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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래/ 빛의 환영, 그러므로 빛 너머를 비추는

고충환



권용래/ 빛의 환영, 그러므로 빛 너머를 비추는 



스테인리스스틸은 차갑다. 냉철하다. 그리고 순수하다. 나는 그 차갑고 단단함이 좋다. 도시적이며 현대적이고 지적이다. 나는 뜨거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차가운 금속을 사용한다...스테인리스스틸 유닛이 하나하나 캔버스에 부착되는 순간, 먹물을 흠뻑 적신 붓으로 화선지 위에 일 획을 그어 내리는 희열을 맛본다. 화선지 위의 먹이 발묵하듯 일 획의 유닛들은 그어진다. 발묵한다. 그 농염함 속에 빛을 담아낸다...인간은 하나의 빛이다. 그들의 문화도 역사도 삶도 빛이다. 빛은 사물에 앞선다. 
작가 노트

작가가 자기만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 자기만의 색깔을 얻는 것, 자기만의 소리로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록 작업이 형식의 각축장으로 축소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자기만의 형식을 갖는 것은 결정적이다. 개념미술 이후 현대미술이 관계와 맥락을 중심으로 한 의미론의 장으로 자기 변신을 꾀하는 와중에서도 그렇고, 더욱이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그리고 만드는, 구축하고 해체하는 형식논리와 함께 물성에 천착한 모더니즘 세대라면 더 그렇다. 여하한 경우에도 작업이란 세계에 대해 말하는 행위이고, 그런 만큼 자기만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로써 세계의 다른 국면과 이면을 보아내고 드러내는 것, 그러므로 의식을 확장하는 일)은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들이 자기만의 형식을 얻는 계기는 다양한데, 권용래의 경우에 그 동기가 흥미롭다. 작업실에서 치맥을 시켜 먹다가 구석에서 반짝이며 빛을 발하는 알루미늄 포일이 어느 날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지금 작업에서 보는 것과 같은 금속과 빛이 여기에 다 있었다. 더욱이 구겨진 포일이 난반사하는 빛의 질감이 균일하지 않다는 점도, 그래서 오히려 더 유기적이고 미묘하고 생생하다는 점도 흥미로웠을 것이다. 우스갯소리나 반농담으로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평소 작가의 감각 레이더가 곧추서 있었다고 봐야 하고, 그 레이더에 평범할 수도 있는 일상적 장면이 예사롭지 않은 순간으로 둔갑해 작가의 감각을 건드렸다고 해도 좋다. 우연은 없다. 항상적으로 스탠바이 된 상태였기에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 수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그때의 작업이 지금의 작업이 될 수가 있었다. 물론 그동안 숱한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고, 말 못 할 속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형식실험과 우여곡절 끝에 작가의 작업은 이제 제법 틀이 잡혔고, 작가 고유의 언어로 불러도 좋을 만큼, 큰 틀을 견지하면서 변주하고 확장 가능한 문법과 형식을 찾아냈다고 해도 좋다. 

그 대략적인 제작 과정을 보면, 먼저 스테인리스스틸 판을 미러링한다. 금속판에 광을 내는 것인데, 빛을 되받아치는 난반사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그리고 커팅으로 유닛을 만드는데, 원하는 형태가 다 가능하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대개 유선형의 나뭇잎 형태를 만들고, 때로 수면에 이는 파문과 같은 옆으로 긴 유기적인 형태를 만든다. 원하는 이미지며 분위기에 따라서 유닛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게 유닛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표면에 일일이 해머링을 하는데, 빛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에서 사실상의 감각적 질감이며 밸류가 결정되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다. 흡사 전통적인 방짜유기에서처럼 끝이 뾰족한 해머로 표면을 두르려 오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목한 형태가 빛을 모아들이면서 난반사하는데, 여기에 해머의 끝이 가 닿은 지점들마다 거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저마다 비친 빛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것이다. 해머로 두드린 지점들 하나하나가 작은 광원 혹은 광점으로 작용한다고 해야 할까. 오목한 형태가 빛을 한번 크게 되받아치고 나면, 그렇게 모인 빛을 작은 광점들이 재차 난반사한다(빛을 잘게 쪼갠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렇게 빛의 질감에 간섭해 섬세한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도 작가는 그 빛 효과며 간섭 효과를 물질에서 이미지로 바뀌는 순간, 마침내 빛이 산란하면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순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빛을 투과하는, 혹은 빛에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성질의 스테인드글라스용 물감(불투명 안료보다는 잉크에 가까운 성질의)으로 유닛의 표면을 채색하면 마침내 유닛(그러므로 어쩌면 전체를 위한 부분, 모나드, 단자)을 만드는 지난한 과정이 끝난다. 그림으로 치자면 터치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의 작업이 연출해 보이는 빛 효과가 직접 빛을 그리거나 만든 것이 아닌, 다만 유닛과 유닛의 상호작용(그러므로 중첩된 터치)이 만들어낸 환영이고, 이미지고, 일루전이란 점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여전히 회화의 연장선에 있음을 강조한다. 굳이 말하자면 확장된 회화 그러므로 어쩌면 설치회화로 범주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모를 심듯 유닛을 캔버스에다 심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빛이 주도하는 환영 놀이가 전개된다고 해도 좋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판을 중첩 시키면 아래쪽 판에서 반사광이, 그리고 위쪽 판 아랫면에서 반사광이 그 사이에서 만나 하나로 충돌하고 간섭하는, 그리고 그렇게 하나로 어우러진 반사광이 그림자와도 어우러져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빛 효과를 연출해 보인다. 빛과 그림자, 빛과 어둠이 어우러져 비결정(성)의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여기에 색상마저 더해지면 그 효과는 더 오묘해진다. 

