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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홍, 이름도 없는 존재들에 바치는 진혼곡 혹은 오마주

고충환




안창홍, 이름도 없는 존재들에 바치는 진혼곡 혹은 오마주 




아주 늦거나 아주 이른 시간 길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텅 빈, 인파로 채워지지 않은 도시의 거리는 공허하다. 불빛을 찾아 날아든 나방들이라도 쇼윈도에 달라붙어 비늘 가루를 날리며 푸드덕댈 땐 더욱 그렇다. 가까이에 서서 유리창에 부닥치며 날개 뼈 부러지는 소리라도 들을 땐 너무 공허해서 소름이 돋는다. 적막감만 강물처럼 흐르는 텅 빈 도시. 이것이 유령의 도시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유령의 도시! 아주 오래전부터 유령의 도시를 그릴 계획이었고, 유령패션 연작이 유령 그리기의 첫 시작이다...허깨비이거나 유령이거나. (작가의 말) 

유령패션. 불교에서는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했다.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불교에는 이처럼 부질없는 욕망을 주지시키는 전언이 많다. 그중 전형적인 경우가 색즉시공공즉시색이다. 색이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색을 색이라 하고 공을 공이라 하는 것은 다만 마음이 불러일으키는 현상 그러므로 현혹, 다시 그러므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에 동요되지도 말고 욕망에 현혹되지도 말라는 주문이다. 기독교도 마찬가지. 헛되고 헛되니 인간이 하는 모든 일(그러므로 욕망)이 헛되다고 성경은 전한다. 종교적인 전언이어서 좀 선언적인 감이 없지 않다 쳐도 존재론적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반면, 프로이트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로 정의한다. 욕망이 인간을 만든다. 욕망이 없으면 인간도 없다. 욕망으로 인해 비로소 인간이다. 이처럼 욕망을 타고난 인간이 그 욕망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에 존재의 부조리가 있고 삶의 딜레마가 있다. 

타고난 욕망이라고 했다. 생래적인 욕망이고 존재론적 욕망이다. 반면, 생후적으로 주어진 욕망도 있다. 그리고 이처럼 생후적인 욕망이 그 자체 욕망의 도가니랄 수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의 재생산과 순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감정도 없고 인정도 없이 그저 욕망을 기계적으로 수행할 뿐인 자본주의 시스템과 관련이 깊다(돈은 국경도 없고 눈도 없다). 자본주의의 욕망은 상대적이다. 하나의 욕망은 언제나 다른 욕망으로 건너가기 위한 구실이며, 더 큰 욕망을 불러들이기 위한 계기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의 욕망이 즉각적으로 충족이 된다면, 그것도 매번 그렇게 된다면 머지않아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멈춰 서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욕망의 무한순환으로 자본주의는 완성된다. 그 무한순환구조 속에서 심지어 없는 욕망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제안되기조차 한다. 

그리고 여기에 도시가 있다. 자본주의의 욕망이 상영되는 극장이다. 도시 자체가 이미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의 욕망으로 형성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어쩌면 도시 자체가 이미 욕망이다. 죽음이라면 모를까, 어쩌면 죽는 순간에서마저 도시에서 욕망은 잠들지 않는다(공공연하게 죽음이 거래되고 있고, 여기에 돈이 없으면 마음대로, 최소한 품위 있게 죽을 수도 없다). 도시는 낮에 욕망을 생산하고, 밤에 욕망을 소비한다. 여기서 욕망을 소비하는 밤에 도시는 더 도시답다. 낮 동안의 부드러운 빛 속에서 욕망은 잘 보이지 않지만, 빛과 어둠이 칼날처럼 대비되는 밤에 욕망은 더 잘 보이고, 이로 인해 도시의 밤이 아름답게 보이기조차 한다. 욕망이 밤을 아름답게 만드는 향락도시다. 

