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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꿈 같기도 현실 같기도 한, 불온하고 서정적인 공모

고충환



김영남/ 꿈 같기도 현실 같기도 한, 불온하고 서정적인 공모 



그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더러 스스로 사라지기도 하는데, 경찰과 형사가 투입돼 사람들을 탐문하고 다니는 것으로 봐서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그가 여인숙을 전전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최근까지 그가 머문 것으로 알려진 세간살이 하나 없는 여인숙 방에는 수북한 재떨이와 쓰러진 소주병이 그대로여서 당장이라도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다. 주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실은 그 상태 그대로 방이 방치된 지 꽤 오래되었고, 혹 그가 다시 돌아올지 몰라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작은 동굴처럼 둘둘 말린 이불이 마치 사람이 방금 빠져나간 듯 반쯤 일어나 앉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체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어쩌면 추위보다 더 추운 쓰라린 마음을 보호받기 위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그는 한때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그 기운으로 냉골의 추위를 잊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옷을 입은 목이 없는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눈치였다고 했다. 하던 사업이 망했을까.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름도 없는 여인숙으로 흘러들게 되었을까. 모를 일이다. 그에게 여자가 있었고, 그가 그 여자를 따라갔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보다도 먼저 그 여자가 사라졌고, 그가 그 여자가 사라진 바닷가 마을을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여자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고 했다. 그 여자와의 첫 키스는 생각만으로 짜릿했을 것이고, 성마름과 조급함으로 실패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키스를 하기는 했는지, 키스를 했는데 실패적이었는지, 아예 처음부터 생각일 뿐인 것인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고, 꼭 자기 일처럼 말했다. 

그의 유년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릴 때 그는 대개 사람들이 그랬듯이 가난했고, 여기에 집안 분위기가 좀 억압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 친구가 없었고, 좀 외톨이였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사람보다도 친구보다도 오리와 더 친했는데, 곧잘 오리와 함께 그가 산책하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고, 그럴 때면 그가 오리를 얼마나 살갑게 대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그가 오리와 한동안 같은 집에서 살았다고도 했다. 그를 뒤쫓던 사채업자도, 그보다 먼저 사라진 여자도, 그리고 친구보다 살갑던 오리도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그가 사라지고 없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가 사라진 것이 맞는지, 도대체 어디로 왜 사라진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영화와 영상, 설치미술과 개념미술 그리고 여기에 퍼포먼스의 경계마저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김영남의 작업은 다중복합적이다. 주지하다시피 후기모더니즘 이후 현대미술은 탈장르와 탈경계 그리고 탈형식과 같은 각종 탈의 논리에 의해 견인된다. 작가의 작업은 이런 탈의 논리에 부합하고, 요새로 치자면 융복합의 추세에 부합된다. 여기에 원래 예술은 신에 대한 제의로부터 비롯했다는 믿을만한 설이 있다. 음악 공연 무용 그리고 여기에 퍼포먼스와 이미지가 하나로 어우러진, 소위 토탈아트(총체 예술)를 총동원해 신을 달랬는데, 형식적으로 그런 예술의 기원에도 부합한다. 일부 현대미술에 나타난 영성주의가 최초의 예술에 나타난 주술주의와 묘하게 통하는 느낌이다. 

작가는 <그의 사라짐에 관하여>라는 주제의 작업을 짧은 영화와 영상, 설치와 음향, 퍼포먼스와 텍스트의 형식에 담아 풀어냈다. 사실을 말하자면 총 15개의 꿈의 조각들을 재구성한 것인데, 조각들 저마다의 성격에 맞는 형식을 찾아 매칭시킨 것이다. 단위작업들은 저마다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가 사라진 이유와 전후 사정을 중심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를 이루는 형식을 취한다. 

문제는 꿈이다. 왜 꿈인가. 꿈은 도대체 작가의 작업에 작동되고 있는 서사와 무슨 유의미한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꿈이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우회적으로 실현되는 장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 현실의 원인에 해당하는 현실 그러므로 원형적 현실일 수 있다. 원형이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융은 개별주체의 기억을 넘어선 원형적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원형적 기억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곧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정리를 하자면, 프로이트에게 꿈이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자기를 실현하는 장이라고 한다면, 융이 보기에 꿈은 원형적 기억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의 장이 된다. 이런 사실에 주목해서일까,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이 오히려 현실보다 더 진정한 현실이라고 했고, 꿈이 보여주는 생생한 비전이야말로 억압되기 이전의 현실, 잠재적인 현실 그대로의 민낯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자크 라캉은 무의식도 의식처럼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무의식의 언어는 유감스럽게도 의식의 언어만큼 투명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다만 상징과 은유, 암시와 비유의 형식을 빌려 겨우 그 의미를 짜 맞출 수 있을 뿐, 그렇게 짜 맞춘 언어로 더듬거리며 겨우 추정해볼 수 있을 뿐.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의식의 언어가 다름 아닌 불구의 언어에 기초해 있는 것임을 증명한다. 흔히 언어가 간과하고 있는 의미며, 곧잘 의미화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의미가 그렇다. 

다시 작가의 작업으로 돌아가 보자.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꽤 일관된 서사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사라졌는지,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대체 그가 사라진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서사가 종말을 향하면서 덩달아 그 이유가 해명되고 그 실체가 손에 잡혀야 하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더 오리무중에 빠져드는 것만 같다. 애초에 해명을 위해 서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의미들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서사를 제안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실제로 설치된 작업들도 보면 얼핏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에 종속되는 것도 같아 보이지만, 정작 그 관계를 파고들면 들수록 오히려 삐걱거리는 균열과 파열음만 들려올 뿐이다. 

도대체 뭔가. 작가가 제안한 종류의 서사가 어떤 유의미한 의미라도 담보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불현듯 자크 데리다의 차연을 떠올려보게 된다. 하나의 의미는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연기될 뿐, 궁극적인, 최종적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다. 작가는 이처럼 지연되는 의미, 너무 늦게 오는 의미(사실을 말하자면 이미 프로이트의 사후 판명성 개념으로 선취 된), 어쩌면 의식의 언어가 간과하고 억압했을지도 모를 의미의 조각난 파편들을 가지고 서사를 짜고 있다. 그러니 서사 간 형식 간 지점들(어쩌면 그 자체 차이를 파생시키는 계기들)이 삐걱거리고 파열음이 들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런 부류의 서사가 가질 수 있는 효용성을, 그 의미작용을 따져보자.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다. 시대가 불안하면 예술도 불안하다. 시대가 삐걱거리면 예술도 삐걱거린다. 시대가 불통이면 예술도 불통이다. 시대가 이해 불능이면 예술도 이해 불능이다. 돌이켜보면 공공연하게 반예술과 반미학을 표방한 아방가르드 예술이 그랬다. 그리고 작가가 미처 이 부분을 짚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사라지고 있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행불자들(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그러므로 벌거벗은 생명 혹은 인간)도 많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이 바로 이 부분을 짚었다기보다는, 그렇게 불안한 시대 감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꿈을 매개로 한, 삐걱거리는, 불통의, 불안한 시대 감정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어쩌면 작가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무의식에 잠자는 불온하고 서정적인 공모를 부지불식간 들켜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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