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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헌/ 다시, 무당개구리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다

고충환



김성헌/ 다시, 무당개구리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다 




imprint. 흔히 판화는 회화의 직접성과 비교되는 간접적인 매체로 알려져 있다. 판화가 가능하기 위해선 중간 매개체에 해당하는 판이 있어야 하고, 판에 아로새겨진 이미지를 종이에 옮기기 위한 프레스가 있어야 한다(때로 프레스를 수작업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는 중간 매개체에 해당하는 판으로 옷을 찍어낸다. 이런저런 옷을 종이에 대고 찍어낸 릴리프 혹은 무색 엠보싱 작업으로 보면 되겠다. 미미하지만 요철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저부조 작업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잘 보이지 않지만, 잘 보면 자크와 레이스 자국, 단추와 리벳 자국, 박음질 자국, 접힌 자국, 구김 상태, 여기에 옷감의 질감과 같은 세부가 손에 잡힐 듯 여실하다. 

섬세한 작업인 만큼 난이도가 있는 편이다. 세부가 관건인데, 이를 위해선 어느 정도 종이에 물을 먹여가며 프레스를 통과시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여차하면 종이가 울어(굴곡이 져) 전체적으로 판판한 평면을 얻기가 쉽지 않다. 모르긴 해도 허다한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 눈앞에 보이는 결과를 보면 색도 없고 형태마저 미미한 것이 섬세하면서도 존재감이 희박해 보인다. 희박한 존재감이 오히려 집중도를 높이는 부분이 있고, 그렇게 살아있는 세부가 묘한 매력이 있다. 
마치 옷은 온데간데없고 옷의 흔적을,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희미한 흔적을 인출 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옷도 아니고 존재도 아닌, 다만 그리움의 흔적을 찍어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오직 부재 하는 것만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부재를 통해서 존재(한때 존재했었음)를 증명하는 역설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into Nature.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자연은 인공폭포와 인공정원 그리고 인공동굴과 같은 인공자연으로 대체되었고, 가로수와 같은 제도화된 자연(제도에 의해 재단된 자연, 작가의 경우에는 분재)으로 대치되었다. 자연은 이제 풍문으로나 떠돌 뿐, 자연이 떠나간(추방된?) 도시에는 새들마저 깃들 자리가 없다(도시에 사는 새들은 건설 현장에서 물어온 녹슨 못이나 합판 부스러기로 집을 짓는다). 그렇게 도시화가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전 지구적 차원의 생태와 환경 그리고 기후 위기가, 그리고 여기에 자본의 무한착취와 인간세(인간이 초래한 기후적 위기 상황을 전제로 지구가 재정의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논의되고 있다. 

이런 작금의 현실에서 작가는 이처럼 상실된 자연과의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조화로운 삶이야말로 인간에게도 자연에도 널리 이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 이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캐스팅(떠내기) 기법을 도입한다(주지하다시피 조각에는 캐스팅 곧 떠내기 기법과 몰딩 곧 주조기법 그리고 카빙 곧 깎아내기 기법이 있다. 작가의 경우에는 실물 그대로 떠내는 라이프캐스팅). 

강화 석고로 마치 데스마스크처럼 사람들의 얼굴 그대로를 떠내고, 여기에 같은 기법으로 실물을 떠낸 포도, 옥수수, 오이, 가지, 감자, 여주, 호박, 양파, 마늘, 버섯, 연밥, 그리고 각종 꽃과 식물들이며 채소류로 얼굴 주변을 치장했다. 얼굴 주변으로 아마도 내면의 빛이 발산되는 후광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도 같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진 아르침볼도의 채소 인간을 재해석한 경우를 보는 것도 같고, 포도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주신 디오니소스의 초상을 각색한 경우를 예시해주는 것도 같다. 특히 디오니소스는 주신이면서 풍요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며 풍요로운 삶의 이상을 상징할 것이다. 

한편으로 그 의미는 이중적이고 중의적인데, 초상들의 얼굴을 장식하고 있는 채소류며 식물류 자체를 유전자변형식품(GMO)으로 볼 수도 있다. 논리적 비약이라고도 하겠지만, 작금의 생태파괴와 기후 위기 상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는 해석으로 볼 수도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유전자변형식품은 유전자 변형을 통해 병충해에는 강하면서, 더 크고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려는 기획이 낳은 결과물이다. 예상되는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문제는 유전자변형식품을 먹은 사람이 향후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며, 여기에 인위적인 개입으로 생물 종 교란에 의한 자연의 유기적인 질서가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이 일련의 작업은 인간(어쩌면 자본)의 무분별한 욕망이 초래할 수도 있는 파국에 대한 경고로도 읽힌다. 

