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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쓰마오)/ 냉소적 사실주의 이후, 종이 인간의 경고

고충환




황시(쓰마오)/ 냉소적 사실주의 이후, 종이 인간의 경고 



마술사가 등장해 한 손으로 모자를 벗어 인사를 건네면서 다른 한 손에 쥔 홀로 허공을 찌르자 거짓말처럼 하늘에서 돈이 쏟아져 내린다. 모자를 벗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하기 위한 속임수일 것이다. 그는 누구인가. 물신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중심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정체성을 상실하고 존재를 상실하고 신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징후이며 증상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는 이처럼 현대인이 상실한 신을 대신하기 위해 임재한 물신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내가 너의 상실을 위로해줄 것이다. 너의 공허를 위무할 것이고, 어둠 속에 길을 잃고 방황하는 너의 영혼을 밝혀줄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물신을 새로운 신으로 맞아들였다. 물신이 주신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다만 영혼을 파는 조건이었다. 사람들에게 영혼은 추상이었고 사실은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전에 없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일을 안 해도 좋았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일용할 돈이 차고 넘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만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기만 하면 되었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상 위에서, 전통적으로 산수를 축소 시켜놓은, 부를 상징하는 괴석에 올라앉아, 때로 욕망의 전리품인 양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그리고 더러 허공에 매달린 그네를 타면서 밤이면 밤마다 파티를 열었고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 때로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물속으로 가라앉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종이를 마구 구겨놓은 형상이다. 종이 인간(페이퍼맨)이라고 해야 할까. 훅 불면 날아갈 것 같고 살짝만 만져도 바스라 질 것 같은 종이 인간이 실체가 없는 허깨비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처럼 허깨비 같은 종이 인간들이 산해진미를 즐기고 흥청망청 술을 마신다. 그네를 타고 외줄 위에서 춤을 춘다. 때로 하도 술을 마셔서 물속에 빠진 줄도 모르는데,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동시에 자신은 흐물흐물 해체돼 형태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다. 여기에 그네는 가녀린 실로 지탱되고 있는데, 비록 종이 인간이지만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실이 끊어지면서 허공의 나락으로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종이 인간도 보인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해도 멀리 회오리바람이 다가오고 있어서 머잖아 바람에 먹힐 것 같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도대체 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아리송한 그림들은 다 무엇인가. 작가는 이 그림들을 왜 그렸을까. 이 그림들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그림들은 친근하고 낯설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이어서 친근하고, 그럼에도 종이 인간이나 가녀린 외줄 그네와 같은 작가가 설정해 놓은 상황 논리가 낯설다. 여기서 작가는 낯설게 하기를 제안한다. 알만한 일상적인 정경을 낯설게 재구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낯설게 하는가. 

사람들은 현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감각적 현실이 진정한 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정작 진실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진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당연한 현실은 사실은 당연한 현실이 아니었다. 상식과 합리를 명분으로 교육과 이념을 통해 제도(그리고 제도적 장치)가 개별주체에게 이식시켜준, 때로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였고 더러 허울 좋은 가치관이었다. 

그렇다면, 현실이 현실이 아니라면, 진정한 현실은 어디에 있는가. 현실의 이면에 은폐돼 있고, 억압돼 있다. 다시, 그렇다면 그 억압된 현실은 어떻게 가능한가.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억압의 더께를 걷어내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현실이, 현실 자체가, 진정한 현실이 그러므로 진실이 열릴 것이다. 여기서 다시,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현실을 낯설게 하는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인 뻔한(사실은 뻔한 줄만 알았던) 현실을 비틀고 뒤집어 보이는 것이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면 현실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현실과 연극의 보이지 않는 벽이 사라진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은폐된 현실, 억압적인 현실의 민낯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바로 아방가르드와 현대 연극의 아버지 브레히트에서 유래한 소외효과고 소격효과고 낯설게 하기 효과다. 

그렇게 작가는 알만한 일상적인 정경을 낯설게 하고, 낯설게 하기를 통해 진정한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 보인다. 그 도구가 상징이고 은유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종이 인간은 진정 자기 자신이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없고 오직 허울만 있는, 때로 저 죽는 줄도 모르고 흥청망청한 맹목적인 인간과 허망한 인생을 상징하고, 돈 그러므로 물신을 섬기는 물신의 사제를 상징한다. 그리고 여차하면 끊어질 듯 가녀린 외줄은 무상한 권력을 상징한다. 그렇게 돈을 좇다 보면, 술에 취해 있다 보면, 외줄 타기 그러므로 무상한 권력을 좇다 보면 언제 광풍이 불어와 흔적도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지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은유 곧 삶의 알레고리가 된다. 

한편으로 이런 상징과 은유는 인간을 넘어 동물에게로 확대 적용되는데, 하늘의 제왕 독수리를 구겨진 종이로 표현한 것이 그렇다. 때로 종이 독수리는 빠르게 날아오르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자잘한 부분들로 해체되는 것에서, 역시 권력의 무상함과 함께 속도(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는)에 대한 맹신을 상징한다. 그리고 아마도 공사 현장일 듯 녹슨 철근 다발을 둥지 삼아 잔뜩 입을 벌리고 있는 종이 새들이 인간 위주의 경제 논리와 개발제일주의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잃은 자연의 현실을 상징한다. 실제로 자연에서 살 곳을 찾지 못한 새들이 공사장 현장에서 물어온 못과 합판 부스러기를 얼기설기 엮어 도시 베란다에 집을 짓는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그렇게 새들은 둥지를 잃고, 사람은 자연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물 밖에 나앉은 종이 금붕어가 현대인이 처한 딜레마를 상징한다. 종이 금붕어는 여하튼 금붕어이므로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다시 물속에 들어간다면 흐물흐물 해체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현대인은 어쩌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사태에 처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동물을 빌려 무상한 권력과 인간이 처한 생태환경의 위기를 주지한다는 점에서, 동물을 소재로 한 이 일련의 그림들에 대해서는 작가의 작업이 내재한 또 다른 의미론적인 측면 그러므로 우화적인 서사의 한 경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자본주의가 첨예화된 현실의 암울한 미래를,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사회 공동체와 지구촌 구성원 모두가 폭망할 수도 있는 묵시록적인 비전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깃털보다도 더 가볍고 스치기만 해도 바스라 질 것 같은 종이 인간은 사실은 이런 암울한 미래며 묵시록적인 비전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몸을 틀거나 현실 그러므로 욕망의 드라이브를 멈춰 세워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주지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 작금의 현실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풍요로운 현실에 내장된 폭탄을 경고하는)으로 읽는 것이 맞겠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통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탑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시대에 대한, 세태에 대한 풍자와 비판 정신의 실천 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소위 사대천왕을 중심으로 한 중국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로 알려진 냉소적 사실주의의 맥을 잇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냉소적 사실주의 이후, 혹은 마찬가지 의미지만 후기 냉소적 사실주의라고 해야 할까. 그 종이 인간의 구겨진 얼굴에서는 심지어 냉소적인 웃음마저도 확인해볼 도리가 없다. 다만 깃털보다도 더 가벼운 덧없는, 공허한, 무상한 존재의 제스처(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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