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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승철, 그때 그곳에 가고 싶다

고충환



옥승철, 그때 그곳에 가고 싶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상실의 계절을 살고 있다.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존재를 상실한, 자연을 상실하고, 유년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하고, 원형을 상실한 시절을 살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가 오히려 정신적인 공허와 허무를 부르는,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가 죽음보다 피로한 시대를 살고 있다. 헬조선은 허울 좋은 수식어가 아니었고, 우리만의 현실도 아니었다. 이런 도저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징후며 증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현실을 살고 있다. 

깃들 곳을 찾지 못한 새가 녹슨 못과 합판 부스러기를 물어와 아파트 베란다에 집을 짓는다. 그렇게 자연은 이제 풍문으로나 떠돌고, 아득한 전설처럼 기억될 뿐이다. 유년 시절은 너덜너덜해진 흑백사진 속에서 빛이 바래져 가고, 그렇게 의심스러운 기억과 더불어 천국보다 낯선 자기와 마주하는 드문 계기로서나 겨우 추억될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있다. 그가 떠나온 고향은 실제로 자신이 태어난 지정학적 장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보다는 근본적인 상실감 그러므로 원형적인 상실감, 다시,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을 상실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정처 없는 사람이고 떠도는 사람이다. 

원형적인 상실감?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무엇이 거듭 되돌아오는가.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사는 것이 공허하고 허무할 때, 죽을 만큼 피곤할 때 무엇이 자꾸 되돌아오는가. 억압된 것들이 되돌아오고(프로이트), 주와 객이 분리되기도 전의, 나와 세계가 행복한 결합을 꿈꾸던 상상계(자크 라캉)가 되돌아온다. 그렇게 되돌아온 것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로 내가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주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상실한 나를 위로하고, 위무하고, 치유하기 위해서 되돌아온다. 

여기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이 상실한 원형을 되불러오는 것이다. 좀 극적으로 말해 오직 상실한 것만이 의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삶의 부조리가 있고 존재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렇게 사람들이 상실한 것을 매개로 부조리한 삶과 아이러니한 존재를 주지시키고, 이로써 허물어진 삶의 의미를 회복하고 복구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가를 고장 난 세계를 수리하는 사람 그러므로 세계의 수선공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옥승철의 목판화가 그렇다. 상실한 것들을 되불러오는데, 상실한 자연을 되불러오고, 상실한 유년을 되불러오고, 상실한 자기를 되불러오고, 상실한 고향을 되불러오고, 상실한 원형을 되불러온다. 그렇게 사람들이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주지시키고, 그렇게 상실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위무하고, 치유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 저마다 아득한 자기, 잊힌 자기와 대면하게 만든다. 예술은 개별성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적인 경험이 자기에 함몰되지 않고 보편성을 얻을 때 공감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비록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주제로 한 것이지만,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이며 성향도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지만, 다만 그 정도와 종류에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 저마다 상실한 것을 주지시킨다는 점에서, 그렇게 사람들이 상실한 것들을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여기에 풍경이 있다. 파스텔을 뭉개 놓은 듯 노란 유채꽃밭으로 흐드러진 언덕이 칠흑 같은 밤바다와 대비되는, 밤하늘에 만월이 총총한, 아마도 달빛에 물든 유채꽃밭이 실제보다 더 노랗게 보이는, 그리고 여기에 밤에 흡수되면서 더 아득하고 먼 섬들이 보이는 풍경이다. 파문이 패턴을 만드는 바다 위로 어스름한 그림자를 그리는 달이 유채꽃밭과 대비되는 풍경도 있다.
 
유채꽃밭은 다른 그림에도 있는데, 언덕에서 염소 몇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뒤편으로 좀 더 낮은 언덕에는 복사꽃이 만개한 나무 몇 그루가 보이는, 더 뒤편으로는 바다가 보이는, 바다의 정적을 깨기라도 하듯 통통배가 뒤쪽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는, 한 척이어서 더 고즈넉해 보이는 풍경이다. 달빛이 유채꽃밭에 물들었는지 유채꽃밭이 달빛에 물들었는지 달빛도 유채꽃밭도 하나같이 노란 그림도 있다. 그렇게 온 천지가 노란 밭과 언덕 사이사이로 복사꽃이 만발하고, 개 몇 마리가 뛰어다니고, 마치 땅의 일부인 양 야트막한 집들이 보이는 풍경이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풍경에서 몸을 돌려 산 쪽을 보면 메밀꽃밭도 있다. 뒤편으로 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첩첩한 산들을 병풍처럼 거느리고 있는, 자기 몸 위로 나무 몇 그루를 밀어 올리는, 지천인 유채꽃밭이 언덕을 이룬 것처럼 지천인 메밀꽃밭이 봉긋한 능선을 이룬 풍경이다. 언덕 위로 도라지꽃이 알록달록한 풍경도 있고, 밭과 밭 사이에 난 길 위로 버스가 지나가는 풍경도 보인다. 

