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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중/ 생태, 숲의 순례자에서 흐르는 거주지까지

고충환



김보중/ 생태, 숲의 순례자에서 흐르는 거주지까지 



사람이 곧 땅이고 대지고 길이다. 흔히 인간을, 삶을, 존재를 자연에 비유하지만, 그러나 작가의 이 말은 단순한 비유적 의미를 넘어서고 수사적 표현을 넘어선다. 예술을 매개로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이유가 되고 당위가 된다. 사람과 자연을 동일시한 것인데, 주지하다시피 메를로 퐁티는 이런 동일성을 근거로 세잔의 회화가 내포하고 있는 다른 접근과 태도와 이해를 분석할 수 있었다.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 우주적인 살 개념인데,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우주적인 살로 채워져 있어서 주체와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가 없다. 그렇게 세잔은 내가 연장된 산을 그리고, 지각이 가닿은 하늘을 그리고, 몸의 일부인 나무를 그릴 수가 있었다.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말하자면 하이데거의 세계 내에 던져진 존재, 세계 내적인 존재가 되겠다. 존재는 이미 조건화된 세계 속으로 던져지며, 그런 만큼 존재는 시공간의 제약과 언어와 정치 같은 사회적인 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생태와 환경 같은 세계의 조건과도 무관할 수가 없다. 그렇게 작가 김보중은 내가 연장된 땅을 그리고, 지각이 가닿은 대지를 그리고, 몸의 일부인 길을 그린다.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환경을 그리고, 매 순간 자신을 생성하고 갱신하는 생태를 그리고, 자신의 일부인 세계를 그린다. 

작가는 매일 밭에 가는 농부처럼 작업실에 간다. 주거지와 작업실을 오가는 것인데, 주거지와 작업실 사이, 혹은 작업실 인근에 자연이 있다. 그러나 그 자연은 도시 부근의 자연이 그렇듯 원형 그대로의 자연이라기보다는 무분별한 개발의 흔적과 상흔을 간직하고 있는 자연이다. 파헤쳐지거나 흘러내려 벌건 속살을 드러낸 맨땅 위로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면서 끈질긴 생명력과 자생력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자연이다. 그렇게 풍경의 상처를 따라 걷다 보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제법 깊은, 숨어있는 숲이 나온다. 그 숲에 가면, 작가는 발가벗는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발가벗으면서 그 자신 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작가는 발가벗은 채로 길도 없는 숲속을 걷기도 하고, 숲에 웅크리고 앉기도 하고, 숲에 드러눕기도 하고, 숲을 머릿속에 담기도 하고, 아예 숲에서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숲은 작가에게 또 다른 작업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머릿속에 담아온 자연을 그리고 숲을 그리는 것인데, 자연을 배경으로 일종의 이중그림 혹은 다중회화가 시도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재현적인 화면에 때로 그림으로 덧그리거나 더러 사진을 길게 오려 붙인 일종의 선 드로잉이 중첩되는 것인데, 사람의 얼굴이, 사람의 전신이, 비행기와 같은 비행 기구가, 집과 같은 거주지가 오버랩 된다. 자연과 생각이 중첩된 것일 터인데, 표면에서 어른거리는 숲의 그림자 같고, 숲의 이면(숲의 생각? 사실은 숲에 이입한 작가의 생각?)이 표면화된 환영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숲이 흔들리는 것도 같고, 입체적인 것도 같다. 일종의 렌티큘러 효과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구현해놓은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그저 자연을 그리고 숲을 재현하는 것 이상의, 자연 자체, 숲 자체, 땅 자체를 표현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비정형의 입체 회화다. 마치 모종삽으로 땅의 일부를 떠내듯 숲의 부분을, 공간을, 숲이 차지하고 있는 궤적을 입체로 떠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캐스팅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숲의 부피를 입체로 만드는 것인데, 여기서 다시 작가가 발가벗는 숲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작가는 발가벗은 채 숲에서 작업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숲에서 나무를 채집하고, 그렇게 채집한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비정형의 입체 구조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캔버스 천을 덧씌워 최초 나무를 채집한 숲의 궤적을, 숲의 부피를, 숲의 공간을 그리고 만든다. 

