할 수 없는 상황, 말로 전달할 수 없는 지경을 말하는 것이므로 침묵은 오히려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말, 그러므로 말의 궁극, 말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침묵은 말을 속으로 삼키는 것이므로, 속으로 삼키면서 말을 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자기_타자)과 투명하게 대면하는 과정이고, 자기반성적인 과정이고, 내재화하는 경향성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화가 추상 된다. 이 폭력적인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도저한 불안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하는 자기반성적인 물음에서 찾아낸 답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작가는 그 정화의 계기를 물에서 찾는다. 흥미롭게도 물은 외부의 상을 반영하는 성질로 인해 거울을 상징하고,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상징하고, 억압된 자기 그러므로 무의식을 상징한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그 무의식의 거울에 자기를 반영하고 비춰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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