이 풍경들은 다 무엇인가. 작가는 왜 이 풍경들을 그렸을까. 이 풍경들은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상으로 지어낸 것인가. 그 둘 다일 것이다. 풍경은 자연과는 다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이지만, 풍경은 자연을 연출하고 각색하고 편집한 것이다. 자연 앞에 서면, 혹은 자연 속에 있으면 자연에서 내 쪽으로, 나에게서 자연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이 있다. 교감이다. 그러므로 자연에 물든 나, 자연으로 물든 내가 교감이다. 다시, 그러므로 자연이 나를 어떻게 물들였는지가 관건이다. 이처럼 자연에 물든 나 그러므로 자연에 자기를 이입한 것이 자연관이고 풍경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자연관은 뭔가. 자연은 이제 풍문으로나 떠돌고 전설처럼 아득한데 작가는 왜 새삼스레 자연을 다시금 소환한 것인가. 자연을 빌미로 정작 결정적인 무엇인가를 소환하고 싶은 것인가. 

작가의 그림은 실재하는 풍경을 그린 것이면서,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때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얼추 그때 그대로의 풍경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가면 유채꽃밭이 있고 메밀꽃밭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하늘에는 달이 뜨고 언덕에는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을 것이다. 바다에는 통통배가 떠가고 길에는 버스가 다닐 것이다. 그렇게 지금 그곳으로 갈 수는 있지만, 그때로 갈 수는 없다. 이처럼 하나의 풍경 속엔 그곳과 그때만큼의 차이가 있고 간극이 있다. 바로 그 차이와 간극을 메워 완전하게 하는 것, 지금 여기의 풍경으로 하여금 그때 그곳의 풍경으로 만드는 것, 그때 그곳의 풍경 그대로 시공간을 정지시키고 풍경을 박제화하는 것이 예술이고 작업이고 그림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 속엔 실재와 환상이 결합 돼 있다. 실재는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환상이 뭔가. 그리움이다. 상실한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상실한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이다. 상실한 것만이 그리워할 수 있다. 상실한 것만이 의미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상실한 삶의 의미를 되찾아줄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이 일정 부분 실재하지 않는 것을 그렸다는 의미가 그렇고, 실재를 연출하고 각색하고 편집했다는 의미가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저만의 이상향을 그렸고 유토피아를 그렸다. 바로 현실에는 없는, 정작 지금 여기에는 없는 그리움의 대상을 그렸다. 

그렸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새겼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목판화로 새기고 찍었다. 특기할 사항으로 작가는 MDF보다는 재질이 단단한, 표면에 엷게 코팅된 HDF를 판목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작가의 판화에는 목판 고유의 결이 없다. 목판이면서도 결에 방해받지 않고, 처음부터 자신이 구상한 회화적 표현 그대로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멸법 곧 한판 다색판화로 찍었다. 한판으로 새기고 찍기를 반복하는 소멸법 역시 작가로 하여금 판화 고유의 인출된 느낌보다는 안료가 중층화되면서 쌓이는 회화적인 느낌을 강조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수인 목판화가 있다. 그러데이션과 같은, 수묵화와 같은 부드러운 색감과 질감을 가능하게 해주었을 터이다.
 
이런 기법과 방법이 상호작용하면서 작가의 판화는 판화 고유의 맛을 살리면서도 회화적인 느낌이 강한 자신만의 판법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중 인상적인 것으로 유채꽃밭이 흐드러진, 메밀꽃밭이 흐드러진 부분인데, 알다시피 유채꽃도 그렇고 메밀꽃 역시 자잘한 꽃들이 모여 꽃밭을 이루고 언덕을 일구는데, 그 꼴을, 그 세부를, 그 전체적인 분위기를 손에 잡힐 듯 섬세하게, 정감있게 표현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각적임을 넘어 촉각적인 느낌마저 자아낸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회화적인, 섬세한, 촉각적인, 서정적인, 정감 있는 자신만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아마도 상실한 것을 되불러오는 작가의 마음이 그렇고, 상실한 것들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성정 그대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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