 그리고 향락도시의 꽃으로 치자면 단연 옷이다. 원래 옷은 열악한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입기 시작했다. 각 동물적인 이유와 문화적인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문화적인 이유가 좀 의심스럽긴 하지만, 여하튼 여기까지가 옷의 기본적인 의미기능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후 옷은 문명화된 인간의 삶의 행태에 맞춰 진화하는데, 그 전형적인 경우가 유니폼이다. 그 과정에 제도의 편의성 그러므로 어쩌면 제도의 욕망이 매개되는데, 무분별한 주체, 익명적인 주체로부터 개별주체를 특정할 수 있고 지목할 수 있고 관리에 효율을 기할 수가 있다. 

그리고 옷의 최종적인 형태에 해당하는, 가장 진화한 경우가 바로 미학적인 이유다. 이제 사람들은 미학적인 이유로 옷을 입는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개성을 표현할 수 있고, 취향을 드러낼 수 있고, 재력을 과시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가 입는 옷이 곧 그의 개성을, 취향을, 재력을 말해주는 등가치적 기호가 되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신분에 어울리는 옷을 입는, 신분의 등가치적 기호가 되었다. 여기에 어떤 옷에 대해서는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성이, 다시 말해 신분 상승 욕망이 매개된다. 

그렇게 도시가 자본주의의 욕망이 상영되는 극장이라고 한다면, 쇼윈도는 욕망의 꽃에 해당하는 명품이 상영되는 소극장이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도시의 밤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쇼윈도는 도시의 전형적인 아이콘이며 기호에 해당한다. 그렇게 도시의 밤을 수놓는 쇼윈도에 유령들이 산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성장을 멈춘, 가장 값비싼 옷을 걸친, 욕망의 표상으로 유혹하는, 생명도 없고 영혼도 없는 선남선녀들이 산다. 아마도 안창홍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도시의 밤을 저 홀로 불 밝히고 있는 쇼윈도에서 이런 유령들을 봤을 것이다. 욕망의 그림자를 봤을 것이다. 그리고 생명도 없고 영혼도 없는 텅 빈 옷들을 그렸다. 그럼에도 묘한 것이 그 텅 빈 옷들에는 또 다른 생명이며 영혼이 깃든 것 같다. 덧없는 욕망의, 인격화된 욕망의 생명이고 영혼들일 것이다. 

작가는 원래 이 일련의 그림들을 그리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먼저 그림을 그렸다. 작가들은 체질적으로 새로운 미디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과 호기심의 소유자들이다.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고, 자기를 표현하게 해주는 더 적절한 매체를 찾아 헤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게 디지털 페인팅(프린트?)이 작가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디지털이 뭔가. 감각적 현실과의 닮은꼴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가상이다. 허상이다. 유령이다. 그러므로 각종 첨단의 디지털 매체로 무장한 현대인은 감각적 현실을 살면서 동시에 가상 현실도 사는, 감각적 인격으로 살면서 동시에 가상 인격으로도 사는, 이중적이고 자기 분열적인 삶을 산다. 

이처럼 현대인이 자기 분열적인 그러므로 이미 반쯤은 유령에 흡사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본다면, 유령은 현대적 감각이며 감수성으로 새롭게 제안되고 등재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유령패션, 나아가 유령도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물신이 창조한 욕망의 덧없는 그림자를 소환하는 것이 그 겉뜻이라고 한다면, 그 그림자에 부수되는 현대인의 고독과 공허와 권태를 드러내는 것이 그 속뜻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할 포스터는 욕망과 죽음과 아름다움을 하나로 봤다. 욕망의 세 얼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유령패션을 매개로 작가는 그 이면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작가가 그린 옷들은 실제로 피를 흘리고 있다),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욕망을 그려놓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혹은 자신이 자신에게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한 광기와 야만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질곡의 역사를 거치면서 삐뚤어진 권력의 야만과 보신주의로 으깨어지고 부서지고 파묻혀서 이름도 없이 잊힌 시대의 희생자들, 단지 이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사람들, 나는 그들의 참혹하고 억울한 죽음들을 불러 모아 제의라도 치러주고 싶었다. (작가의 말) 

