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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순/ 도시 감정, 도시에서 사랑하고 소통하다

고충환




박승순/ 도시 감정, 도시에서 사랑하고 소통하다 




본인의 작업은 도시를, 도시에서의 삶의 경험을 평면 색채 추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화면에 나타난 선들은 도시에서 소통하는 길 혹은 삶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를테면 도시의 풍경, 에너지, 사랑, 긴장과 같은. 에너지가 충만한 도시의 실상과 허상을 미화한 것이다. (작가 노트) 

화면을 크고 작게 구획하고 있는 색 면과 화면의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는 가녀린 색 띠들, 화면을 가로지르는 연속적이거나 단속적인 리드미컬한 선들, 거침이 없는 스트로크와 나이프 자국이 여실한 허허로운 화면에 부유하듯 유유자적하는 선들, 밑 색이 배어 나오는 중첩된 색 면 위에 마구 흩뿌려진 듯 흘러내리다 멈춘 물감 자국들, 우연성과 즉흥성과 무심함이 빗어낸, 마치 비정형의 얼룩과도 같은 형상들이 한 눈에도 액션페인팅 곧 몸 그림을 연상시킨다. 특정 형상에 구애받지 않는, 그 자체 자족적인, 그러므로 회화의 자율성과 화면 자체의 형식논리를 따라 그린 프리 페인팅과 자유 드로잉을 연상시킨다. 

보통 그림을 그리는 몸의 도구로 치자면 머리와 가슴과 손을 든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고 본다면, 그중 머리로 그린 그림이 개념미술에, 그리고 가슴이 그린 그림이 표현주의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손이 그린 그림은 재현적인 그림에 비유할 수 있을 터이다. 그중 작가의 그림은 표현주의를 연상시키고, 추상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와 내가 한 몸으로 움직이는 그림이다. 세계와 내가 긴밀하게 연동된 그림이다. 세계가 우울하면 나도 우울하고, 세계가 밝으면 나도 명랑하고, 세계가 들뜨면 나도 춤을 추고, 세계가 왜곡되면 나도 비틀어지고, 세계가 이해 불능이면 나도 덩달아 비이성적인 그림이다. 환경결정론이다. 세계가 나를 결정하고, 내가 세계를 반영한다. 그렇게 표현주의에서 나는 세계를, 세계라기보다는 세계감정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메를로 퐁티는 세계와 주체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세계와 주체를 객체와 주체로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세계가 곧 주체고, 주체가 곧 세계다(그렇게 퐁티는 세계와 주체가 유기적인 한 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세잔의 회화를 분석할 수가 있었다). 세계와 주체가 긴밀하게 연동된 표현주의 주체에게서 특히 그렇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감각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몸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감각도 주체고 몸도 주체다).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그려진 그림이다. 비록 그리기 전에는 수많은 생각과 계산이, 번민과 서성거림이 있었을 터이지만, 적어도 그리는 순간만큼은 순식간에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그렸을 것이다. 아니면 계속 덧칠하고 지우고 뭉개고 다시 그리는, 그렇게 긍정과 부정이 숨 가쁘게 교차하는,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 밑에 지워진 그림이, 그러므로 번민과 주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화석이 된, 그렇게 한 몸이 된 그림이다. 

한편으로 주체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정의는 회화적 주체 곧 작가적 아이덴티티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주체란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양피지와도 같다. 옛날에 종이가 없던 시절에 양피지를 종이 대신 썼다. 

