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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현① / 집어등과 레이저, 빛이 그린 그림

고충환


부지현/ 집어등과 레이저, 빛이 그린 그림 


집어등, 꿈처럼 아롱거리는 

어떤 소리, 어떤 향기, 어떤 이미지는 유년 시절의 추억을 되불러오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에 착안한 프루스트 효과다. 밤바다에서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멀리서 깜박거리는 불빛을 볼 때가 있다. 불빛을 보고 모여드는 오징어를 유인하기 위해 어선에 켜둔 집어등이다. 바닷가가 고향인 작가가 보기에 어둠 속에서 부유하듯 꿈꾸듯 깜박거리는 집어등은 아마도 까마득하게 잊힌 유년 시절의 추억을 되불러오고 상실된 고향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집어등이 작가의 작업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작가가 어릴 때 보았던 집어등, 작가가 원하는 형태의 집어등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아 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작가는 폐집어등을 구해 그 속에 소형 엘이디를 장착해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죽은 불빛을 되살려냈다. 그리고 여기에 불빛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어둠이 필수다. 이처럼 작가의 설치작업에서 어둠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칠흑 같은 바다를 떠올리게도 한다. 
여기에 공간에 거울이라도 설치할 때면 집어등의 반영상이 사방천지로 확장되면서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때로 여기에 바다에서 채집한 파도 소리를 삽입하기도 하는데,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상호 호환되는 공감각을 실현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처음엔 집어등의 표면에 배를 그려 넣기도 했지만(엄밀하게는 프린트), 이후에 점차 집어등 자체를 직접 제안하는 형태로 전형화되고, 여기에 때로 이미지로 그려진 배 대신 실물의 폐선이 오브제로 등장하면서 설치의 경향성을 강화하는 형태로 발전한다. 

이처럼 집어등을 소재로 한 작가의 설치작업은 상실된 고향을 떠올려준다. 여기서 상실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무형의 장소 곧 존재가 유래한 원형적 장소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을 의미한다. 좀 극적으로 말해 현대인은 이런 존재론적 원형의 상실감으로 아프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고향을 상실하고 존재론적 원형을 상실한 현대인의 상실감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레이저, 어둠을 가르는, 공간을 재구성하는 

이처럼 작가는 어둠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어둠 속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한다. 빛과 어둠이 대비될 때 비로소 빛도 어둠도 존재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빛이야말로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유일한 질료가 된다. 처음에 그 빛의 원천은 집어등이었다. 그리고 점차 다른 질료에도 눈이 가면서, 그 와중에 직진하는 빛 곧 레이저를 만났다. 그러므로 집어등에서 레이저로 빛의 질료가 이동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어둠 속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여기서 그 자체 캔버스 혹은 화면에 해당할 어둠은 무엇인가. 공간이다. 칠흑 같은 공간 속에 레이저를 쏘아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레이저의 직진하는 성질 탓에 기하학적 형태가 만들어지고, 그 기하학적 형태가 어우러져 또 다른 공간감을 연출한다. 대개 그 자체 이미 기하학적 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 실제 공간 속에 빛의 질료로 만들어진 또 다른 기하학적 형태의 가상공간을 중첩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공간이다. 빛을 질료로 하는 자신의 작업이 궁극에는 공간연출이며 가상공간을 제시하는 것임을, 그래서 또 다른 공간 경험으로 유도하는 것임을 간파한 작가가 찾아낸 주제고 주제 의식이다. 그러므로 궁극공간은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전제가 된다. 인문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그리고 정서적인 배경이 된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빛을 질료로 다양한 형태와 유형의 공간 경험을 제안하고 변주하는 것으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궁극공간을 연출하는가. 작가에게 궁극공간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작가에 의해 제시된 궁극공간은 어떤 또 다른 공간 경험으로 유도하는가. 주지하다시피 조형의 기본요소는 점, 선, 면이다. 점이 선을 만들고, 선이 면을 만드는,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면들의 조합과 변주로 모든 조형은 환원될 수 있다. 미술사적으로도 세잔은 세상의 모든 형태를 이런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연유로 입체파의 시조가 될 수 있었다. 아마도 작가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기하학적 형태가 뚜렷한, 외관상 추상적인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가능한 조형을 점, 선, 면과 같은 최소한의 형식요소로 환원하는 것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전제로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빛을 질료로 하여 그 전제를 실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가 반영된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그 전제를 실험하는가. 여기서 레이저 자체는 점이다. 스스로 빛을 내는 점 그러므로 광점이다. 그리고 레이저는 직진하는 성질이 있다. 그렇게 레이저를 쏘면 직선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레이저가 쏘아 만든 직선과 직선이 만나서 면을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면은 완전한 면은 아니다. 다만 면으로 인식될 뿐, 면 자체를 감각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빈 면이고 허 면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텅 빈 면을 어떻게 감각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작가는 포그 곧 연무를 또 다른 매질로서 끌어들인다. 포그머신을 통해 포그를 쏘아 올리면, 포그 입자가 퍼져나가면서 빛이 관통하는 막 곧 일종의 스크린을 만든다. 여기서 빛이 관통하는 막이며 스크린 자체가 면으로 감각되는 것이다. 비록 시선은 직진하는 빛에 집중되지만, 사실 빛은 공간 속에 흐르고 있었고, 그렇게 공간에 흩어지고 부유하는 빛의 질료를 형태 위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레이저의 직진하는 성질을 이용해 실제 공간에 가상공간을 연출할 수 있고, 실제 공간과는 또 다른 공간 경험을 유도할 수 있다. 공간에 흐르는 빛은 빛과 포그가 만나야 비로소 가시화될 수 있는데, 이로써 잠재적인 공간, 가능태로서의 공간, 비가시적인 공간, 그러므로 어쩌면 그 자체로는 부재 하는 공간을 가시화하는 방법으로 하나의 공간 속에 수많은 가상공간이 연출되는 일루전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관객은 마치 연무 속에 빠진 것 같은, 연무 속에 잠긴 목을 보는 것 같은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때론 낯설고 그로테스크한 감각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자체 감각 경험의 질과 폭을 확장 시킨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포그 입자는 흐른다. 그렇게 흐르는 성질은 빛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가시화되는 것인데, 이렇게 형성된 가상의 막 혹은 스크린에는 환상적인 일루전이 전개된다. 마치 움직이는 수묵화를 보는 것도 같고, 잠시 잠깐 머물다가 사라지고 마는 덧없는 환영을 보는 것도 같은 느낌이다. 설치작업을 통해 그림을 그린다는 수사적 표현이 실제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대목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폐벽돌공장, 장소 특정적인 

