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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the 展開/ 전개 그룹, 어쩌면 대구현대미술제의 적자

고충환




Back to the 展開/ 전개 그룹, 어쩌면 대구현대미술제의 적자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한때 이념을 공유하는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결성한 각종 그룹전이 미술계를 견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때로 작가들이 전시를 만들고 평문까지 쓰던 시절이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작가가 동시에 큐레이터와 평론가를 겸하던 시절이었다. 화랑은 물론이거니와 미술관 역시 형식논리와 장르 위주의 전시가 일반적이었고, 어떤 이슈를 주제로 전시를 만드는 기획 전시가 드문 시절이었다. 

보통 한국현대미술의 시점을 1950년대로 잡는데, 돌이켜 보면 50년대는 맹아기였고, 60년대에 본격화되었고, 70년대에 정착 혹은 안정화 시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 현실 참여를 표방한 민중미술이 전면화했지만, 작가들이 그룹을 결성하고, 직접 전시를 만들고, 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작가 중심의 미술계 환경은 여전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비로소 작가와 큐레이터와 평론가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면서, 그리고 상업화랑과 기획전 위주의 미술관 전시가 정착되면서 작가 중심의 미술 생태계는 변화를 맞게 된다. 

1970년대 대구의 지역 화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대구는 한편으로 구상화단이 여전히 강력한 지지세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현대미술 또한 활발한 편이었다. 특히 수화랑을 중심으로 일본 현대미술의 모노하 작가들과의 상호교류 전시가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구 현대미술 하면 아무래도 대구현대미술제를 빼놓을 수 없는데, 아마도 이런 당시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최초로 열린 이후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 현대미술제가 연이어 열리면서 정착되는 사실상의 계기가 된 대구현대미술제는 1974년 그 첫 전시가 열린 이후 1979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후 대구.강정현대미술제(지금은 달성 대구현대미술제)로 그 맥이 이어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 화랑 중심의 실내 전시와 함께, 강정 낙동강변에서 야외 설치미술과 개념미술 그리고 몸을 도구로 한 행위 예술이 이루어졌었던 것이 지금의 강정으로 옮기면서 자기 변신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전개 그룹이 있다. 참여작가들 대개가 그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았고(겪었고), 그중 상당 작가들이 당시 막내 세대 작가로서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전개 그룹의 결성에는 대구현대미술제가 사실상의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1974년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가 개최되었고, 이듬해인 1975년에 전개 그룹이 결성되었다(전개라는 그룹 명칭은 참여작가 중 김영세가 작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연이은 1976년에 창립전을 열었다. 1976년 2월 대구시립도서관 화랑에서 열린 창립전에는 당시 20대에서 30대 초반의 김정태, 김영진, 김영세, 도지호, 백미혜, 윤범, 이교준, 이금숙, 이태(이후 시공화랑을 운영하다가, 현재 작고한), 이현재, 황병호 등 12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그룹은 1983년 제6회 전시를 끝으로 해체되는데, 매회 전시마다 참여작가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최초 참여작가가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새로운 작가가 영입되기도 한 것. 그 와중에서도 전시 내용만큼은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 돌이켜 봐도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사료 된다. 그 일면을 제4회 전개 그룹전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린 1980년 10월 20일자 영남일보 문화면 기사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대구 삼보화랑에서 열린 당시 전시가 실린 기사는 17일 열린 오프닝 이벤트를 중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여기서 부연하자면, 각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가 그 진행상 세세한 차이가 있지만, 하나같이 행위 예술로 총칭되고 있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몸을 도구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퍼포먼스가 대세지만, 당시에는 이벤트로 불렀을 것이다). 