나는 양피지 위에 주체에 대해서 쓴다(긍정). 그리고 지운다(부정). 그리고 다시 쓴다(긍정). 그리고 다시 지운다(부정). 그렇게 주체에 대해서 쓰고 지우기를 밑도 끝도 없이 반복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마침내 주체에 대해서 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쓴 주체를 주체에 대한 최종적인 정의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그 역시 지워진 정의처럼 잠정적인 정의가 아닌가. 그렇다면 주체에 대한 정의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쓰고 지우기를 반복 거듭한 전체, 긍정과 부정의 총합이 주체다. 그러므로 어쩌면 다만 흔적으로만 남은 부정의 총합이 주체다.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작가의 그림은 번민이 그린 그림이고, 주저가 그린 그림이고, 서성거림이 그린 그림이고, 부정이 그린 그림이고, 긍정과 부정이 숨 가쁘게 교차하는 흔적이 그린 그림이고, 얼룩이 그린 그림이다. 작가의 그림은 감각적인 그림이며, 몸적인 그림이라고 했다. 이런 그림일수록 자기 외부(아니면 같은 의미지만 그림 바깥)에 설정된 객관적 지표, 이를테면 정답도, 해답도, 목표도, 지향도 없다. 다만 감각에 의존할 뿐이며, 감각만이 유일한 지침이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화면 위에는 없는 길을 내는 그림이며, 없는 길을 더듬어 찾는 그림이 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는 엄밀하게 완성도 없고 끝도 없다. 다만 항상적으로 움직이는 잠정적인 과정이 있을 뿐. 무슨 말인가. 작가의 그림은 움직인다. 긍정에서 부정으로, 그리고 재차 또 다른 긍정을 향해서 움직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항상적인 움직임과 잠정적인 운동성을 내재하고 있고, 그것이 작가의 그림을 역동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생생하게 보이게 만든다. 어쩌면 그 자체가 작가가 정작 그리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반무의식적인 과정을 통해서 저절로 가닿은 지점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자체 아마도 작가가 말하는 에너지(옛날에는 기라고 불렀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추상이다. 한눈에도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세대 감정을 반영하는 한편, 그 회화적 유산을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은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본다.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라거나, 그림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적인 전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논리며, 그 자체 추상이 유래한 논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 자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은 없다거나, 적어도 있다고 해도 무의미하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말은 이 논리와는 상충 된다. 여기서 어떤 말이 맞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추상미술에 대한 정의로 보기보다는 입장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는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입장을 취한다. 모더니즘의 추상미술을, 그 형식논리를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 그 형식요소를 통해서 어떤 의미를 담보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전달하고 싶다. 그림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어떤 떨림 같은, 설렘 같은, 감동 같은, 공감 같은, 때로 파토스 같은, 아마도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을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 

그것이 뭔가. 아마도 음악적인 감수성일 것이다. 흔히 음악은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 자체 추상미술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의미 이전에 감정에 직접 호소해오는, 의미가 없이 감동을 주는, 그러므로 어쩌면 감동 자체가 이미 의미인 예술이다. 작가의 그림은 잠정적인 움직임으로 생생하고 역동적이라고 했는데, 그 자체 음악을 암시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무겁게 가라앉은 색 면 위로 가볍게 부유하는 선들의 유희에서, 중첩된 색 면과 바이브레이션을 연상시키는 떨리는 붓질에서, 색 면과 리드미컬한 선들의 대비에서 음률을, 음들의 조응을 연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더 직접적인 경우로는 도시 감정이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연속적이거나 단속적인, 빠르거나 느린, 경쾌하면서 발랄한 선들은 도시에서의 소통을 상징한다. 때로 선들은 부호나 기호처럼도 보이는데, 아마도 말에 실린, 대화에 실어 보낸 감정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때로 쌓여있거나 중첩된 책처럼도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고(때로 오브제를 도입해 도시에서의 삶의 풍경을 더 직접적으로 암시하기도 하는), 도시에서의 사랑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이를테면 설렘이나 떨림 혹은 격렬한 감정 같은)을 상기시킨다. 

작가의 그림에서 특이한 것은 이 모든 도시 감정이 선이며 질감과 함께 특히 색채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 그 자체 감각적 쾌감을 자아내는, 밝고 긍정적인 색채로 표현된 도시 감정이, 사실상 전형적이라고 해도 좋을, 흔히 콘크리트에 빗댄 무정하고 비정한, 무감각하고 어두운 회색 도시의 색채 감정과 비교되는 것이 흥미롭다. 작가는 도시의 실상과 허상을 미화한다고 했는데, 회색 도시에서마저 삶의 향기를 맡고 삶이 아름다운 이유를 찾아내는,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긍정적인 시선이 반영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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