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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안평안견예술정신전, 몽유도원도를 통해 본 예술정신

고충환



제13회 안평안견예술정신전, 몽유도원도를 통해 본 예술정신 


고충환 | 미술평론가

몽유도원도, 꿈을 그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이 꿈에 본 풍경을 전해 듣고 안견이 그린 그림이다. 가로로 긴 그림의 왼쪽에 현실 세계가 그려져 있고, 첩첩산중으로 가로막힌 가운데 부분을 지나가면(경계? 관문? 통과의례? 예술은 이야기하는 기술이고, 통과의례는 이야기들의 이야기, 그로부터 이야기들이 파생되고 변주된 이야기, 그러므로 원형적 이야기에 해당한다), 그림의 오른쪽에 무릉도원이 기다리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림을 읽으면 그대로 현실과 이상, 현실과 내세로 나타난 삶의 여정이 되고, 삶의 알레고리가 된다. 

인간은 의식적인 동물이다. 비록 몸은 현실에 붙잡혀 있지만, 의식만큼은 자유자재할 수 있다. 마음 가는 데가 어디든 의식을 빌려 자기를 보낼 수 있다.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사유의 유목을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는 현실에 붙잡힌 몸이 아닌,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의식일 수 있다. 다시, 그렇게 인간은 몸과 의식이 분열돼 있고, 현실과 이상이 분리돼 있다. 그러므로 정색을 하고 말하자면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정신 분열은 보편 인간의 조건이고 운명이며, 부조리한 삶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이 바로 이런 인간의 보편조건과 운명, 그리고 부조리와 씨름하는 일이다. 다시, 그러므로 몽유도원도는 바로 이런 보편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그러므로 어쩌면 예술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무릉도원은 이상향이다. 현실에 이상향을 실현하고 싶은 대군의 꿈이 반영된 것일 수 있고, 당시 문인 사대부의 보편 정서로 치자면 세속적인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 자연에 귀의하고 싶은 은일 사상 그러므로 도가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이 억압된 욕망이 우회적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했다. 무의식이 자기를 실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꿈이 오히려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이며, 현실의 원형이며, 원형적 현실이라고 했다(바로 여기서 초현실주의가 유래한다). 그러므로 현실은 바로 이렇듯 욕망을 실현하려는 개별주체와 그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제도의 관성이 부닥치는 장이다. 자유자재한 의식 곧 자유 정신과 현실이 충돌하는 장이다. 그리고 예술은 바로 이처럼 충돌하는 장으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 예술은 충돌하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아예 충돌하는 장을 예시하기도 한다. 억압된 현실을 주지시키기 위함인데, 그렇게 되돌아온 것들을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부르고, 자크 라캉은 실재계의 돌발적인 출현이라고 부른다(이 지점에서 낯설게 하기, 소외효과와 소격효과가 그 당위성을 얻는다). 


이상향, 그러므로 유토피아에 대하여  

여기서 다시, 무릉도원은 현실에 이상향을 실현하고 싶은 대군의 꿈이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이상향을 서양의 논법으로 옮기면 유토피아가 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유토피아는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의 저작에서 유래했고, 이보다 더 전으로 치자면 플라톤이 이상 국가의 한 형태로 제시한 철인정치와 철인국가에 소급된다. 현실에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이상을 꿈꾼 것이란 점에서 사회학적 의미를 얻는다. 

한편으로 유토피아는 이런 현실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더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유토피아는 원래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 그러므로 다만 인간의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장소, 다시 그러므로 자유 정신과 사유하는 유목의 형태로만 비로소 그 의미를 얻는 장소를 뜻한다. 현실과 이상의 분리로 나타난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주지시키면서, 동시에 이상을 통해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말해주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개념이다. 꿈꾸는 인간 그러므로 꿈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세우는 사람,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망가진 세계를 수선하는 사람(발터 벤야민)이 기거하는 개념적 장소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가 있다. 군대, 감옥, 정신병원, 기숙사, 그리고 때로 휴양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유토피아와 다른 점은 분명 현실에 존재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 망각 된 장소 그러므로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싶은 장소인 것이 다른 점이다. 잠재적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할 수도 있는, 어쩌면 사회가 자기의 불안을 투사한, 그러므로 전복과 혁명의 계기를 내장하고 있는 장소인 것이 다른 점이다. 사회학으로 치자면 유토피아보다 더 현실적인, 그리고 어쩌면 심리학적인 개념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어쩌면 유토피아의 이중성과 양가성을 증언하는, 유토피아의 희미한 그림자라 해도 좋을 것이다. 


흉중을 그리는, 그러므로 숨은 뜻을 그리는 

대군의 입장에서 볼 때가 그렇고, 이번에는 화가의 입장(아마도 당시 문인 사대부의 계급의식과도 통할)에서 화가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자. 안견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상상으로 그렸다는 말이다. 이 말은 산천을 주유하면서(안견이 안평대군의 머릿속 그러므로 흉중을 주유하면서), 눈으로 본 것들을 기록하면서, 종래에는 기억으로 그림을 그렸던 선인들의 작화 방식과 태도와도 통한다. 