당시 기사를 바탕으로 이벤트를 재구성해 보면, 이교준은 각 <강>과 <나무>란 소재를 슬라이드 필름에 담은 이미지로, 슬라이드 필름에 기록한 텍스트로, 아마도 각 강과 나무라고 발음하는 녹취된 소리를 재생해 들려주는 녹음기 소리(음향)로, 그리고 각 강과 나무를 직접 흉내 낸 몸짓으로 재현해 보여주었다. 하나의 소재를 각 이미지로, 텍스트로, 소리(혹은 발음)로, 그리고 몸짓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소재를 재현하는 방법 혹은 형식논리의 바이브레이션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재현은 최초 소재 자체를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 그리고 재현이 소재를 반영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결정적인 일인가. 최초 소재 자체와 재현된 소재 그러므로 재현이 지시하고 있는 소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여기에 하나의 재현이 다른 재현에 비해 소재를 더 잘 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도 이처럼 실재와 재현, 현실과 재현과의 관계에 관련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고 본다면, 조세프 코주스의 각 <세 개의 의자>와 <세 개의 망치>로 나타난 개념미술을 떠올리게 된다(참고로 작가는 각 실물 의자와 의자의 사전적 정의 그리고 의자를 찍은 사진을 대비시켰다. 망치도 마찬가지). 

그리고 기사는 안승영의 이벤트에도 주목하고 있는데, 이벤트에서 안승영은 하나의 광원(전등)을 배경으로 자기 앞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분필로 표시한 연후에 다시 지워 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관객과 일일이 악수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특히 전자와 관련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에 그 초점이 맞춰진 작업이란 점에서 보면, 자신의 손이 그린 흔적을(여기에도 분필이 등장한다) 뒤따르는 발이 지나가면서 지우는, 그러므로 자신의 몸이 흔적을 만들고 지우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이건용의 <달팽이 걸음>을 상기시킨다.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선배 작가와의 상호영향 관계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당시 다른 작가들 역시 그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외 당시 전시에는 이현재의 <파도와 컵>이라는 비디오 작품이 상영되었고, 제11회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하고 돌아온 박현기가 비엔날레 정경을 슬라이드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유추해 볼 때, 물론 작가들마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 개념미술, 재현론과 기호론과 의미론, 몸을 도구로 존재를 사유하는 이벤트, 그러므로 어쩌면 몸의 현상학, 그리고 형식논리로 치자면 타블로와 함께 사진과 비디오 같은 당시만 해도 첨단매체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예외가 있겠지만, 참여작가들은 필요하다면 따로 모여서 스터디를 이어나가는 등 이론과 실천 면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열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전개 그룹은 1983년 제6회 전시를 끝으로 그룹이 해체되는데, 1983년 2월에 대구 삼보화랑에서 열린 전시에는 권영식, 박종경, 안승영, 이교준, 한용채 등 6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그동안 회를 거듭하면서 개별 작가의 신상에도 덩달아 참여작가들의 면면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그룹이 해체되는 이유는 더 이상의 동력을 상실해서라기보다는 최초 공유했던 이념을 각자 개별적인 작업을 통해서 심화시키기 위한 것, 곧 자기 자신에 더 충실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당시 대구현대미술제에 20, 30대 막내 세대로 전시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이제 60, 70대의 중장년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전개 그룹을 소환한 것은 당시 명멸했던 다른 그룹에 비해 전개 그룹이 미처 충분히 조망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며, 특히 대구현대미술제와 관련해 그 관련성이며 상호영향 관계가 적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번 전시에는 당시 전개 그룹 맴버로 활동했던 권영식(인쇄의 망점이 두드러져 보이는, 아마도 하이포리얼리즘과 개념미술이 결합 된), 김영세(공과 색이 교합 하는 무용지용의 세계를 찾아가는,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를 찾아가는), 김영진(텅 빈 충만과 음양의 균형추를 찾는), 김정태(일본 모노하의 영향 관계가 느껴지는), 김진혁, 노중기, 도지호, 백미혜(민음사에서 세 권의 시집을 내기도 한, 그리드 시를 형식 실험하는), 이교준, 한용채(종이에 물이 밴 흔적을 사진으로 옮기는?) 이상 10명의 작가가 초대되었다. 

전개 그룹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하는 한편, 당시 활동과 관련한 아카이브도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가 대구현대미술제와 그 시기(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그 존재마저도)를 같이하는 전개 그룹을 매개로 대구 현대미술의 빈 곳을 채워 완성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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