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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예/ 봄의 제전, 화사하고 순수한, 재생하고 순환하는

고충환


김건예/ 봄의 제전, 화사하고 순수한, 재생하고 순환하는 



여기에 흰옷을 입은 처녀들이 있다. 처녀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있고 손에도 꽃을 들고 있다. 그림 속에서 처녀들은 마주 모은 두 손에 꽃을 받쳐 들고 있는 것도 같고(공물?), 허공을 향해 꽃을 흩뿌리는 것도 같다.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손짓하는 것도 같고, 꽃과 함께 오는 누군가를 부르는 것도 같다(초혼?). 한 줄로 연이어진 꽃 덩굴이 보호하기라도 하듯 처녀들을 감싸고 있고, 그렇게 두 처녀는 꽃으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허공에는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꽃잎과 함께 노랑나비가 날고 있다. 그림 속에서 처녀들은 반가운 누군가를 맞이하기라도 하듯 웃기도 하지만 대개는 알 수 없는 의식이라도 행하는 듯 짐짓 진지하고 굳은 표정이다. 그렇다면, 의식인가. 봄의 여신 플로라를 맞이하는 여사제들인가. 

작가의 그림은 알만한 형상에도 불구하고 모호하다. 봄의 축제 그러므로 봄의 여신 플로라를 맞이하는 의식을 그린 것이라 해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일까. 코로나19로 상실한 계절을 되찾는 설레는 마음을 표현한 것일까. 그렇다고도 할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단언하기에는 저어되는 부분이 있다. 한눈에도 의식적인 처녀들의 몸짓이며 짐짓 진지하고 굳은 표정이 봄을 맞이하는 설레는 마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럼 뭔가. 알레고리(역설적 유비)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의미와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다른 그림이다. 

그렇다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의미는 뭔가. 처녀와 꽃으로 상징되는 봄을 맞이하는 설레는 마음을 그린 그림이다. 다시, 그렇다면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는 뭔가. 이번에도 역시 처녀와 꽃으로 상징되는 것이지만 정작 그 의미는 다르다. 그 단서가 그러므로 그 중의적인 의미가 배경 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분홍색에 있다. 통속적으로 그러므로 관습적으로 분홍색은 화사한 감성으로 인해 흔히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여기에 처녀들의 흰옷이 상징하는 순수가 더해지면 그 의미는 더 분명해진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화사하고 순수한 처녀성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분홍색인데, 좀 무겁다. 말 그대로 화사한 분홍색이라기보다는, 짓누른다고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분홍색에 가깝다. 

여기에 반전이 있다. 그러므로 다시,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분홍색으로 상징되는 화사하고 순수한 처녀성을 문제시하고 있는 그림이고, 그 통속적인 관념을 문제시하는 그림이다.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상징색으로서의 분홍색 같은 색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런 꽃도 없고, 그런 흰옷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성적 정체성에서 자유로운, 그 자체 가치 중립적인 분홍색이, 꽃이, 그리고 흰옷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그러므로 분홍색으로 상징되는, 꽃으로 상징되는, 흰옷으로 상징되는, 그리고 봄의 제전(축제? 메이퀸?)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알고 보면 자본주의 욕망의 상품화 기획일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여성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그린 것이고, 그 통념이 은폐하고 있는 억압된 욕망을 그린 것이다(롤랑 바르트는 사회적 통념 그러므로 상식을 부르주아의 계급의식을 공고히 하는 언술이라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겉보기와 다르다. 표면적인 의미와 이면적인 의미가 다르다. 그리고 여기에 그리드가 있다. 형상을 완전히 가리지는 않으면서, 형상이 비쳐 보이게 유지하면서 형상 위를 가로지르는, 그리고 때로 가로와 세로가 겹치면서 형상 위에 드리워진 촘촘한 망이고 희뿌연 막이다. 작가가 그린 거의 모든 그림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요소랄 수 있는 이 그리드는 뭔가. 