이름도 없는, 얼굴들 그리고 가면들. 중세 로마 시대에는 노예가 도망가지 못하게 몸에 낙인을 찍었다. 나치는 유대인들이 노란 별 표지를 옷에 달고 다니게 했다. 인격을 박탈하고 특정 표시를 부여해 사물화한 것이다(사물의 기호). 조르주 아감벤은 이처럼 인격을 박탈당한 사람들, 한갓 사물로 전락한 사람들을 호모 사케르, 그러므로 벌거벗은 생명(인간)이라고 불렀다. 인격이 아닌 사물인 만큼 죽여도 되는 사람들이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사람들이고, 치외법권자들이다. 때로 법을 어겨도 되는 예외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심지어 법으로마저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감벤은 우리 모두 이런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은 지금 여기 우리 주변에도 많다. 예컨대 서울역은 노숙자들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노숙자들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반응하지도 않는다. 위험하지조차 않은 사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드물게 사물이 인격으로 드러날 때 화들짝 놀라기나 할 뿐. 

르네 지라르는 이런 벌거벗은 생명을 희생양이라고 불렀다(아감벤은 표시하고, 지라르는 지목한다).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는 하나같이 이런 희생양 제도에 기반하고 있다. 사회가 위태로워질 조짐이 보일 때마다 제도는 민중에게 희생양을 지목하고 내주어 잠재적인 폭력성을 발산하고 해소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일에 실패할 때 제도가 위태로워진다. 프레임 씌우기와 좌표 찍기 그리고 표적 수사가 마찬가지로 지목의 형태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그 변형된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미셀 푸코의 권력이론 역시 시사 하는 바가 많다. 권력은 개별주체를 감시하는데, 몸을 직접 구속하는 능동적인 감시체제에서 사람들의 의식을 파고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화한다. 그 과정에서 정신병원이, 감옥이 생겨났는데, 문제는 정신병원 쪽에 있다.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잠재적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할 수도 있는 불순분자(?)들을 정신병원에 가두어 격리 수용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에서 푸코의 혜안이 느껴진다. 심지어 푸코는 각종 사회보장제도마저 건강한 노동력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한 제도의 기획 곧 생물권력의 결과라고 본다. 그러므로 어쩌면 인격을 도구로 보는 시각을 문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조르주 바타이유의 잉여 인간(실제로는 잉여)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는 경제 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작동된다. 그 과정에서 경제성이 없는 것들,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제도 밖으로 추방되는데, 죽음과 노화, 질병과 무분별한 욕망(그리고 예술) 같은 것들이고, 그것들에 붙여진 이름이 잉여다. 잉여는 제도에 의해 추방된 것인 만큼 잠재적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할 수도 있는 혁명의 계기를 내장한다. 푸코라면 이처럼 잠재적인 혁명의 계기를 있으면서 없는 장소, 실재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에서 지워진(그러므로 삭제된) 장소, 그러므로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을 것이다. 

안창홍은 이처럼 벌거벗은 생명 그러므로 법으로마저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어쩌면 노숙자들, 시대와 역사의 희생양들, 정신병동에 격리 수용된 채로 때로 정신병원에서 죽은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 노동 현장에서 한갓 사물로 도구로 전락한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서 밀려난 소위 잉여 인간과 같은, 작가가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입체로 만든다. 이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역사에서 지워진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 참혹하고 억울한 죽음들을 불러 모아 제의를 치러준다. 그림들(이름도 없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작은 입체(얼굴들)와 큰 입체(가면들)는 원래 49개 시리즈로 계획된 것인데,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세상을 떠돌다가 마침내 하늘로 올라가는 49재의 천도 의식을 상징한 것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으깨어지고 부서지고 파묻혀서 그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다만 단말마와도 같은 고통이 외침으로 아니면 침묵으로 육화된 으깨어진 물질 덩어리를 보는 것 같고, 그 자체 장 포트리에의 <인질> 연작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도 같다. 실제로도 그들은 어쩌면 시대에, 역사에, 그리고 현실에 붙잡힌 희생양이며 인질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가면들은 또한 어떤가. <이름도 없는> 그리고 <얼굴들> 연작이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는 천도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가면들> 연작은 현실원칙에 그 무게중심이 실린다. 현재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 두 개의 인격을 산다. 주지하다시피 페르소나는 가면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왔는데, 사회적 주체며 제도적 주체를 의미한다. 사회와 제도의 욕망에 복무하는 주체며 가면 주체다. 그리고 그 가면 주체에 가려진 주체, 억압된 또 다른 주체가 아이덴티티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 분열적인 삶을 산다. 문제는 그 두 주체 간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아득해지는 것에 있다. 가면을 너무 오래 쓰고 있다 보면 가면이 내 얼굴이지 싶고, 나에게 가면과는 또 다른 주체(불교에서의 진아?)가 있었다는 사실이 까마득해질 수 있다. 작가는 <가면들> 연작을 빌려 이처럼 마침내 가면이 얼굴이 된 사람들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생존전략과 차디찬 비정함만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도시이고 야만의 정글이다. (작가의 말) 