어떤 형태의 유닛을 소재로 했는가에 따라서 작업이 그려 보이는 일루전은 사뭇 혹은 많이 다른 느낌인데, 가로로 좁고 긴 유닛을 중첩 시킨 작업이 파문 같고, 윤슬 같고, 물비늘 같다. 수면에 일렁이면서 물과 빛 알갱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 같은 감각적인 효과를 준다. 유닛과 유닛 사이에 난 좁은 틈(지층 같고 단층 같은)에서 굴절되고 왜곡되면서 이글거리는 빛의 불길을 보는 것도 같다. 상대적으로 패턴이 느슨한, 유닛을 성글게 붙인 작업에서는 유닛 자체보다는 유닛이 만든 그림자가 강조되면서 태양의 흑점과 같은 우주적 비전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리고 작업에 도입된 유닛의 전형적인 경우로 치자면 나뭇잎과 같은 유선형을 들 수가 있을 것인데, 그 단위원소가 모여 만들어낸 일루전이 바람에 일렁이는 촛불 같고, 무수한 꽃봉오리 같고, 연꽃 천지 같다. 연꽃 천지가 되려면 수면이 있어야 하고, 그런 만큼 누워있는 수면을 일으켜 세워놓은 것도 같다. 

이 파문, 이 흑점, 이 불길, 이 촛불, 이 연꽃은 다 무엇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이 그려 보이는 그림들은 일루전답게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환영은 없는 것, 그러므로 헛것이란 말이다). 하나같이 임의적이고, 잠정적이고,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이다. 다만 oo처럼 보일 뿐. 이야말로 무작정 열린 그림이 아닌가. 여기서 보면 이렇게 저기서 보면 저렇게 보이는 살아있는 그림이 아닌가. 무슨 말인가. 보는 사람 저마다 다른 것을 보아도 상관이 없고 무방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저마다 다른 마음의 눈으로 볼 일이라는 말이다. 

한편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러므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그럼에도 색을 색이라 하고 공을 공이라 하는 것은 다만 현혹하는 마음, 그러므로 유혹하는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에 현혹되지 말고 마음 너머를 볼 일이고, 색 너머를 볼 일이고, 형태 너머를 볼 일이고, 감각 너머를 볼 일이다. 그게 뭔가.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일렁이는 불꽃과 화염 너머에 무엇이 겹쳐 보이는가. 신이라고 해도 좋고, 영혼이라고 해도 좋고, 본질이라고 해도 좋고, 장엄이라고 해도 좋고, 숭고라고 해도 좋고, 존재가 유래한 원천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영성주의의 희미하게 꺼져가는 불꽃을 새삼 되살리고 있다. 그리고 빛을 투과하는 반투명한 성질의 아크릴판 조각을 소재로 한 일련의 설치작업에서 그 영성주의가 유래한 하늘의 조각을, 빛의 편린들을 또 다른 형식의 질감으로 소환해 보여준다.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부드럽고 우호적인, 존재보다 앞서 있었던 빛(그러므로 존재가 유래한 빛), 그러므로 영성주의의 또 다른 성정을 체감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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