Plastic syndrome. 기후 위기라고 했다. 인간세라고도 했다. 이런 전 지구적 차원의 총체적인 위기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플라스틱의 발명과 이에 따른 일회용품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들 수 있다. 플라스틱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서 인류로 하여금 전에 없던 문명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플라스틱 소재의 폐기물은 섞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최근 재생 기술이 시도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여하튼, 썩어서 없어지려면 너무 오래 걸려서 사실상 반영구적이라고 봐야 한다. 플라스틱 소재를 통해 본 생활 혁명의 명과 암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는 바로 이런 사안에 착안해 관련 작품을 만드는데, 이번에는 3D 프린트를 도입한다. 기법이나 방법의 측면에서 보면 찍어내기(프린팅)와 떠내기(캐스팅)에 이어 원형 그대로 복제하기(멀티 프린팅?)의 방법론을 취한 것이다. 조각에도 직조가 있지만, 작가는 직조보다는 방법론과 미디어 친화적인 형식실험을 통해서 전통적인 조각의 지평을 확장 시키는 데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캐스팅에 관한 한 작가의 기술은 남다른 부분이 있는데, 섬세한 세부가 주는 감각적 쾌감이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여하튼, 마치 사진이 처음 발명됐을 때 회화가 그랬던 것처럼 3D 프린트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조각이 자기 변신을 꾀해야 할 시점에 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실험을 거듭하면서 이제 3D 프린트로 집도 짓고 건물도 올리기에 이르렀다. 머잖아 도시를 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경제 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기획을 실현하는 쪽으로 거듭 진화할 것이다. 3D 프린트가 이처럼 환영받는(?) 이유는 단연 강력한 복제 재생산 능력에 있다. 여기서 다시 인간세로 대변되는 위기의식을 소환해 보자면, 이처럼 복제를 남발하다 보면 결국 인류는 폭망하고 만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위기의식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미술사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조각을 소재로 취한다. 원래 유명 미술관이나 박물관에나 가야 실물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복제 재생산으로 상업화가 가능해지면서 웬만한 가정에 하나쯤 볼 수 있을 만큼 흔한 물건이 되었다. 골동과 키치와 장식품을 거치면서 원작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발터 벤야민이라면 아우라의 상실을 아쉬워했을 것이다(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소논문의 저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렇게 알만한 조각을 취해와 원형 그대로 3D 프린트로 복제한다. 이때 그 원료는 말할 것도 없이 플라스틱 소재다. 그리고 그렇게 복제된 조각상의 머리 위에 상추며 파슬리와 같은 각종 채소류를 키우는데, 비록 플라스틱 소재와 함께 유기물에 해당하는 녹말류를 일정 부분 섞었다고는 하나 채소가 제대로 자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여하튼, 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되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주지시킨다. 플라스틱 소재의 남용과 무분별한 복제가 가져올 파국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사람의 생각과 더불어 자라는 자연(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변화된 인식)에서 한 가닥 희망의 싹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인상적인 것은 이처럼 작품을 매개로 한 환경파괴에 대한 선언적인 경고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자기의 이상을 실천하고 있는 점이다. 생활 현장에서 플라스틱 소재의 폐기물을 직접 수거해 재생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일종의 작은 공장을 가동한다고 해야 할까. 플라스틱 소재의 쓰레기를 수거하고, 세척하고, 색깔별로 분류하고, 분쇄기를 통해 자잘한 알갱이로 분쇄하고, 열처리 과정을 통해 녹여내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일종의 또 다른 차원의 원료를 만든다. 플라스틱 폐기물이 재생을 위한 원료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원료를 소재로 일종의 플라스틱 숲을 조성한다. 플라스틱 숲? 플라스틱을 원료로 만든 숲이다. 긴 관 형태의 열처리기가 비정형의 구불구불한 막대 형태를 뱉어내는데, 그 형태가 제법 옹이도 있고 굴곡진 나무 같다. 그러면 작가는 공간에다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것이다. 그렇게 조성된 숲은 비록 숲을 흉내 낸 것이지만, 알고 보면 플라스틱 숲이고 인공 숲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플라스틱 쓰레기를 애써 재생원료로까지 만드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이런 나무며 인공 숲을 조성한 것인가. 여기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인가. 

여기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자본의 무분별한 욕망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질 들뢰즈는 제도의 본질(혹은 본성)을 역으로 이용해 제도를 내파하는 방법으로 욕망의 사용법을 제안한다. 그리고 여기에 oo 되기와 oo인 척하기 철학이 부수된다. 자본의 욕망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본의 허구를 폭로하는 것이다. 전 지구를 뒤덮고 있는 플라스틱 용품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의 욕망을, 그 무분별한 욕망의 승리를 표상한다. 작가는 그 표상을 이용해 자연을 조성하고 숲을 일구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의미다. 중요한 것은 표면이 그 이면에 또 다른 의미, 결정적인 의미를 숨겨놓고 있는데 그렇게 조성된 숲이 알고 보면 플라스틱 숲이고, 인공 숲이고, 쓰레기 숲이라는 사실이다. 작가가 조성해 놓은 인공 숲은 말하자면 자본의 무분별한 욕망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가 좀 다르지만, 작가는 이렇게 만든 플라스틱 원료에 시멘트를 일정 비율로 섞어 일종의 재생 보도블록을 만든다. 아마도 앞으로도 또 다른 재생 용품이 생산될 것이다. 그 자체 실용적인 측면에서보다는 실천적인 제스처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선 형식실험을 매개로 조각을 확장하는 특수성이 있고, 그리고 여기에 환경오염을 고민하는 실천성이 한 몸을 이루는 것에 미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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