여기서 산천을 주유하는 것과 보는 문제 그리고 기억을 통한 회상(과거를 현재에 불러오는)의 문제가 모두 하나로 통한다. 그 이면에는 화가의 자질과 덕목이 함축돼 있다. 여기서 현실은 기억에 자리를 내어준다. 비록 산천을 주유하고 보는 문제 그러므로 현실에 대한 관찰은 집요하고 철저해야 하지만, 여기서 현실은 다만 기억 그러므로 그림을 위한 매개며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림이란 현실을 참조하는 행위이고, 그리고 예술은 현실을 조작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만의 세계를 세우는 일, 다시 그러므로 자기만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대상에 숨은 뜻을 읽고, 자기의 숨은 뜻으로 해석하는, 그렇게 뜻과 뜻이 쟁투하고 부침하는(아와 타가 한 몸으로 섞이는, 가다머의 지평 융합이 일어나는) 치열한 과정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몽유도원도는 어쩌면 안평대군의 이상과 안견의 비전이 의기투합해 만든 합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생각해본 것들 

대개 서양에서 예술은 세계의 감각적 닮은꼴을 지향한다(재현론). 역사적 당위를 들어 특정의 이데올로기를 대리하기도 하고(이념론), 당대적인 시대정신을 반영하기도 하고(반영이론과 리얼리즘론), 단순히 화가의 눈에 비친 스쳐 지나가는 세계의 표면 현상을 기록하기도 하고(인상론), 개개인의 사사로운 기분이나 정념을 표출하기도 하고(표현론), 정상적인 언어로는 미처 전달할 수 없는 어떤 비현실적인 실재를 비정상적인 언어로 전달하기도 하고(상징론과 기호론), 인간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는 무의식적 욕망을 대리하기도 하고(정신분석학과 심리론), 존재가 유래한 어떤 근원적인 장소로 자기를 소급시키기도 하고(원형론과 신화론), 현실과는 거리가 먼 소외된 조건 속에서 예술만의 자율성을 추구하기도 하고(예술지상주의와 형식론), 삶의 현장 속에서 자기의 당위를 찾기도 하고(삶의 예술), 삶의 현장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모순을 발견하기도 한다(이상주의와 실천론).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개 서양의 예술에 대한 입장이 분석적임에 반해(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동양에서 예술에 대한 입장은 종합적이다. 그러니까 동양에서는 창작이나 비평 그리고 향수의 관점에서 마찬가지로 직관을 중시한다. 불립문자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예술을 굳이 논리적인 언어로 분석하려 들지 않는다. 이는 이성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는 비트겐슈타인의 태도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런 이성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것으로서, 종교와 신 그리고 예술을 예로 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예술과 관련해 여기와 소요를 중히 여기는데, 이는 예술의 원동력을 취미와 유희 충동으로부터 찾는 서양의 논리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는 그대로 프로페셔널(아티잔)보다는 아마추어리즘(아티스트)을 미덕으로 하는 동양의 예술관에 이어지며, 그 자체 삶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예술을 보는 식의 삶의 예술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런 동양의 예술에 대한 입장이 이기론으로 나타난다. 즉, 예술은 인간이 자신의 기를 자기 외부로 드러내는 과정이며, 기를 통해 이치의 세계로 나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도를 깨치는 행위이다. 인간이 자신의 기를 외부로 드러내는 이러한 과정과 관련해서는 개인의 지평과 세계의 지평이 하나로 만나는 지평 융합에 대한 가다머의 생각과 통하고, 개별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가득 차 있어서 주와 객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메를로 퐁티의 우주적 살 개념과도 통한다. 그리고 기를 통해 이치 그러므로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는 과정과 관련해서는 감각적 사물을 통해 사물의 원인에 도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과 통하고, 종교적 도상을 절대자에 이르는 계기이며 길목으로 본 중세 기독교의 예술관과도 통한다. 

또한 동양에서 예술은 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재도론이 그렇다. 재도론에 의하면 예술이란 도를 표현하는, 도를 전달하는, 그리고 도로 들어가는 행위이며, 따라서 수행하는 마음으로 예술을 해야 한다. 도 자체가 일종의 생활철학이며, 이런 도에 기댄 예술 역시 생활철학의 범주 속에서 그 당위가 찾아져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동양에서는 이런 예술을 통해서 어떻게 쾌를 추구하는가(참고로 서양 미학에서 특히 칸트는 예술의 당위를 쾌와 불쾌, 호와 불호에서 찾는다). 한마디로 예술적 쾌는 인물동기와 물아일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즉, 나와 세계가 하나의 기로 통하는 것에서 예술적 기쁨을 맛본다는 것이다. 그 정신적인 지경이 우주론에 이어져 있고, 그 또 다른 경계가 자연 친화적인 생활에 잇대어져 있다. 그렇게 적어도 동양에서 예술에 대한 원론적인 입장은 삶과, 삶의 조건과 구별되지 않는다. 

질 들뢰즈는 예술을 감각 철학이라고 했다. 감각으로 세계와 만나는 일이며, 몸으로 세계의 이치를 깨우치는 일이다. 그에게 감각은 무엇보다도 세계를 생성시키는 힘이고 에너지이며 계기이고 원리다. 단순히 기왕의 세계에 반응하는 것을 넘어 잠재적인 세계를 그러므로 어쩌면 새로운 세계를 발굴하고 낳는 일이다. 그렇게 안평대군과 안견이 함께 꿈꾼, 같이 바라본 이상세계는 그때처럼 지금도 여전히 도래하지 않은 미래시제를 향해 열려 있다. 자기를 갱신하고 세계를 갱신하면서 항상적으로 열려 있다. 예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후학들이 어떤 예술을 실천하고 어떤 이상세계를 생성시킬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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