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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히다_COVID, 바이러스가 일깨운 내면의 풍경

고충환



갇히다_COVID, 바이러스가 일깨운 내면의 풍경 


자기 속에 갇히다. 세계는 하나다. 그동안 추상적인 구호로만 여겼던 이 말을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우한 바이러스라고도 하고 코로나바이러스라고도 한다. 코로나19라고도 하고 코비드라고도 한다. 바이러스가 세계를 휩쓸면서 팬데믹이 시사적인 용어로 자리하기도 했다. 이처럼 세계를 하나로 만든 바이러스는 역설적으로 세계와 세계를 단절시킨다. 나와 너를 고립시킨다. 그렇게 사람들이 그리고 창작 주체들이 저마다의 자기 속에 갇혔다. 양가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진즉에 자기 내면적인 경향성이며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하다. 체질적으로 고독에 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매개로 세계와 대화하는 부류며 종족이라고 해야 할까. 바이러스가 초래한 고립과 단절이 그 경향성이며 내성을 심화한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여기에 그 고립과 단절에 반응하는 작가들이 있다. 철망에 갇힌 조각이 마치 새장 속 새 같다(김용현). 철망에 갇힌 조각은 아마도 작가적 자의식을 표상할 것이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세상에 갇힌, 자기 자신에 갇힌 억압된 자유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흔히 코로나19를 코로나블루라고도 부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우울한 바이러스를 같이 퍼트린 것이다. 블루는 이런저런 의미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중 우울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 온통 블루가 있다(박신혜). 온통 파란 바다 한가운데 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다. 웅크린 자세는 태아의 자세로서, 자신의 원초적 자아 그러므로 자기_타자와 오롯이 만나는 자세다. 여기서 파란 바다는 존재가 유래한 우주적 자궁의 양수만큼이나 넓고 깊은 심연을 상징하고 우울을 상징한다. 그렇게 자기 심연을 마주한 자는 원초적이다. 내면적이다. 사색적이다. 어쩌면 같은 의미지만, 우울하다. 

그렇게 우울한 자기가 마침내 정물이 되었다(이민경). 사각형의 모가 많은, 닫힌, 세상과의 소통의 문을 걸어 잠근, 자기반성적이고 내면적인, 그리고 여기에 추상적이기조차 한 정물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섬이 있다(김영구). 알다시피 섬은 고립을 상징하고 단절을 상징한다. 그래서 고독하다. 현대인은 굳이 섬이 아니더라도 도시에서마저 고독한 데, 군중 속의 고독이 그렇다. 그래서 작가는 고립된 섬을 그리고 도시를 그렸다. 

이처럼 고립과 단절은 창작 주체가 진즉에 내재하고 있었던 자기반성적인 경향성과 내면화의 경향성을 강화하는데, 그 한 갈래가 자기의 근본 그러므로 존재가 유래한 기원을 돌아보게 만들고(서영숙), 세계물질이 잠재하고 있는 또 다른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강선홍). 그리고 알다시피 코로나19에 대한 최고의 처방은 마스크로 알려져 있다. 얼굴에 마스크를 쓴 채 찍은 사진이 이제 자연스러운 문화풍경(혹은 같은 의미지만, 문화풍속도)의 한 장면이 되었다. 그래서 작가(문설)는 얼굴 중 마스크 윗부분만 그렸다. 여자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있는데, 꽃 보따리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자의 가사노동을 오마주한 것이고,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바람에 흩날리는 꽃으로 승화한 것일 터이다. 


자연에서 위로받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고 왕래가 끊기면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계가 잠정적으로 멈춰 서면서 삶의 질이 좋아졌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늘이 파래지고 공기가 맑아진 것이다. 도대체 이 잿빛 하늘이 다시 파래질 수 있을까 의아해했던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이다. 혹자는 폐로 숨 쉬는 것보다 아가미로 숨쉬기가 더 편하다는 자조 섞인 말로 숨쉬기의 고통을 말하기도 했다(그 자체 살기의 수고로움을 은유한 것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그런데 거짓말처럼 하늘이 다시 파래지고 맑아졌다. 황폐된 자연이 다시 회복된 것일까. 억압된 자연이 다시 돌아온 것일까. 

여기에 인류세 논의가 가세한다. 환경재앙을 초래한 원인과 책임이 다름 아닌 인류 자신에 있다고 보고, 지구생태계를 인류세를 중심으로 재정의하고 재논의해야 한다는 움직임이다. 그런 만큼 인간 중심의 세계관 그러므로 인본주의와 휴머니즘이 폐기되어야 할 유산으로 보고, 자연 논의를 기후 중심으로 갈아타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 연장선에서 소위 기후미술도 공공연한 현실이 되고 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말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 인식의 바탕에 지극한 상실감이 있다. 현대인은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원형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했다. 지극한 상실감은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징후이며 증상이 되었다. 그렇게 코로나19가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그렇게 상실된 자연을 되불러오는 작가들이 있다.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을 자연을 통해 치유하고 회복하고 위로받는 작가들이다(박경숙, 영케이, 유우연, 전승아, 박종숙). 주지하다시피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원래부터 그런, 이라는 의미다. 자연은 인간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기는데, 인간이 자연을 뭐라고 부르든 인간이 자연에 어떻게 의미 부여를 하든 그것은 다만 인간의 입장이고 일일 뿐 자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자연의 본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인데, 이처럼 자연의 본성을 인정하지 않은 모든 자연 논의는 물거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자연을 자연관으로 대신한 현대인에게 자연은 다만 풍문으로나 떠돌 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자연은 때로 원초적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숲을 그 속에 숨겨놓고도 있지만(영케이), 자연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자연은 다만 꿈꾸는 나비처럼 비현실적이다(유우연). 상실된 유년의 기억처럼 희미하지만, 꿈처럼 그리움처럼 현실원칙에 지친 나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위로해 준다(박종숙). 그렇게 사람들은 대개 현실원칙에 치인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을 찾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반려동물에게서 위로를 받는다(최소용). 개인적으로 반려동물을 그리는 작가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타적인 마음이 없으면 그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찰이 아닌 교감으로 그릴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더 고독한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위로받는다(김경호). 음악은 사람들에게 공명을 불러일으켜 감동을 공유하는, 소원한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힘이 있다. 아마도 현악기의 뚫린 속이나 구멍은 바로 그런 공명을, 그러므로 공유되는 감동을 표상할 것이다. 


코로나19가 일상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혹자는 코로나를 계기로 일상을 넘어 세계가 재편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동안 오프라인상에서 이루어지던 많은 일들이 온라인으로 넘어간 것도 변화라면 변화일 수 있겠다. 미술 생태계에 체질 변화를 요구해오는 부분이기도 한데, 앞으로 온라인 전시가 활성화될 것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를 테마로 한 이번 전시가 작가들의 자기반성적이고 자기 내면적인 경향성을 재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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