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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준/ 인형의 집으로의 초대, 캐릭터에게 집을 지어 주다

고충환


노준/ 인형의 집으로의 초대, 캐릭터에게 집을 지어 주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대개 예쁘고 귀엽고 깜찍한 것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이 그렇고 어른들도 그런데, 다만 어른의 경우에는 사회적 관습이 어쩌면 타고난 본성이라고 해도 좋을 그 성향을 억압해 외부로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아이와는 다른 점이다. 드물게 그 성향이 표출될 뿐만 아니라 공공연하게 즐기기조차 하는 어른을 키덜트 곧 아이 어른이라고 부른다. 어른임에도 꼭 아이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아이의 상태에서 성장을 멈춘 사람과 같은 퇴행적인 경우로 보기도 하지만, 영화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의식적으로 성장하기를 멈춘 예도 있다. 그렇다면 오스카는 왜 성장을 거부하는가. 아이의 순수한 심성을 보존하고 싶어서이고, 성장이 순수를 훼손한다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자크 라캉은 상상계가 상징계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억압이 일어나고, 그렇게 억압된 상상계가 실재계로 변질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실재계가 호시탐탐 상징계의 전복을 노린다고도 했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억압이 일어나고, 그렇게 억압된 아이의 심성이 트라우마로 남아 어른들의 사회를 위협한다는 말이다. 사회적 심리학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억압된 아이의 심성을 되찾는 행위는 어쩌면 잃어버린 본성(어쩌면 존재론적 원형?)을 되찾는 일이며, 그 자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치유의 과정일 수 있다. 예쁘고 귀엽고 깜찍한 것에 이끌리는 성향은 이처럼 그 자체 본성일 뿐만 아니라, 여기에 치유의 기능과 의미마저 담보하고 있다. 

그저 사람들은 대개 예쁘고 귀엽고 깜찍한 것에 이끌리는 성향이 있다고 해도 될 것을 좀 장황하게 설명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이면에서 본성과 억압의 줄다리기가, 욕망과 사회적 관습의 숨바꼭질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개별주체와 제도는 운명적으로 반목한다고 본 프로이트의 입장이나, 거창하게는 그 속에 혁명의 계기를 내장하고 있는, 욕망의 사용법에 대한 질 들뢰즈의 견해가 빛을 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 노준은 저만의 캐릭터를 만든다. 저만의 캐릭터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알만한 대상을 각색하고 변형하고 변주한 것이다. 판다 같기도 하고 강아지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한 캐릭터들이 사람과 마찬가지의 삶을 흉내 내면서 저만의 삶을 산다. 이를테면 방석에 서서 요가를 한다거나, 방석에 앉아 명상에 잠긴다거나, 방석에 턱을 대고 조는 것과 같은. 심지어 캐릭터들은 저마다 저만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조차 하다. 이런 닮은꼴이나 모방이 친근함을 자아내는 것이 펫 열풍이나 이모티콘 마니아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기서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이 아이들을 대신한다. 아이들의 심성이, 동심이,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른의 관점에서 상실된 유년을 되불러온다고 해야 할까. 

아이들은 저절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동심도, 동화도, 감정이입도 능력이다. 그리움을 소환하는 것도 능력이다. 상실된 계절을 사는 어른이 자기를 좀 더 사랑하게 만드는, 광맥처럼 캐내지 않으면 처음부터 없었던, 잠재적인 능력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예술과 관련해서 감정이입은 결정적이다. 이타심, 타자에 대한 이해, 타자 속에서 상실된, 잃어버린, 잊힌 자기를 발견하는(그러므로 타자를 자기_타자로 맞아들이는) 행위와 과정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캐릭터를 소재로 한 작가의 조각이 남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처럼 상실된 계절을 사는 어른의 관점이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캐릭터들은 마냥 아이 같지만은 않다. 마냥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지만은 않다. 어른에게서 건너간 상실을 흔적 그러므로 상흔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상실의 흔적이 작가의 조각을 남다르게 만든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작가는 상처와 상흔을 어디에 어떻게 아로새기는가. 상처와 상흔은 의외로 조각 자체의 제작과정 속에 있다. 이를테면 조각을 주조하는 과정에는 주형틀 그러므로 거푸집이 있다. 그로부터 조각이 유래했으므로 조각의 모형(모본)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 거푸집에서 조각을 분리해내면 미처 재료가 덜 채워진 채 빈 부분도 있고 이음새 부분도 남아있기 마련이다. 보통은 그 부분을 손질로 마무리해 감쪽같이 만드는 과정을 거치는데, 작가는 그 부분을 그대로 살렸다. 목조에서도 마찬가진데, 사포로 갈아낸 흔적이나 칠이 벗겨진 채 각진 부분이 여실하다. 

