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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현②, 집어등과 레이저가 열어놓은 궁극공간

고충환


부지현, 집어등과 레이저가 열어놓은 궁극공간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칠흑 같은 어둠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전시장 자체가 어둠으로 된 고체 덩어리 같았다. 점차 눈이 어둠에 적응할 때쯤 어두운 덩어리를 자르며 직진하는 녹색 광선이 보였다. 레이저였다. 그리고 사람 머리가 보였다. 드문드문 관객들의 머리가 보였다. 머리가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도 같고 몽유병자가 자욱한 안개 속을 부유하는 것도 같다. 그리고 점차 밝아지면서, 아니면 눈이 어둠에 좀 더 적응되면서 마침내 사람들이 보이고 공간이 보였다. 

좀 전까지 수면처럼 보이고 안개처럼 보였던 평면은 알고 보니 공간 구석에 숨어 있는 포그머신이 쏘아 올린 포그였다. 포그가 레이저를 만나 공간을 가로지르는 평면을 만든 것이다. 빛과 어둠이 연무와 공간이 합세해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평면에는 마치 움직이는 수묵화와도 같은, 시시각각 변하는, 그렇게 변하다가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상이 맺혔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공간과 함께 연무와 함께 공중에 매달린 집어등이 보이고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폐선이 보였다. 작가는 레이저로 건너오기 전에 집어등으로 먼저 공간설치작업을 시작했다. 칠흑 같은 밤중에 먼바다에서 가물거리는 집어등이 상실된 고향 그러므로 존재의 원형을 일깨워준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작가는 바다에서 채집한 파도 소리를 삽입해 상실된 고향이 불러일으키는 향수와 그리운 감정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배로 치자면, 원래 작가는 집어등의 표면에 배 그림을 프린트했다가 최근에 실물로 대체했다. 

그렇게 전시장은 유사 바다가 되었다. 바다가 있고 해무가 있고 집어등이 있고 폐선이 있는. 그 유사 풍경이 현실에 기댄 서사보다는 아득한 전설 같은 비현실적인 서사를 떠올리게 하는데, 아마도 상실된 고향 그러므로 원형이 불러일으키는 향수와 그리움의 감정과도 통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공간연출가가 되고, 시간 조작자가 되고, 그리고 감정 조율사로 변신한다. <A Dialogue with>가 전시주제라고 했다. 아마도 상실된 고향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을, 대면을, 대화를 의미할 것이다. 

환기미술관과 같은 화이트큐브에서는 이처럼 공간환경이 안정적이고 닫힌 체계를 가지고 있는 탓에 공간연출이 용이한 편이다. 이변이 없는 한 최초 구상 그대로 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미술관을 벗어나면 사정은 달라진다. 예기치 못한 변수에 노출되고, 그 변수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공간연출은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이고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런 만큼 수차례에 걸친 현장답사는 필수과정이고, 설치작업 역시 철저하게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와중에 최초 계획이 끊임없이 수정되면서 공간에 걸맞는 연출이 점차 그 형태를 드러낸다. 

공간설치작업이고 장소 특정적 작업이다. 완성된 작업이 사후적으로 장소에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장소가 작업을 결정한다. 장소가 달라지면 작업도 달라진다. 여기에 장소가 없으면 작업도 없다. 그렇게 작업은 장소와 운명을 같이한다. 다시, 그렇게 장소는 작업과 만나면서 팔색조처럼 변신하고 공간의 성격이 재정의된다. 

전시가 열린 연천 아트하우스는 경기문화재단 산하 대안공간 혹은 다중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이런 장소 특정적 작업을 실험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원래 벽돌공장이었는데, 문을 닫은 지 오래돼 지금은 폐허로 남겨진 곳이다. 그런 만큼 벽돌로 마감한 벽체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고, 슬레이트 지붕은 부분적으로 깨지고 없는 구멍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그중 한 구멍 아래쪽에는 아마도 우연히 날아들었을 씨앗이 둥지를 튼 것이 분명해 보이는 꽤 큰 나무도 한 그루 있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시멘트 바닥에 난 균열을 뚫고 웃자란 꽃이며 풀들이 자연의 생명력과 복원력을 증언하고 있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빗물과 흙이 퇴적층을 만들어 여차하면 빠질 것 같다. 여기에 작은 터널 정도 되는 긴 가마가 양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사이 바닥에는 아마도 짐차의 원활한 이동을 위한 것인 듯 레일이 깔려 있었다. 