눈먼 자들.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고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볼 때 그저 보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동시에 보면서 생각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종합적 인식행위에 해당한다. 그렇게 사람의 눈은 그의 생각과 마음과 의식과 감정과 욕망 그러므로 어쩌면 그의 정체성과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이런 눈이 없다면, 그는 눈도 없고 동시에 정체성도 없다고 해도 될까. 눈을 뜨고 있으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또한 어떤가. 

작가는 유독 가면 같은 얼굴과 무표정한 눈에 관심이 많고, 사실 그 관심은 작가의 초기작업에 소급될 만큼 오래되었다. 흑백 모노 톤의 화면에 가면 같은 얼굴들, 그리고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흰자위도 미동도 없이 시커먼 눈을 가진 일련의 초상들이 주는, 조금은 낯설고 그로테스크했던 인상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시커먼 눈은 뭉개진 눈, 으깨어진 눈, 지워진 눈, 감긴 눈, 똥파리가 바글대는 아마도 부패한 눈, 사이보그처럼 기계적인 눈, 안대처럼 붕대로 가린 눈(아마도 맹목을 상징하는), 동공이 없이 눈꺼풀만 있는 텅 빈 눈, 유리구슬이라도 박아 놓은 듯 무표정한 눈으로 변주되면서 그때그때 작가가 전하고 싶은 상황 논리를 눈이 대신 함축하게 했다. 

그리고 여기에 눈먼 자들이 있다. <가면들> 연작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원칙에 방점이 찍힌 작업이고,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눈이 있음에도 사실상 눈이 없는, 그러므로 눈도 없고 정체성도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 눈먼 자들이 하나같이 유리구슬이라도 박아 놓은 듯 무표정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목과 얼굴에는 욕망, 눈물, 투쟁, 적자생존, 격투기, 戰士(전사)와 같은 현실원칙을 대변하는 문자들이 숨어있거나 드러나 있다. 아마도 인정도 감정도 없이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한, 전쟁과도 같은 현실에 대한 자의식을 표상할 것이다. 그리고 정보제공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은 효율적인 감시체계를 수행하는 바코드, 억압된 욕망이며 좌절된 욕망을 상징하는 꺾인 한쪽 날개, 그리고 아마도 누군가가 죽은 날짜가 암호처럼 기록되거나 그려져 있다. 

인상적인 점으로 열쇠 구멍이 눈에 들어온다. <가면들> 연작에서는 이마 한가운데에, 그리고 <눈먼 자들> 연작에서는 한쪽 눈에 열쇠 구멍이 있다. 무슨 구멍인가. 의식 아니면 무의식으로 통하는 관문인가? 문제는 그 열쇠 구멍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누가 만든 것인가. 제도가 만든 것이다. 제도가 이념을 주입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여기서 다시 미셀 푸코의 권력이론을 인용해 보면, 권력은 신체를 직접 구속하고 감금하고 고문하는 능동적인 방식에서 이후 점차 개별주체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 감시체계를 발전시켜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경우의 범례를 교육으로 전수하고, 그렇게 전수된 규범을 도덕과 윤리와 같은 사회적 합의에 호소하는 식의 과정을 통해 퍼트린다. 그렇게 제도의 이념이 마침내 개별주체의 무의식에마저 파고든 지경에 이르면 제도의 감시 레이더는 더 이상 개인을 비출 필요가 없다. 저마다의 양심에 호소하는 식의 상호 간 감시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이마에 그리고 한쪽 눈에 뚫린 열쇠 구멍은 바로 그런, 이념을 주입하고 전수하는 제도의 기획을 표상한다. 
그렇게 작가는 <눈먼 자들> 연작을 통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눈도 없고 정체성(그러므로 자기)도 없는 사람들, 그 자체 생존전략이기도 한 무표정한 사람들(표정을 감정을 들키는 순간은 곧 죽음이다)의 초상을 그려놓고 있었다. 

