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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 흔적에서 흐르는 시간 속으로

편집부




윤원, 흔적에서 흐르는 시간 속으로 





흔적, 가상의 존재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허름한 성벽에 난 미세 균열이나 얼룩에서 풍경을 본다. 전쟁을 보고 홍수를 보고 세상사를 본다. 심지어 성당에서 나는 종소리를 듣는다. 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을 보고, 나아가 공감각적인 것마저 보고 듣는다. 먼 이국땅 허름한 골방에서 시인 백석은 살을 에는 바람에 파르르 떠는 문풍지를 통해서 누이를 본다. 문풍지를 스크린 삼아 그리운 존재를 불러온 것이다. 환영을 보고 환각을 본다고도 하겠지만, 결국 환영을 보고 환각을 보게 만든 것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절실하면 환영을 현실로 불러낼 수도 있는 일이다. 상상력의 비약이라고도 하겠지만, 존재에 대한 호기심(레오나르도)도 그리운 마음(백석)도 상상력의 매개 없이는 환영을 현실로 소환하지 못한다. 

그렇게 현실에 소환된 환영적인 존재를 작가는 가상의 존재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가상의 존재가 살고 있고, 우리가 그것을 상상할 때 비로소 그들은 생명력을 갖게 된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상력을 통해서 몸을 얻는, 상상력을 매개로 부재에서 존재로 건너온 가상의 존재들이며, 잠재적인 존재들, 그러므로 어쩌면 유령들(아리스토텔레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보들레르는 예술에서 결정적인 것이 상상력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상상력은 예술을 작동시키는 기계다. 다시, 그러므로 예술이란 어쩌면 상상력을 매개로 한 환영의 기술이며, 현실에서 환영을 보는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에게 그 매개 역할을 하는 현실 속의 계기가 벽이다. 허름한 벽에 난 미세 균열이나 비정형의 얼룩에서 작가는 존재의 흔적을 보고, 시간의 화석 그러므로 화석화된 시간을 본다. 시간을 통해서 보면 벽은 누적된 시간, 집적된 시간, 켜켜이 쌓인 시간을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는 이처럼 수직으로 쌓인 시간이 아닌, 흐르는 시간과 더불어 존재를 표현하고 싶다. 시간 속에서 흐르는 존재 그러므로 변하는 존재를 예시하고 싶다. 존재를 변하게 하는 것, 그러므로 항상적으로 변화의 와중에 있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고, 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변하는 존재, 이행 중인 존재야말로 말하자면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이다. 이처럼 흐르는 존재, 변하는 존재, 이행 중인 존재는 그러나 시간의 화석 그러므로 시간의 흔적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여기서 작가는 벽면의 부분 부분을 접사해 찍고, 그렇게 찍은 부분 부분을 한 장의 완성된 사진 속에 담았다. 흐르는 시간을 담았고, 이행하는 존재를 담았다. 방법적으로 콜라주와 모자이크와 편집의 기술로 인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변하는 존재, 흐르는 존재, 이행 중인 존재의 존재론적 조건이 작가의 사진의 과제가 되었고, 그 과제를 표현하게 해주는 방법 역시 작가의 형식실험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간, 이행하는 존재들. 헤라크레이토스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만물은 유전하고 존재는 변한다. 시간도 흐르고 존재도 흐른다. 흐르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이런 존재론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시간과 더불어 흐르는 존재, 변하는 존재, 이행하는 존재를 조형예술을 도구로 표현할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조형예술은 공간예술로 알려져 왔고, 그런 만큼 흐르는 시간, 지속적인 시간, 과정으로서의 시간은 현대미술에 주어진 과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등장하는 순간부터 재현적인 미술에 전기를 마련한 사진 역시 예외는 아닌데, 극적인 순간의 포착이 아니라면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빛바래고 색이 바랜 사진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감성으로 전환된 형태로 시간을 암시할 수는 있었지만, 이때에도 역시 이행하는 시간을 포획할 수는 없었다. 영상매체가 있다고도 하겠지만, 엄밀하게 영상미술은 내러티브 곧 서사에 바탕을 둔 시간예술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현대미술에서 영상미술이 차지하는 위상이나 현실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고정된 시점에 조리개를 열어 놓고 흐르는 시간을 한 장의 사진 속에 담는 방법도 있다지만, 작가는 피사체의 부분 이미지를 촬영해 한 장의 사진으로 콜라주하고 모자이크하고 편집하는, 어떻게 보면 아날로그적인 방식의 접근을 꾀한다. 방식 자체는 아날로그적이지만, 정작 그것을 실현하는 매체는 디지털이다. 디지털을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고 해야 할까. 작가의 사진이 특이하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인데,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디지털로 구현하는 것에서 오는, 로우 테크놀로지(혹은 로우 메소드)와 하이 테크놀로지가 충돌하는 것에서 오는 언밸런스 같은 것, 같은 의미지만 부조화 같은 것, 그 비전이 열어 놓는 의외성 같은 것, 그리고 여기에 아날로그 고유의 물질성의 흔적 같은 것일 터이다. 

