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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나/ 스키마, 감정의 도식

고충환




김가나/ 스키마, 감정의 도식 





스키마. 정보를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인지 개념 또는 틀을 말하며, 도식이라고도 한다. 의미를 조직화하고 통합하는 기능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기능은 왜 있는가. 현대인은 수많은 정보에 노출돼 있다. 그중 저마다 접근 가능한 정보를 취사선택해 자신의 판단에 이용하는데, 그 판단 여하에 따라서 그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루이 알튀세는 그렇게 결정된 정체성을 이데올로기적 주체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가 개별주체를 호명하고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정체성은 내가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회가 결정하고 제도가 결정한다. 이념 결정론이다. 

문제는 내가 취사선택한 정보가 최초 사실 자체에 해당하는 정보의 원료가 아니라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제도에 의해서) 가공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현대인은 이중 삼중으로 가공된 정보의 홍수에 맞닥트리고, 때로 정보를 의미화하는 기능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진다. 이런저런 증후군 혹은 신드롬의 이름으로 명명되는 병적 징후가 그런데, 그중 심각한 경우로 치자면 (순간) 판단 불능증도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스스로는 판단 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심리적 증상이다. 

개인적인 층위에서 보면 대인관계가 이런 정보를 읽고 의미화하는 상황에 노출돼 있다고 보면 되겠다. 저 눈빛, 저 웃음, 저 몸짓이 무슨 의미인지 읽고 반응해야 한다.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보는 숙고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때로 빛보다 빠른 속도로 즉각적인 반응이 요구되기도 한다. 외부로부터 이질적인 정보가 유입되면 평상심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는데, 그 과정에서 주체는 합당한 대응을 찾아 응수하기도 하지만, 때로 타협하기도 하고, 아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기도 한다. 개별주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주체이기도 한 누구도 그 상황 논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작가 김가나는 그 상황 논리를 감정 도식이라고 부른다. 예술을 매개로 자신의 감정에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보고 추수하는데(사사로운 감정을 객관화하는데),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의 감정 경험이 비슷한 관계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에 일어난 일을 도식화하고 객관화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대상화하고 사물화한 것이란 점에서 자기반성적 사유의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대개 그렇듯 사사로운 감정을 결정짓는 요인은 관계에서 오고,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작가는 사람 대신 반려견과 반려묘와의 관계를 예시해주고 있는데, 동물에 자기감정을 이입한, 동물과의 관계를 통해 본, 동물의 눈에 비친 인간관계를 유비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우화처럼 읽힌다.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반추상적인데(때로 왜곡되고 해체되기도 한), 그 자체 그림의 논리, 형식의 논리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의미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작가 자신의 시선이 반영된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림 중 동물의 눈이 인상적이다. 배경과 몸체는 크고 성글게 그리면서도, 유독 눈에 관한 한 짧은 붓질로 그린, 색색의 색채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이 한눈에도 비교돼 보이고 강조돼 보인다. 눈의 표정을 주의 깊게 봐달라는 암묵적인 주문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동물들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쳐다보고 있는가.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때로 내가 보기에 너는 너무 현란해서 네가 누군지 네가 어떤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같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눈을 쳐다보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동물의 눈에 비친, 그러므로 어쩌면 동물에 감정 이입한 작가의 눈에 비친 타자의 초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동물에 감정이입하고, 풍경에 감정이입 한다. 여기서 풍경은 자연과는 다르다. 자연이 주어진 그대로라고 한다면, 풍경은 자연을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쓸쓸한, 고독한, 고즈넉한, 아득한, 아련한 것과 같은, 감정이 실린 저마다의 풍경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모든 풍경은 사실은 내면 풍경에 다름 아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동물 그림도 그렇지만 풍경 그림에서도 작가는 먼저 바탕 처리를 통해 미세 요철효과를 조성한 연후에 그 위에다 동물을 그리고 풍경을 그린다. 그 자체 역시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반추상과 왜곡이 그런 것처럼 그림의 논리며 형식의 결과로 볼 수 있겠지만, 동시에 의미론적인 측면에서 비가시적인 관계의 망을 가시화한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동물과의, 풍경과의(자연과의?), 사람과의, 세상과의, 그러므로 어쩌면 타자와의 관계를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중 자연과의 관계로 치자면, 자연으로부터 위로받고 치유 받고 싶은 심정을 이입하고 표현한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과 함께, 영상작업을 선보이기도 한다. 카메라(그러므로 어쩌면 존재)가 물속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과정을 반복해 보여주는데, 인간관계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표현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물속에 들어가면 세상과 단절된 채로, 온전히 나만의 세상, 나만의 내면세계에서 자족할 수 있다. 실제로도 물은 무의식을 상징하고 내면세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물속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래서 주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물 밖으로 나와야 하고, 세계와 맞닥트려야 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고 싶은 욕망과 개별주체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현실이 서로 교차하고 교직 되는 존재의 부조리를, 보편 인간의 실존적인 모순을 형용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작가는 반려견에 감정 이입하고 반려묘의 눈을 통해 타자를 본다. 인간관계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 동물과 교감하고 동물에게서 위안받는, 나아가 노을이나 바닷가 그리고 숲과 같은 자연을 자기 속에 불러들여 내면화한 저마다의 풍경에서 위로받는 현대인의 심리적인 초상의 일 단면을 예시해주고 있다.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고 싶은 욕망과 개별주체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현실과의 불일치로 나타난 존재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보면, 특히 동물의 눈에 비친 다중적이고 해체적인 렌즈를 통해 보면, 현대인(그러므로 어쩌면 우리 모두)의 방황하는, 흔들리는, 불안정한 눈빛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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