그렇게 그리고 만든 구조물이 실제 땅의 표면 질감이 그런 것처럼 울퉁불퉁한 것이 땅덩어리 같다. 때로 그 위에 그려 넣은 숲으로 인해 숲의 집 같다. 숲의 집? 숲을 전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조각에서의 환조가 그런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보는 것이고, 숲을 다만 일루전 그러므로 시각을 통해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제처럼 보면서 동시에 만져지고 느껴지는 공감각적 대상으로 환원해놓은 것이다. 그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발가벗고, 걷고, 웅크리고 앉고, 드러눕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작가와 접촉했던,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와 호흡을 같이 했던 숲의 접촉면을 그리고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후 땅을 그리고 숲을 그리는 지지대는 접이식 테이블과 같은 각종 생활 오브제로 변신한다. 사각형이나 원형의 접이식 테이블에 캔버스 천을 씌워 숲을 그리고 땅을 그리고 길을 그린 것인데, 벽이나 바닥에 비스듬히 기대 놓기도 하고, 폴더폰처럼 직각으로 접어서 세워놓기도 하고, 때로 가로나 세로로 늘어트려 길게 연장된 길을 강조하기도 한다. 회화를 평면에서 입체로 확장한 이후, 이번에는 회화를 오브제와 결합한 일종의 설치회화 혹은 오브제 회화를 시도하고 제안한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향후 작가의 그림에서 오브제의 도입은 또 다른 형태와 경우로 확장되고 변주될 것임을 예상해봐도 좋을 것이다. 생태미술과 생활감정이 결합 된 경우로 볼 수도 있겠고, 생태 미술이 생활철학으로 확장된 경우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숲의 순례자>를 그린다. 숲이라고는 했지만, 그 숲은 어쩌면 진정한 숲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도시의 공원에 기생하는 숲이고, 도시의 변방에 이식된 숲이다. 진정한 숲이 아니면서 숲으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떠맡은 임시적인 숲이고, 그러므로 어쩌면 불구의 숲이다. 그런 만큼 그 숲의 순례가 온전할 리가 없다. 덩달아 그 숲의 순례자 역시 순례가 무색할 정도로 그 태도가 어중간하다. 숲에서 발가벗는 행위가 자연에 동화되고 귀의하는 것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불안하고 불안정해 보인다. 그러므로 작가는 도시 변방을 기웃거리는 의심스러운 순례자의 초상을 통해 현대인의 어중간한, 불안하고 불안정한 정체성을 그리고, 현대인의 부유하는 정체성을 표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에게 숲의 순례자는 사실은 순례할 숲을 잃어버린 도시의 순례자이며 변방의 순례자이다. 그렇게 작가는 심지어 숲을 그리고 자연을 그릴 때조차 결코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다. 도시를 떠날 수가 없다. 도대체 누가 도시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가. 의식에서마저 도시를 지울 수가 있는가. 

그렇게 도시의 변방에 붙잡힌 삶을 사는 의심스러운 순례자의 불안정한, 부유하는 정체성이 또 다른 시리즈 그림인 <흐르는 거주지>의 형태로 변주되고 확대 재생산된다. 주로 낯선 느낌의 놀이터를 소재로 한 <분당 야경>이 그렇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골목길을 소재로 한 <흐르는 거주지, 부산>이 그렇고, 철거될 운명의, 실제로도 철거된 오래된 아파트를 소재로 한 <흐르는 거주지, 서울>이 그렇고, <그냥 노는 땅>이 그렇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는 본격적으로 자연에 속한 자연생태로서보다는 대개의 현대인이 그렇듯 도시와 자연 사이에서 어정쩡한,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성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 도시생태를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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