좋은 작품이란 쉽지만 깊다. 무한대의 깊이와 무게가 있어야 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먼 훗날 그 작가의 작품을 보고, 그 작품을 통해서 그 시대를 유추해볼 수 있어야 한다. 작품 속에 시대정신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빛과 그늘의 틈, 욕망과 절제의 틈, 물질과 정신의 틈, 선과 악의 틈, 이곳과 저곳의 틈, 이 세상의 모든 상반된 가치의 경계. 예술은 규범과 단정의 부산물이 아니라 모호함과 불안함과 갈등의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야 더욱 아름답다. (작가의 말) 

이외에도 작가는 각 <화가의 손>과 <화가의 심장> 같은 예술가의 자의식을 반영한 작업을 제안하기도 한다. 예술가의 자의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관련 작업으로 가장 높은 산 정상에서 세상을 향해 똥을 누는 <예술가의 똥>과 그 의미가 통한다. 예술가의 똥을 캔에 담아 전시하고 판매한 피에르 만조니의 또 다른 <예술가의 똥>과 그 자의식을 비교해봐도 좋을 것이다(만조니는 예술가의 숨을 전시하기도 했다). 

작가는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의 한가운데를 정면으로 돌파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당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형식의 완성도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다. 이념에 편중되다 보면 형식을 소홀히 할 수도 있는 일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작가는 이념 전달에 성공할 수 있었고, 동시에 형식적 완성도를 기할 수 있었다. 그것도 가장 개성적인 방법으로 이념과 형식이 상호 길항하고 부침하는, 그리고 이로부터 고유의 긴장감과 함께 강렬한 파토스를 자아내는 자기만의 회화적 지평을 열 수 있었다. 이념에 바탕을 둔 시대정신과 감각에 바탕을 둔 시대 감정이 조화를 이룬 자기만의 형식으로 우뚝 설 수가 있었다. 

작년 겨울(2020년 12월 19일부터 2021년 2월 2일) 사비나미술관에서 국내 최초로 열린 에콰도르 국민화가 오스왈도 과야사민 특별기획전에 대한 인상이 지금도 선하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와중에 사전예약제를 통해 관람 인원을 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주최한 미술관 측도 깜짝 놀랄 만큼 수많은 인파가 전시를 관람했다고 한다. 생전 작가가 직접 보고 듣고 만났던 전쟁과 폭력, 정치와 권력의 만행에 철저하게 무기력했던 사람들, 이름도 존재도 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을 그린 작가의 그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비록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아픈 기억과 연대가 주는 위로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인간 실존을 위협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바로 이처럼 시공을 넘어서까지 감동을 주는 것이야말로 예술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예술이 갖는 힘이다. 

이번 전시는 그 답방 형식으로 열리는 전시다. 한국 에콰도르 양국이 1962년 첫 수교를 시작한 이후 내년(2022)이면 꼭 60주년이 된다. 그런 만큼 양국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한편, 이번 전시가 향후 양국 간 문화교류를 위한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국가적 차원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담고 있는 전시행사인 만큼 양국의 정치 행정 외교 당사자와 미술관 관계자의 전폭적인 지원과 긴밀한 협력이 있었기에 이번 전시가 성사될 수 있었다. 에콰도르 최고의 미술관 중 하나인 과야사민 미술관 최초로 한국 작가 개인전을 개최한다는 점이나, 특히 전시가 열리는 또 다른 공간인 인류의 예배당은 2009년 프란시스코 고야 이후 처음으로 외국 작가 작품을 전시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각별하다. 

예술에서는 시각이 결정적이다. 세계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입장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과야사민과 안창홍 두 작가는 세계를 향한 분노와 존재에 대한 연민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분노와 연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존재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두 작가는 비록 서로 본 적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동지 의식으로 결합 돼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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