여기서 다시, 알레고리가 소환된다. 이를테면 겉뜻과 속뜻이 다르고, 표면적인 의미가 이면적인 의미와 다르다. 소통에는 언제나 이런 망이며 막이 매개되기 마련이고, 그러므로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와 너 사이엔 언제나 심리적인 망이며 이해관계의 막이 가로막혀 있어서 나는 너에게 그리고 너는 나에게 완전히 건너갈 수도 건너올 수도 없다. 여기에 미적 거리두기를 통해 중의적인 의미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려는 작가의 기획이나 성향으로 볼 수도 있겠다. 자크 데리다는 하나의 의미란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연기될 뿐(그러므로 차연), 궁극적인, 최종적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 속에서 그리드는 불완전한 소통을 증언한다. 

그렇다면 뭐가 들어서 불완전한 소통을 초래하는가. 바로 억압된 욕망이고 무분별한 욕망이고 일그러진 욕망이다. 서로의 욕망이 다른 탓에,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있는 까닭에 불완전한 소통이고 불통이다. 그렇게 작가는 특히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매개로 한 사회적 통념에 대해, 그리고 그 이면에 은폐된 억압된 욕망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 관심은 꽤 일관적이고 지속적인데, 아마도 신문잡지와 같은 언론매체가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을 통해 본 여성성의 상품화 기획(2003)이 그렇고, 포커의 로얄 스트레이트 플레시와 코스프레를 매개로 한 여성성이 결합 된 행운의 아이콘에 대한 신화(2012)가 그렇고, 화수분처럼 황금이 샘 솟는 샘으로 표상되는 욕망을 무슨 전리품처럼 전시하는 것(2015)이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봄의 제전으로 상징되는, 제전이라고 하기엔 좀 우울해 보이기조차 하는, 화사하고 순수한 처녀들의 의식을 연상시키는, 그리고 그 위로 무슨 환영처럼 비현실처럼 노랑나비가 나풀거리는, 그 자체 알레고리 같은 일련의 그림들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이렇듯 꽃으로 장식한 그리고 때로 꽃을 부리는 처녀들을 그린 일련의 그림들과 함께 외관상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또 다른 그림들을 제안하고 있다. 얼핏 골짜기를 따라 드리워진 그림자와 능선이 뚜렷한 중첩된 산을 그린 그림인데, 사실 알고 보면 구김이 있는 공단과 같은 천을 포개놓은 것이다. 여기에 꽃문양이 있는 패턴으로 정교하게 수 놓인 천을 앞산으로 설정해 아무 문양이 없는 천으로 표현된 뒷산과 구별되게 한 것이 전통적인 원근법을 흉내 낸 것 같다. 일종의 유사 원근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형태적 유사성을 흉내 낸 것이므로 일종의 의태법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표면적인 의미와 이면적인 의미가 다르다. 산을 그린 풍경화가 표면적인 의미라면, 사실은 구김이 있는 공단으로 드러난 실재가 이면적인 의미다. 

이처럼 서로 차이 나는 의미가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을 때, 더욱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을 때 대개 방점은 표면적인 쪽보다는 이면적인 의미 쪽에 실린다. 바로 실제적인 의미와 숨은 뜻이 거기에 있다. 산인 줄 알았는데, 풍경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천이었다. 일종의 속임수고 착각이다.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라는 주문이다. 반 이미지 정치학이다. 사람들은 다만 이미지에 관심이 있을 뿐, 실재에는 관심이 없다. 이미지가 현실을 삼키고, 실재를 삼키고, 의식을 삼키고, 모든 것을 삼킨다. 이미지가 뭔가. 욕망이다. 욕망에 눈이 멀면 현실도 없고, 실재도 없고, 의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미지가 현실과 실재와 의식을 대체한 가상현실에 대한 논평일 수도 있겠다. 

다시, 그러므로 화사하고 순수한 처녀들의 의식에 숨겨진 억압된 욕망을 봐달라는 주문일 수도 있겠다. 여기에 처녀들이 주관하는 봄의 제전을 그린 작가의 그림이 의고적인 분위기의, 신화적인 테마와 상징적인 의미를 결합한, 그러므로 문학적인, 라파엘전파의 또 다른 버전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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