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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미/ 검은 숲에서 다시, 숲으로

고충환


변연미/ 검은 숲에서 다시, 숲으로 



황폐한 숲은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삶의 처참한 현장을 가르쳐주었으며, 함성을 지르며 경쟁하는 전쟁터와도 같은 현실의 슬픔을 맛보는 듯하여 참으로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각인 되었다...직선의 나무들이 위태로운 구도로 서 있는 숲. 혼돈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나에겐 대지보다 넓은 화폭이 필요하다...검은색은 잡다한 다른 표현들을 잡아먹고 무겁고 거칠고 상처투성인 몸을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작가 노트) 

모든 일은 뱅센 숲에서 시작되었다. 작가의 작업실 근처에 뱅센 숲이 있었고, 뱅센 숲을 산책하는 일은 작가의 일과 중 하나였다. 작가는 뱅센 숲을 산책하면서 문명과는 다른 바람과 공기를 호흡했을 것이고, 도시와는 다른 빛깔과 색깔을 감촉했을 것이다. 그렇게 문명에서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즐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바람, 다른 공기, 다른 빛깔, 다른 색깔이 작가의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 비록 사물 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따라 그리는 재현적인 회화가 아니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자연과의 교감이나 숲과의 상호작용을 유추해볼 수는 있다. 자연과 작가가, 숲과 작가가 서로 주고받았을 감각과 감정에 일어난 일이 여실하고, 그렇게 그림은 숲이 주었을 위로와 온기로 다정하다. 

꼬불거리는 선 몇 개, 질박하고 거친 선 몇 개, 무심한 듯 툭툭 찍은 비정형의 점 몇 개, 그리고 흐릿한 얼룩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자연과의 교감과 상호작용의 비가시적 실체가 흔적으로 육화된 그림이다. 어쩌면 외관상 프리페인팅 혹은 자유드로잉이라고 해도 좋을, 그렇게 감정의 직접적인 표출이라고 해도 좋을 추상 작업을 하던 초기부터 자연에 대한 공감이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 심상 혹은 심성에 물들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이후 본격적으로 숲을 그리기 이전부터 선이 나무를, 점이 꽃을, 그리고 얼룩이 숲을 예견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그 그림 한가운데에 뱅센 숲이 있었다. 


그리고 1999년 태풍이 불었다. 태풍은 프랑스를 휩쓸었고 뱅센 숲을 망가트렸다.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로 가득한 황폐한 숲에서 당시 작가가 조우했던 풍경은 충격이었고, 이후 작가에게 일종의 원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보다 아득한 기억 그러므로 원초적인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작가는 검은 숲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검은 숲이 향후 작가의 그림에서 일종의 원형적인 이미지가 될 것이었다. 

어쩌면 이 사건을 계기로 전에 보지 못했던 원형적인 이미지를 부지불식간 보게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검은 숲은 황폐화된 숲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원형적인 이미지이기도 한 것이다. 원형적인 이미지? 어떤? 무엇의? 황폐한 숲은 작가에게 삶의 처참한 현장을 가르쳐주었고, 경쟁하는 현실의 슬픔을 맛보게 했다. 숲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검은 숲은 의인화된 숲이다. 황폐해졌다고는 해도 사실은 여전히 무심한 숲에 작가가 검은 감정을 이입하면서 처참하고 슬픈 현실을 대리하는 숲으로 그 성분이 변질된 것이다. 

