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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빛 조각, 그림자 조각, 그러므로 어쩌면 틈새 조각

고충환



김진/ 빛 조각, 그림자 조각, 그러므로 어쩌면 틈새 조각 


고충환 | 미술평론가


왜곡. 여기에 물에 잠긴 돌이 있다. 바위라고 해도 좋다. 수면을 경계로 수면 위에 있는 부분보다 물속에 잠긴 부분이 더 커 보인다. 수면에 투과된 빛이 굴절되면서 사물의 형태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 현상 그대로 작가는 정색하고 만들었다. 자연현상이지만,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진즉에 알고 있는 현상이지만, 낯설어 보인다. 보는 것과 실재는 다르다. 아는 것과 실재는 다르다. 사실은 어쩌면 다만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그러므로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상식과 합리와 실재가 다르다. 때로 눈은 거짓말을 하는데, 착시가 그렇고 착각이 그렇다. 더러 눈도 거짓말을 하고, 인식도 거짓말을 한다. 

작가는 자연현상을 빌려 바로 이런, 거짓말하는 감각과 인식론적 한계를 문제시한다. 차후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간 전체를 할애해 이런 굴절과 왜곡에 따른 감각적이고 인식론적인 한계 상황을 설치로 연출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로써 상식과 합리를 재고하게 만드는 계기의 장을 예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덩어리. 그리고 여기에 알 수 없는 비정형의 하얀 덩어리가 있다. 덩어리가 그 위에 얹힌 나무 의자와 이젤 그리고 때로 사다리와 같은 각종 생활 오브제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특이한 것이 대개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 오브제의 한쪽 다리만 지탱하고 있어서 기우뚱한 것이 한눈에도 불안정해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는 적어도 겉보기에 멀쩡한 사물들을 왜 기우뚱해 보이도록, 불안정해 보이도록 한 것일까. 어쩌면 겉보기에 멀쩡한 사물도 사실을 알고 보면 기우뚱하고 불안정한 속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사물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고, 세상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렇게 저마다 기우뚱한 균형을, 불안정한 균형을 잡느라 전전긍긍한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나무 의자와 이젤 그리고 사다리는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처럼 중심을 잡으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유사 혹은 의사 존재들이라고 해도 좋고, 그 자체 삶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다. 이로써 오브제의 다른 존재 방식을 열어놓는 한편, 사물 인격체로서 오브제를 사용하는 또 다른 방식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동선. 공을 던지면 벽에 맞고 튕겨 나갔다가, 가구 모서리를 맞추고 튀어 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가, 두세 차례 통통 튀다가, 점점 잦아들었다가, 마침내 멈춘다. 운동성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운동의 와중에 있고, 이행하는 도중에 있다. 큰 운동은 눈에 보이지만, 작은 운동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존재의 운동성은 단 한 순간조차 멈추는 법이 없다. 비록 잦아들다가 마침내 멈춘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마저도. 여기서 작가는 공을 던질 때 공이 그리는 궤적을 추적하고, 그 궤적 그대로 가녀린 철선으로 재현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작품 자체만 보면 다만 형식논리의 산물 같고, 선조 같고, 공간 드로잉으로 확장을 시도한 추상 조각처럼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외형상 추상처럼 보이는 형상(구상)을, 그러므로 어쩌면 그 속에 자기의 한 잠재적인 본성으로서 형상(구상)을 암시하는 추상을 예시해주고 있다. 한편으로 추상이 암시하는 것은 또 있는데, 철선이 휘어지고 접히는 지점마다 벽을, 가구를, 모서리를, 바닥을, 그러므로 어쩌면 공간을 암시하는 것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결정적인 형태로 붙잡을 수는 없는 존재의 운동성을, 존재가 운동하면서 그리는 궤적을, 이행을 포착해 보여주고, 그 자체로는 보이지도 않는 벽을, 바닥을, 공간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틈. 빛 조각, 그림자 조각, 그러므로 어쩌면 틈새 조각. 세상에는 그 존재 방식이 애매한 것들이 있다. 실체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실체가 있다 해도 다른 실체에 기대어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다. 빛이 그렇고 그림자가 그렇다. 아마도 바람과 공기도 그럴 것이다. 이처럼 실체 자체가 애매한 빛과 그림자를 그림도 아닌 조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작가는 이런 야심 찬 기획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조각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문(그리고 창문)틈으로 빛이 새들어온다. 시간대(그리고 환경)에 따라서 빛은 부드럽게 퍼지기도 하고 칼로 자른 듯이 떨어지는 면을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는 문틈으로 새들어오면서 면을 만드는 빛을 평면으로 붙잡아 바닥에 누이고 세웠다. 마찬가지로 평면으로 떨어지는 그림자를 잘라내 바닥에 누이고 세웠다. 그렇게 평면을 재구성한 빛 조각을 그리고 그림자 조각을 공간에 설치했다. 그것은 어쩌면 틈새가 만든 것이기도 하므로 틈새 조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공간설치작업에는 빛 조각이, 그림자 조각이, 그리고 여기에 틈새 조각이 유기적인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다. 공간에서 빛과 그림자로 나타난 틈새를 잘라낸 것이므로 비록 거기에 공간은 없지만, 틈새 조각을 통해 없는 공간을 유추하고 재구성해볼 수는 있다. 그렇게 작가는 재차 비가시적인 공간을 가시화하는 자신만의 형식을 열어놓고 있었다. 

한편으로 작가는 이처럼 빛 조각과 그림자 조각을 확대 적용한 조형 작업으로 건축 구조물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또 다른 공간설치작업을 예시해주고 있다. 실내 전시를 넘어 열린 풍경 속에 조형물을 놓는 것인데, 작가가 제안한 틈새 조각이 비가시적인 공간을 암시하고 재구성하고 완성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가시적인 건축물에 비가시적인 건축물을 덧대고 달아낸 경우를 상상해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벽과 벽 사이의 계단을 조형화한 작업도 흥미롭다. 엄밀하게는 실제 공간을 삭제한 계단의 그림자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 조형한 것이므로 그 자체 실체라기보다는 실재가 만든 그림자, 실재가 만든 상, 그러므로 부재 하는 이미지, 이차적인 이미지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건축물과 어우러진 풍경 속에 빛 조각과 그림자 조각, 그러므로 틈새 조각을 설치해 가상의 공간을 암시하고 재구성하고 완성해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사물의 뿌리. 그리고 여기에 다시, 돌이 있다. 바위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돌들에는 하나같이 가지가 돋아나 있다. 사슴뿔인가. 사슴뿔이라면 응당히 위를 향해야 할 것이지만, 가지들은 하나같이 돌의 아래를 향해 돋아나 있다. 다린가. 뿌린가. 뿌리라고 했다. 대개 돌들은 땅속에 반쯤 박혀 있기 마련이고, 그러므로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것이라고 했고, 그 뿌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작가가 보기에 돌이 그렇고, 사물이 그렇고, 세상이 그렇고, 모든 존재가 다 그렇다고 했다. 모든 존재에는 이처럼 드러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다. 아마도 존재가 유래한 근원이며 정신을 표상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부재 하는 것들, 비가시적인 것들,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고, 가시화하고, 감각의 층위로 불러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그것이 공간이든, 건축이든, 운동이든 그렇게 존재를 확장하고 감각을 확장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렇게 조각의 또 다른 쓰임새와 함께 그 확장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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