폐허 이미지 그대로 시간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생태의 성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의 집에 현대미술이 들어가는 최근 전시 경향이 떠올랐다. 폐허 이미지와 시간의 집 그리고 현대미술 특히 생태예술이 묘하게 서로 어울린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전시 주최 측에서 왜 작가를 초대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연천은 DMZ 인근에 소재해 있어서 아마도 DMZ와 관련한 장소 해석을 기대했을 것이다. 분단 현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석보다는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아니면 죽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생태적인 해석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런 기대는 <Relighting>으로 나타난 전시주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시 비추다, 재점화한다는 뜻이다. 빛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매개로 버려진 공간이 현대미술 공간으로 재생한다는 의미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죽은(그러므로 경직된) 장소에 그 자체 생명의 젖줄인 빛을 비추어 환생시킨다는, 생태적이고 상징적이고 실천적인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문제는 어둠이었다. 빛을 매질로 하는 작가에게 어둠은 필수였다.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빛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어둠을 얻기에 공간에는 빛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되는대로 빛을 막는 공사를 했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 새 나오는 빛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집어등이 들어가고, 레이저가 들어가고, 포그가 들어갔다. 구멍 뚫린 천장에 닿을 듯 웃자란 나무는 그대로 두었다. 그대로 살리면서 작업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였다. 생태와 관련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었다. 

화이트큐브에서는 빛의 강도며 어둠의 정도를 조율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일정한 공간환경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못했다. 화이트큐브에서 볼 수 있었던 완전한 어둠을 여기에서는 한밤중이나 돼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작업은 낮에 볼 때 다르고, 밤에 볼 때 다르고, 한밤중에 볼 때가 다 달랐다. 붉은 기운으로 감싸는 노을이 질 때 다르고, 파르스름한 새벽녘이 다 달랐다. 그렇게 공간환경은 시시각각 달랐다. 다시, 그렇게 시간이 작업에 매개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간이 결정적이란 점에서 시간 예술이고, 공간환경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세스아트 곧 과정 예술이다. 그렇게 작가는 조형예술의 기본인, 여기에 어쩌면 존재론적 조건인 시간과 공간의 두 축을 작업의 중추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공간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지지하는 전제를 <궁극공간>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자신의 작업이 궁극적으로는 공간연출작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 의미는 집어등 작업에서 그리고 레이저 작업에서 사뭇 다르다. 앞서 살폈듯 집어등을 소재로 한 작가의 공간설치작업은 상실된 고향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을 일깨워준다. 그런 만큼 존재론적 원형과 만나는 공간 경험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맞닥트릴 존재의 궁극 혹은 궁극적 존재를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집어등 작업에서 궁극공간의 의미는 공간보다는 궁극(이를테면 궁극적 존재) 쪽에 방점이 찍힌다. 반면 레이저 작업에서 그 의미는 이런 존재론적 의미보다는 공간 자체의 형식논리에 무게중심이 실린다는 점에서 다르다. 무슨 말인가. 주지하다시피 조형의 기본 형식요소는 점, 선, 면으로 환원(그러므로 한정)된다. 점과 점이 연이어지면서 선이 되고, 선과 선이 연장되면서 면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모든 형태는 이런 면의 변주로 가능해진다. 

이 형식논리를 작가의 작업에 적용해 보면, 작가의 작업에서 레이저 자체는 점(광점)에 해당한다. 그리고 알다시피 레이저는 직진하는 성질이 있고, 이로써 선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선과 선이 중첩되고 교차하면서 면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때의 면은 면으로 인식할 수는 있어도 감각 할 수는 없는 빈 면이고 허 면이다. 그래서 그 빈 면을 채우기 위해 포그가 동원된다. 그리고 앞서 살핀 것처럼 움직이는 산수화가, 환영과도 같은 덧없는 이미지가 그 면에 상으로 맺힌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레이저는 기존 공간의 숨겨진 구조를 드러내기도 하고, 기존 구조에 다른 구조를 덧붙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그 자체 독자적인 구조를 기존 공간에 들여놓기도 한다. 그렇게 공간환경을 확장하고 심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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