그렇게 검은 감정은 처참하고 슬프고 치명적이다. 그리고 치명적인 것으로 치자면 그 지극한 경우가 죽음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낭만주의는 숲에서 죽음을 본다. 죽음이 삶을 정화한다고 본 것인데, 숲이 삶을 정화한다는 관념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검은 숲 그러므로 검은 감정은 향후 작가에게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이로써 적어도 이후 작가가 본격적으로 숲을 파고들게 된 계기이며 사건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흔히 숲은 치유와 위로를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관념은 인간 본위의 생각일 뿐이다. 굳이 범신론과 물활론, 토테미즘과 애니미즘, 그리고 영성주의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숲은 영적이고 주술적이고 신비적이고 신적인 대상 그러므로 선과 악, 도덕과 윤리 나아가 미학마저 초월한 대상이다. 자연은 인간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본다고 했다(노자). 인간이 저를 뭐라고 부르든 아무런 상관이 없고, 자연을 명명하는 개념은 다만 인간의 일 일 따름이다. 그렇게 자연과 인간, 자연과 개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언제나 개념화되지도 의미화되지도 제도화되지도 않은 채 엄연한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궁극은 언제나 손에 잡히지 않은 채 미증유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법이다. 하나의 의미(그러므로 개념)란 언제나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연기될 뿐, 궁극적인 의미, 최종적인 의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다(자크 데리다의 차연). 그렇게 실재는 의미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예술이 여전히 자연에 기대고 있는 부분이며, 그럼에도 자연(그러므로 자연에서 캐낼 수 있는 의미)이 여전히 고갈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작가의 숲 그림이 세고 거칠고 낯설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기도 할 것인데, 작가의 숲 그림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치유와 위로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간과된 그러므로 어쩌면 억압된 자연의 부분, 말하자면 영적이고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부분, 개념화되지도 의미화되지도 제도화되지도 않은 채 엄연한 현실로서 존재하는 부분, 그러므로 어쩌면 죽음과 숭고를 통해 정화하는 부분을 되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사실은 본질적인 치유와 궁극적인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직선의 나무들이 위태로운 구도로 서 있는 숲을, 혼돈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숲을 검은색으로 그렸다. 여기서 검은색은 존재의 본질을 직면하게 해주고(잡다한 다른 표현들을 잡아먹고), 상처투성이 존재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도록 해준다. 전쟁터와도 같은 현실에서 오직 슬픔을 맛볼 수 있을 뿐인 존재, 그러므로 어쩌면 여전히 자신이면서 자기의 또 다른 타자(자기_타자)와 화해하게 해준다. 모든 진지한 인간은 비극적 인간이다. 존재에서 연민을 본다는 점에서 이타적 인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황폐한 숲에서 이런 연민을 보았고, 그러므로 검은 숲 그림에 이런 이타적 인간의 입김을 불어 넣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숲 그림은 사실은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의 치유와 위로를 준다. 황폐화된 숲이 치유와 위로를 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예술은 역설에 상당할 정도로 빚지고 있고, 그런 점에서 작가의 검은 숲 그림은 예술의 본질이며 실천 논리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작가는 검은 숲 이후, 다시 숲을 그린다. 검은 숲과 비교해보면 재생되는 숲을 그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번에는 제법 숲의 위상과 위용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반적(그러므로 상식적)이지는 않은데, 아마도 종전 검은 숲에 대한 무의식적 끌림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을 것이고, 그 자체가 풍경을 매개로 한 작가만의 고유한 회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숲 그림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어떻게 다른가. 숲을 매개로 풍경을 매개로 자신만의 회화적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열어놓고 있는가. 

작가의 그림에서 인상적인 경우로 치자면 압도적인 스케일을 들 수 있다. 그림 위쪽으로 하늘이 살짝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숲이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어서 마치 숲속에 들어와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숲속에서 울울한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숲의 일부로 내가 동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흔히 멀리서 숲 전체를 조망하는 경우, 아니면 숲 혹은 산을 중첩 시켜 그 깊이를 파고드는 경우와는 구별된다. 