디지털을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면, 당연히 아날로그의 흔적이 남는다. 그렇게 디지털 속에 아날로그의 흔적을 보존하고 간직하는 것이 사진을 재현하는, 어쩌면 사진을 사용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고, 그리고 여기에 미학적으로도 유의미한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술성과 기술적 구현은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다. 어떤 비전, 어떤 주제를 기술적으로 얼마나 매끄럽게 구현해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예술은 기술이 아니다), 기술적 도구를 매개로 어떤 유의미한 예술적 감각적 의미론적 경험치를 제안하는가가 결정적이다(예술은 감각이다). 

뻔한 얘기지만, 그 자체 사진과 예술사진이 갈라지는 경계며 근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사실은 피사체를 구실 삼아 다름 아닌 시간 자체를 콜라주하고 모자이크하고 편집하는, 그렇게 흐르는 시간을 재현한, 어쩌면 기술적으로 세련된 방식은 아닌(?) 방법을 구사하는 작가의 사진은 그래서 오히려 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벽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이처럼 시간이 편집된 흔적은 거의 감지할 수가 없다. 얼핏 실제 그대로고 원형 그대로다. 거의 드러나지 않게 시간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감각적 쾌감을 주지만, 이와는 별개로 시간보다는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가상의 존재들(이를테면 부재 하는 것들이 환기하는 트라우마 같은 것, 존재의 흔적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긴 탓이 클 것이다. 그리고 전신주와 송전탑을 앙각 시점에서 올려다본 일련의 사진들에서 시간이 편집된 흔적은 좀 더 적극적으로 암시되다가, 마침내 숲을 소재로 한 근작에서 전면화하면서 공공연한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전신주에 얽힌 전선을 소재로 한 사진과 숲을 소재로 한 사진은 비록 소재는 다르지만 둘 다 편집된 시간(그러므로 어쩌면 흐르는 시간)이란 주제 의식에 본격적으로 천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주제 의식이 심화하고 변주되는, 그리고 그렇게 연속되는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근작에서 시간이 편집된 흔적은 역력하다. 때로 그 흔적은 주로 하늘에서 솜뭉치를 뭉쳐 놓은 듯 몽글몽글하고, 산이며 숲 부분에서 칼로 자른 듯 또렷하다. 이처럼 또렷한 칼자국은 물론 시간이 편집된 흔적을 부각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작가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 자국은 존재와 존재가, 시간과 시간이 서로 잇대어져 있는, 상호 간 관계 속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이를 표상한다. 존재와 존재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시간과 시간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속돼 있음을 증언하는 틈을 표상한다. 어쩌면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그 자체 비가시적인 관계를, 사이를, 틈을 가시화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다시, 어쩌면 가상적인 존재들의 현현(나타남)이라는 처음 주제 의식에 다시 연결되는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작가는 그 사이, 그 틈새로부터 푼크툼(롤랑 바르트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한 장의 사진 속에 들어있는 알 수 없는, 코드가 없으므로 읽을 수도 없는, 객관화할 수 없는, 어쩌면 트라우마와도 같은 사사로운 기호)이라도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지만, 두고 볼 일이다. 적어도 작가가 사진을 매개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흔적을 통해 가상의 존재를 보고, 시간을 통해 흐르는 존재를 본 것과는 또 다른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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