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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화/ 일즉다 다즉일, 우리가 사는 풍경

고충환



황현화/ 일즉다 다즉일, 우리가 사는 풍경 



본인의 작업은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것에서 비롯했다. 개별 판화를 선택해 이미지의 일부를 취했고, 뒤집고 자르고 붙이고 연결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비계획적이고 즉흥적인 감각만을 사용하려 했다. 의도와 계획을 배제해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다. 본질만 남겨놓고 싶었다. 표현에 대한, 예술에 대한, 생존에 대한 최소한의 뼈와 살만 가지고 살고 싶었다.
(작가 노트) 

작가는 원래 조각을 전공했다. 지금 그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다만 인체 크로키에 예외적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크로키는 빨리 그리는 그림이다. 한정된 시간에 사물 대상의 특징을 간파해 그리는 그림이다. 조각은 형태를 다루는 작업이다. 최소한의 선묘로 형태의 특징을 포착해 그리는 크로키에 사물 대상을 형태 위주로 볼 버릇하는, 그러므로 평소 형태에 대한 훈련이 돼 있는 조각가들이 능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작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몇 안 되는 간략한 선묘만으로 인체의 형태며 흐름이 오롯한 형상을 얻고 있었다. 마티스 아니면 브랑쿠지의 인체 데생을 연상시킨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이처럼 감각적인 인체 크로키를 판화로 남겼다. 드라이포인트를 에칭으로 부식한 판화다. 특히 딥에칭은 물성이 강조돼 보이는 굵고 깊은 요철에 의한 선을 얻을 수가 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이 조각에서 판화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작가는 판화에 천착했다. 굳이 두 장르에서 공통분모를 찾자면 파고 깎아내는 공정상의 프로세스를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조각은 입체를 통해서, 그리고 판화는 평면상에서 그 공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제작된 작가의 판화를 보면 무의식의 직접적인 표출이 느껴진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 의식의 흐름 기법이 느껴진다. 의식적인 그리기 혹은 능동적인 그리기와 비교되는 자동기술법은 무의식적인 그리기, 수동(태)적 그리기와 관련이 깊다. 그런가 하면 의식이 어디로 흐르는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은 자동기술법과 통한다. 그렇게 화면은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일관된 서사의 맥락에서 일탈하기도 하고, 서로 결이 다른 서사들이 충돌하고 간섭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다만 무한 확장성이 있을 뿐. 그렇게 확장되면서 유기적인 변형에 이르기도 하고, 때로 반복 패턴에 가 닿기도 하는. 

대개는 선묘를 강조하는 것에 방점이 찍힌 만큼 색채감정에 관한 한 무채색과 같이 절제된 경우가 많지만, 때로 현란한 색채구성을 꾀한 작업이 절제된 색채감정을 무색하게 하기도 한다. 작가가 직접 염색해 만든 색지 조각조각을 한자리에 모아 하나의 전체 화면으로 재구성한 색면구성이 그렇다. 한눈에도 한정된 화면 속에 다채로운 우주와 생활감정을 함축한, 전통적인 조각보의 변주가 느껴진다. 조각에도 조각조각을 덧붙여 쌓아나가면서 하나의 형태를 만드는 소위 패치 조각이 있는데, 그런 패치 조각의 평면 버전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 조각조각을 덧붙여나가면서 하나의 전체 화면을 재구성하는 식의 소위 모자이크 방식의 화면구성이 그렇다. 작가의 판화에는 말하자면 애초에 일품 혹은 단품을 목적으로 제작된 경우도 있지만, 동시에 색면과 색면이 모여 하나의 화면을 이루기도 하고, 상호 이질적인 모티브와 모티브, 때로 소형 판화와 또 다른 소형 판화가 한자리에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전체 화면을 일구기도 한다. 일즉다 다즉일이라고 해야 할까.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있고, 전체에 부분이 속한다. 부분이 전체의 구조와 다르지 않고, 전체가 부분의 형태와 통한다. 이렇듯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와 그 관계가 함축한 우주관 혹은 존재론이 이후 작가의 근작을 뒷받침하는 형식논리로도 진화한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실에 판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판화의 뒷면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작가가 판화를 제작하면서 함께 했을 비가시적인 과정들, 이를테면 땀과 눈물, 망설이고 주저하고 서성거리며 흘려보냈을 시간들, 때로 좌절하고 더러 환희에 들떴던 감정의 앙금들이 마치 몸에 난 상처처럼 스친 자국과 함께 침묵 속에 보존돼 있었다. 모든 그림이 그렇지만 완성된 판화에서는 간과되는 것들이고, 그것을 위한 자리가 없는 것들이다. 이것들이야말로 판화지 싶었다. 삶이지 싶었다. 자기지 싶었다. 예술이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밀어 올리는 기술, 그러므로 암시의 기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자국이며 흔적들을 표면 위로 밀어 올리고 싶었고, 비가시적인 것에 걸맞는 형태를 부여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판화와는 또 다른 가능성의 지점이 새롭게 열릴 것을 기대했고, 무엇보다도 이로써 자기가 더 온전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기를 예감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근작은 판화에서 자기표현 쪽으로 작업의 무게중심이 옮겨온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것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판화의 뒷면에 눈이 가거나 의식이 머물 일은 없다. 그런데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마도 작가는 판화를 제작하면서 계속 어떤 결핍을 느꼈고, 마침내 무엇이 결여가 됐는지 깨달았고 찾았을 것이다. 문제는 판화가 아닌,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기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판화지를 오려 크고 작은 사각형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사각형 조각을 뒤집어 덧붙여나가는 방식으로 하나의 전체 화면이 구성되게 했다. 거기에는 그저 하얀 종이 색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사각형도 있고, 판화를 인출 할 때 배어 나온 가녀린 선으로 가장자리를 둘러친 사각형도 있고, 아마도 작가도 몰랐을 잉크가 흔적처럼 묻어있는 사각형도 있고, 종이가 딱딱한 물체에 스치면서 생긴 자국을 보존하고 있는 사각형도 있고, 더러 꽤 다채로운 색깔을 간직하고 있는 사각형도 있다. 같은 사각형들이지만, 사실은 같은 것 하나 없는 이 사각형들은 다 무엇인가. 그대로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화면 속 사각형들은 말하자면 저마다 다른 존재의 모나드들이고, 단위 원소들이고,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초상일 수 있다. 아니면 존재의 집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집의 형태치고 정해진 형식이 따로 없지만, 그래도 문명사회 이후 집은 흔히 네모반듯한 사각형의 변주로 봐도 무방할 것이고, 그만큼 친숙한(그러므로 전형화된) 형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사각형을 픽셀의 단위원소로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미디어와 연관된 또 다른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저마다 고립된(그러므로 어느 정도 고독한) 존재의 집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사는, 때로 꽤 예쁜 저만의 불빛을 밝혀주고 있는 삶의 풍경을, 존재의 풍경을 그려놓고 있었다. 

작가는 비록 의도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았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보이는 화면구성이 꽤 감각적이고 정겹다. 호흡이나 리듬이 느껴질 정도로 경쾌하고 자연스럽다. 여기에 집이라고 생각하니, 우리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따뜻한 온기나 위로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그동안 작업해 오면서 작가의 몸에 밴 감각이 작동하고 자기실현을 얻은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사각형의 모나드들로 환원된 존재를, 존재의 집을, 존재의 본질을,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뼈와 살을 그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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