그리고 여기에 장소 특정적인 작업이 있다. 설치작업의 한 유형으로서, 작업이 설치되는 장소와 운명을 같이하는 작업이다. 작업 자체가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 설치되는 장소에 의해 비로소 그 실체를 얻는 작업인 만큼 장소가 없으면 작업도 없다. 특정 장소가 그림을 위한 캔버스 혹은 화면을 대신하는 것인 만큼 가변성과 유동성이 특징이고, 작업이 설치되는 장소 여하에 따라서 매번 다른 작업이 특징이다. 빛을 질료로 그림을 그리고 공간을 재구성하는 작가의 작업이 그렇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곧 작업이 설치되는 공간에 대한, 그리고 장소에 대한 해석일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전시공간이며 장소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여기서 공간에 대한 해석과 장소에 대한 해석은 그 결이 사뭇 혹은 많이 다른데, 공간에 대한 해석이 조형적인 해석이라고 한다면, 장소에 대한 해석은 그 장소의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회적이고 이념적인 배경과 현실에 대한 해석이 될 것이다. 비록 그 두 해석은 표면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작업 속에서 하나의 결로 서로 스미면서 종합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번에 작가가 작업을 설치한 공간 혹은 장소는 연천에 소재한 폐벽돌공장이다. 지금은 비록 경기문화재단 산하 대안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오래전에 문을 닫아 찾는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된 공간이다. 그런 만큼 군데군데 벽체가 허물어져 있고, 슬레이트 지붕도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 많다. 아마도 그중 큰 구멍 사이로 씨앗이 날아와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이는 공간 속에서 웃자란 나무가 무상한 세월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여기에 콘크리트 바닥 여기저기에 난 균열을 뚫고 싹을 틔운 이름 모를 꽃들이며 들풀이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과 복원력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공장 내부로 들어가면 아마도 구멍이 뚫린 지붕 사이로 흘러내린 빗물이 만든 퇴적층이 여차하면 빠질 것 같고, 가마 속 사정을 점검하기 위한 구멍에 달린 작은 철문이 다 떨어져 나가 구멍을 그대로 노출 시키고 있었다. 천장이 높고 작은 터널만큼이나 긴 가마가, 여기에 아마도 수레를 끌기 위한 것인 듯 바닥에 깔아놓은 레일이 마치 어둠 속에 잠자고 있는 폐허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도시재생의 한 경우로서, 황폐한 공간과 현대미술이 접목되는 최근 전시 경향이 떠올랐다. 패션쇼와 음악회 그리고 전위적인 미술이 그 자체 시간의 집인 폐허 공간과 어울어져 색다른 이벤트를 연출하는 경향 말이다. 