아마도 그 부분마저도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부분이 마치 상흔(하나의 조각을 낳기 위한 산고의 아픔?)을 닮았고, 상처마저도 존재의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지만, 여하튼 캐릭터는 그 이면에 이런 상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보자면 이런 양가성(순수와 상처?)으로 인해 오히려 더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다고도 할 수가 있겠다. 더불어 작품과 관련한 완성의 개념을 재고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과정마저도, 부분마저도, 그리고 상처마저도 조각의 일부로 싸안는 것과 같은. 

이런 상처와 상흔은 근작에서 마치 흘러내리는 것과 같은, 녹아내리는 것과 같은 일련의 캐릭터들에서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된다. 서로 손을 맞잡고 서 있거나 보트에 몸을 실은 채 노를 젓고 있는 것과 같은, 아마도 판다처럼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같이 흘러내린 액체에 가려 분명하지는 않은 캐릭터들이다. 캐릭터 중에는 피에타도 있다. 그렇다면 그 위로 흘러내리는 액체는 눈물? 존재에 대한 연민? 작가는 이 일련의 캐릭터들을 흐르는 강물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부른다. 흐르는 강물처럼? 제목에 유추해보면 캐릭터들은 물의 막을 통과하거나 지나쳐온 것처럼도 보인다. 물의 막? 세례? 정화? 통과의례? 아니면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 

로드무비에 해당하는 영화제목에서 빌려온 것이 분명한 이 일련의 캐릭터들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었을 성장통을 다룬 성장소설처럼도 읽히고, 삶의 여정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캐릭터를 소재로 한 작가의 서사가 마냥 예쁘고 귀엽고 깜찍한 경우를 넘어, 존재의 상실과 상처를 환기하는 순수(그 자체 어쩌면 역설적인 면이 없지 않은)의 경우를 넘어, 삶을 비유하는 것(삶의 알레고리)과 같은, 더 다중적이고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지경을 향해 진화할 것임을 예고하는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문득 나는 집이 있는데, 얘들은 저만의 집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반 위에 저 홀로 앉아있는, 머리에 먼지를 뽀얗게 덮어쓰고 있는 캐릭터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그래서 집을 지어 주기로 했다. 체형에 꼭 맞는 부드러운 소재로 몸을 감싼 뒤, 몸을 누일 수 있는 따뜻한 나무집을 만들었다. 보면 알겠지만, 정색을 하고 만들었다. 상품 케이스처럼도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이런 사례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게 인형은 친구다. 아이들은 친구와 더불어 놀 듯 인형과 함께 논다. 인형에게 옷을 지어 입히고, 머리도 빗겨 주고, 업어 재우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반려동물이 인형을 대신하기도 하고, 반려동물을 닮은 캐릭터가 상실된 유년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이처럼 인형에 동화되고 반려동물에 공감하는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 잠재된 자질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앞서 어른들은 상실된 계절을 산다고 했다. 이처럼 상실된 계절에 상실된 것들을 되불러 오는 것이 없는 삶은 삭막할 수 있다. 때로 실재계(슬라보예 지젝은 실재계를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이라고 했다)의 돌발적인 출현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틈새로 설핏 드러나 보이는 상상계의 추억이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삶이 부조리한 이유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상처마저도 예쁜, 상처 때문에 예쁜 작가의 캐릭터들은 그렇게 때로 존재의 무모한 그림자마저 사랑스럽게(그리고 사랑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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