숲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나, 숲속에서 하늘을 가리고 있는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은 말하자면 앙각법으로 나타난 특유의 시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시점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고 사물을 대상화하는 주체의 관념 그러므로 태도를 반영한다. 흔히 앙각법은 기념비적인 동상 제작에 적용되는 이데올로기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의 경우에는 검은 숲에서부터 견인된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원초적인 숲이 자기 속에 품고 있는 알 수 없는 에너지와 생명력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태도가 반영된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숲 그림은 숲과 내가 동화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이런 일체감은 어떻게 가능한가. 물아일체의 경지며 우주적 살(메를로 퐁티)의 차원은 어떻게 열리는가. 내가 숲속에 들어가 있다고 느끼게 하려면 먼저 작가가 숲속에 들어가야 한다. 나에겐 대지보다 넓은 화폭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은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실제 크기를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실재를 담아낼 수 있을 만큼 큰 그림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말은 수사적 표현이 아닌데, 작가는 실제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숲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림 속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숲을 일군다. 무슨 말인가. 흔히 그렇듯 그림을 세워놓고 그리는 대신, 작가는 화면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림을 그린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그림 속에 들어가 스스로 무당이 되었다는 사람이 있다. 잭슨 폴록이다. 무당이 뭔가. 대상과 혼연일체가 돼 나와 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 주와 객의 경계를 지우는 사람 그러므로 어쩌면 반신이다.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검은 숲이 무당이고 반신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숲 그림은 어쩌면 여전히 검은 숲이 연장된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숲을 그린다. 한눈에도 꽤 감각적이고 재현적이고 사실적이다. 여기에 스케일도 압도적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노동집약적인 그림인가. 세부를 파고드는 집요한 그리기의 사례를 예시해주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작가의 그림에 대해서는 멀리서 볼 때 틀리고 가까이서 들여다볼 때가 다른 경우 그러므로 어쩌면 하나의 화면 속에 다른 국면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가까이서 작가의 그림을 보면 사물 대상을 작정하고 묘사한 경우와는 거리가 먼, 의외성과 우연성 그리로 여기에 때로 즉흥성마저 느껴진다. 

종전 검은 숲을 그릴 때 작가는 모래와 본드 그리고 먹을 혼합한 안료를 사용해 거칠고 질박한 느낌을 주었다면, 이번에는 먹 대신 커피 가루를 혼합한다. 그렇게 혼합된 재료로 먼저 바탕화면을 조성한 연후에 그 위에다 그림을 그리는데, 미처 바탕화면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러므로 여전히 습기를 머금고 있는 화면 위에 묽게 탄 안료를 떨어트리거나 흩뿌린다. 그러면 바탕화면에 조성된 미세 요철 사이사이로 안료가 스며들거나 번져나가면서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을 만든다. 우연성이 열어놓는 예기치 못한 효과를 포함하는 그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 하다 보면 얼룩들이 모여 나무도 그리고, 숲도 일구고, 하늘도 열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바람과 대기, 온기와 습기를 머금은 기운과 같은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실체마저도 그 형상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 대해서는 일면 얼룩들의 회화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얼룩들이 회화적 단위원소 그러므로 모나드가 되어 형상을 일구는 그림이다. 그 자체 회화의 터치를, 인쇄매체의 망점을, 미디어의 픽셀을 대체하는, 그보다는 현저하게 가변적인 변수에 노출된 또 다른 회화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기를 머금은 시커먼 나무 위로 연녹색의 이끼가 피막처럼 뒤덮고 있는, 몽글몽글한 얼룩들이 배경 화면에도 그리고 나무 위에도 포자처럼 포진하고 있는, 비록 드문드문 나무 사이로 하늘 조각이 보이지만, 대개는 시커먼 실루엣으로 환원돼 보이는 나무들이 화면을 장악하고 있는,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비쳐드는 빛 조각 혹은 빛 알갱이가 반짝이며 존재를 드러내는 숲 그림이 원시적인 그러므로 원초적인 숲의 생명력과 만나게 한다.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자연, 처녀지로서의 자연과 대면케 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자연 자체보다는 인간의 욕망에 복무하는 고분고분한 자연으로 그 의미가 축소된 시대를 살고 있다. 자연 자체보다는 미디어와 엽서 속 자연 이미지를 더 친숙하게 느끼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게 정작 자연 자체는 인식 밖으로 밀려난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에 작가는 에너지와 생명력, 주술과 신비, 삶과 죽음, 죽음과 재생, 비극과 숭고, 그리고 여기에 영적 환기력마저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포함하고 있는 숲을,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숲을 대질시킨다. 자연을 상실한 시대에 마주한 그 숲이 더 울울하고, 더 어둑하고, 더 아득하고, 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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