아마도 작가의 작업을 풀어놓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가가 작업을 본격적으로 풀어놓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어두운 공간은 빛으로 인해 비로소 그 실체를 얻고, 빛은 어둠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그래서 허물어지고 구멍 난 벽체며 지붕을 막아 어둑한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성된 공간 속에 집어등이며 레이저가 연출한 빛의 향연을 풀어놓았다. 비록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공간 속에서 웃자란 나무를 조형의 일부로 끌어들이면서. 

긴 여름 해 탓에 밤 8시나 9시는 돼야 비로소 작업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예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워지는 한밤중이나 새벽에는 또 다르다고 했다. 빛의 강도 여하에 따라서 분위기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현재진행형의 프로세스아트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 들어서면 처음엔 어둠에 적응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다시, 그렇게 눈이 어둠에 적응할 즈음이면 레이저가 만든 선이 공간의 뼈대며 구조를 드러낸다. 그렇게 레이저의 직진하는 빛이 공간의 뼈대를 드러내고, 때로 가상공간의 구조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공간을 채운 포그에 의해 마치 공간이 아래위로 단절된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단절된 면 위로 머리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고, 흡사 무중력 공간 속을 부유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불현듯 단절된 공간이 단절된 분단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주지하다시피 연천은 접경지역이고,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오랫동안 방치된 허물어진 폐벽돌공장이 분단 현실의 알레고리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폐허 속에 웃자란 나무가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과 복원력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 자체 아마도 폐허 자체가 일종의 생태예술을 그 속에 품고 있는 자궁으로도 볼 수 있겠고, 이로써 분단 현실이 주는 상처를 치유하고 복원하는 의미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그렇게 장소 특정성 작업은 비록 같은 작업이지만 어떤 장소에 어떤 문맥에 담기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하나의 의미란 그 자체로서보다는 문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문맥 밖에는 의미도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 광선 색깔도 그 다름과 차이에 연동되는데, 이를테면 적색 광선이 불안과 폭력적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면, 이번 전시에서 보는 것과 같은 녹색 광선은 폭력적 현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녹색 광선이 만든 포그 위로 흐르는 마치 움직이는 수묵화 이미지가 집어등의 파란 불빛에 의해 그 실체를 드러낸 해무의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판타지를 열어놓는 것도 흥미롭다. 작가의 작업의 전제인 궁극공간이 실제로든 가상으로든 공간의 구조와 뼈대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포그를 이용해 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 비록 설치작업이지만 그림을 그린다는 또 다른 회화적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는 그렇게 허구의 바다에 빠지는, 가상의 산속에서 길을 잃는 감각적 쾌감이 있다. 


바다, 원형적인 기억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는 바닷가가 고향은 아니다. 어릴 때 서울에 살다가 20살 즈음에 제주도에 갔다. 그리고 이후 서울과 제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서두에서도 말했듯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실질적인 고향, 지정학적 장소로서의 고향을 넘어 어쩌면 우리 모두 까마득하게 잊고 있거나 상실했을지도 모를 고향(감) 그러므로 존재론적 근원으로서의 고향(의식)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칼 융은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을 넘어선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부르고, 그 기억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곧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존재가 유래한 근원, 원천, 궁극에 대한 기억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 기억이, 미처 기억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그 원형적 기억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바닷가에 서면, 칠흑 같은 밤바다에 서면, 그렇게 선 채로 멀리서 깜박거리는 불빛을 보면 알 수 없는 향수에 빠져든다. 그러므로 바다는 어쩌면 인류가 유래한, 존재가 유래한, 내가 유래한 원형적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 생각을 집어등 설치작업에 담았을 것이다. 

반면 어둠을 가르며 직진하는 레이저 불빛은 이런 아득하고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환기보다는 불안하고 긴박한 심리적 정황이나 잠재적인 폭력과 같은 이념적 현실을 추체험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어쩌면 원형적 기억을 소환하는 향수와 폭력적 현실을 고발하는 현실의 반영과 참여의식이야말로 작가의 설치작업을 관통하는 두 축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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