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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흠/ 캐릭터, 인간의 유형학

고충환


이조흠/ 캐릭터, 인간의 유형학 


예술은 세상을 보는 창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라고 해도 좋다. 반영이론과 거울 이론을 말 그대로 수용하고 실천한 경우라고 해도 좋다. 특히 재현적인 회화의 경우에 창과 마찬가지의 사각 틀의 구조를 포함하고 있는 화면은 창작 주체가 세상을 보고 보여주는 창이란 정의에 부합한다. 그렇게 작가 이조흠은 화면을 자신이 세상을 보는 창처럼 사용한다. 아니면 스크린이라고 해도 좋다.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 소사이어티 그러므로 구경거리의 사회에서처럼 소설보다 더 허구적인 현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현실이 상영되는 극장이라고 해도 좋다. 

그 창 위로, 그 스크린 위로 사건으로 점철된 한 시대가 지나가고, 동시대적 풍속도의 단면이 흐른다. 시장경제를 타고 회귀한 신제국주의와 다국적기업의 현란한 풍경이 지나가고, 대중문화를 타고 전송된 퇴락한 영웅들의 신화가 지나가고, 비디오드롬을 연상시키는, 현실 위로 범람한 악몽과도 같은 비현실이 지나가고, 욕망이 오히려 무기력을 돋보이게 만드는 헐벗은 청춘이 지나간다. 

스타벅스가 지나가고, 트위터가 지나가고, 세종대왕이 지나가고, 퇴계 이황이 지나가고, 아기 상어가 지나가고, 포켓몬스터가 지나가고, 피카츄가 지나가고, 도널드 덕이 지나가고, 스머프가 지나가고, 배트맨이 지나가고, 헐크가 지나가고, 아기곰 푸우가 지나가고, 심슨 부부가 지나가고, 해태가 지나가고, 미니미(싸이월드에서 자신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지나가고, 캐릭터가 지나간다. 아마도 아바타도, 이모티콘도 스쳐 지나갈 것이다. 

동시대를 이미지의 시대라고 한다. 이미지의 정치학의 시대라고도 했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이런 시대 정의가 실감 나고, 이런 시대 감정에 공감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현실을 믿지 않는다. 오직 이미지면 충분하다. 이미지가 곧 현실이다. 모니터 화면이 세상을 대신하고, 저마다 세상을 휴대할 수 있는 시대에 이미지는 현실을 삼키고, 진실을 삼키고, 세상을 삼키고, 모든 것을 삼킨다. 이처럼 무분별한 이미지의 범람 속에 작가가 우두커니 서 있다. 바깥에서 보기에 등을 보이며 화면 안쪽을 향해 서 있다. 

미셀 투르니에는 사진 에세이집 <뒷모습>에서 사람의 뒷모습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뭔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표정이 보이는 얼굴에 비해, 표정을 알 수 없는,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표정을 상상하게 만드는,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부분이 있다고도 했다. 이런 함축과 암시가 작가가 앞세우고 있는 범람하는 이미지에 대비되면서 극적 효과를 준다. 여기서 작가는 역사의 목격자가 되고, 시대의 증언자가 된다. 그리고 그 목격과 증언에 화면 밖에 있는 우리를 동참시킨다. 그렇게 그림을 그림 바깥으로 확장 시킨다. 

그리고 일련의 사진 작업에서 작가는 회화에서처럼 주변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주 보며 분주한 도심 속에, 야경 속에, 광장 속에 저 홀로 서 있다. 그렇게 서 있는 작가가 섬처럼 고독해 보인다. 흐르는 사람들 속에 저 홀로 정지된 시간처럼 우뚝한 작가가 군중 속의 고독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자기반성적이고 존재론적인 물음을 묻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을 소셜 아이덴티티 그러므로 사회적 주체(혹은 마찬가지 의미지만, 사회적 정체성)라고 부른다. 이 제목에 반영된 주제 의식은 사실 사진은 물론이거니와 앞서 본 일련의 회화 작업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는 반복 중첩된 자화상을 소재로 한 소셜 에고 시리즈와도 통한다. 루이 알튀세는 제도가, 제도의 이념이 개인을 호명하면서 주체를 부여한다고 했다. 제도적 주체고 이념적 주체다. 더 급진적인 경우로는, 후기구조주의에서 주체는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범람하는 이념들, 이미지들, 정보들, 사건들, 사실들, 현실들, 진실들,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허구와 조작과 같은, 타자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나를 만들고 형성시킨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은 여전히 메아리 없는 여백으로 남는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세모형 인간, 네모형 인간, 그리고 동그라미 형 인간과 같은, 인간의 세 타입을 각각 평면으로, 입체로, 영상설치작업으로 제안하고 변주한다. 종전 캐릭터 작업이 인간의 유형학으로 확대 적용된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캐릭터 자체가 이미 인간을 유형화해 표현한 것임을 생각하면, 알만한 캐릭터에서 시작해 자신만의 캐릭터를 생산하기에 이른, 어쩌면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유형학으로 치자면 사진이 먼전데, 독일의 베허 부부 작가가 창시한 유형학적 사진이 그렇다. 유형학을 인간에 적용한 경우로는 오윤의 작업이 널리 알려진 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익명적이고 추상적인 면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인성을 특정해 지목할 단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익명적이고 추상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의 시대 감정을 반영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차후의 작업에서 그렇게 유형화된 인간형이 현실에 간섭하고 매개되면서 어떤 서사를 어떻게 풀어낼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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