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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의 사진 설치작업

고충환


이호영의 사진 설치작업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 혹은 
나는 존재하는가 그리고 존재했었는가 하는 문제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엄밀하게는 그의 사진들이 있다. 까까머리 유년 시절에서부터 장발의 청년을 지나 노년에 이른 현재의 사진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빛바랜 흑백사진과 색바랜 컬러사진을 포함하는 사진 속에서 그는 설핏 웃음을 웃기도 하지만, 흔히 증명사진이 그렇듯 대개는 정면을 응시한 채 굳은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그 자체가 마치 짧은 웃음과 긴 우울로 점철된 삶의 알레고리를 보는 것도 같다. 

더러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긴 채 흐릿한 사진도 있는데, 아마도 작은 사진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흐릿해졌을 것이다. 그 자체가 마치 흔적 뒤편으로 사라지는 존재를 예시하고 있는 것 같다. 흔적 뒤편으로 사라지는 존재? 사진은 시간의 집이다. 존재를 박제하고 가두는 시간의 집이다. 그 자신으로 치자면 존재하지도 흐르지도 않는 시간의 집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불멸(사진 속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 존재를 보여준다) 아니면 불모(사진 속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보여준다)의 순간 속에 존재를 흔적으로 가두는 시간의 집이다. 그렇게 흐릿한 사진 속 존재는 흔적 뒤편으로 사라진다. 아니면 머잖아 흔적마저 희미해져 흔적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사진은 우울하게 만들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체가 된다. 애도의 형식이 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진 속에는 분명, 엄연히, 돌이킬 수 없이 존재하는(그러므로 어쩌면 존재했었던), 역설의 형식이 된다. 

흐릿한 사진은 또 있는데, 흐릿하다기보다는 핀이 나간 듯 초점이 흔들린 듯한 사진이다. 둘 이상의 다른 시간대에 속한 사진 필름을 하나로 겹쳐 찍은 사진들이다. 예컨대 유년의 그와 청년의 그가, 아니면 청년의 그와 노년의 그가 겹쳐진 사진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다른 시간대에 속한 그의 사진 필름들을 하나로 겹쳐서 보여주는가. 작가가 겹쳐 찍은 사진들은 주체가 무엇이냐는 오랜 물음을 물어온다. 나는 누구이며 누구였던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을 묻게 만든다. 


자크 데리다는 하나의 의미란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연기될 뿐, 궁극적인, 최종적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 없다고 했고, 그걸 차연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차연을 주체론에 적용해 보면, 하나의 주체란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지나갈 뿐(과거 속으로 흘러 들어갈 뿐), 궁극적인, 최종적인, 다름 아닌 주체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는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둘이 아니라 아무리 많은 사진을 겹쳐 찍어도 주체는, 주체라는 실체는 분명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더 불명확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가 하면 주체론과 관련해 흥미로운 경우로서, 롤랑 바르트의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도 있다. 옛날 양피지가 종이를 대신하던 시절이 있었다. 양피지 위에 주체가 무엇이라고 쓴다. 그리고 다시 그 무엇을 다른 무엇으로 고쳐 쓴다. 그리고 그렇게 쓰고 고쳐 쓰기를 밑도 끝도 없이 반복한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통해서 주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졌는가. 여기서 주체란 양피지 위에 최종적으로 기술된 것인가. 모르긴 해도 그마저도 다시 고쳐 쓰여질 수 있을 것인데. 그리고 그렇게 고쳐 쓰기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것들, 흔적으로도 남지 않은 것들의 총합이 주체가 아닐까. 최소한 주체에 가까운 정답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롤랑 바르트의 사이_존재 역시 같은 의미가 아닐까. 존재란 과거의 나와 현재하는 나 사이에 존재하고, 부재 하는 나와 현존하는 나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이_존재란 어쩌면 존재들의 총합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다시, 그러므로 존재란 처음부터 다존재였고, 주체 역시 그렇다. 그렇게 둘 이상의 사진 필름을 겹쳐 찍은 작가의 사진은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주체, 흔적으로도 남지 않은 주체, 사이_존재 그러므로 존재들의 총합, 다존재와 다주체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로, 환상주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한 소설에서 현재하는 내가 과거 속의 나를 찾아서 떠나는, 그리고 실제로도 서로 재회하는 상황 논리를 예시해준다. 환상주의지만, 환상이 아니다. 실제로도 우리는 모두 곧잘 과거의 나와 재회하고 있지 않은가. 더러 과거의 나를 되불러오지 않는가. 그렇게 소설 속에서 과거 속의 나는 타자로, 일종의 자기_타자로서 제시된다. 공교롭게도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서 롤랑 바르트 역시 자기를 타자화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과거 속의 나라는 분신과 더불어 살고, 자기_타자라는 그림자와 함께 산다. 다시, 그렇게 나는 결코 그 분신 없이 사는 것, 자기_타자 없이 사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현재하는 나는 말하자면 과거 속의 내가 만들어준 것이고, 현존하는 나는 부재 하는 내가 형성시켜준 것이다. 다시, 그렇게 하나로 겹쳐 보이는 작가의 사진은 나의 분신, 나의 그림자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예시해준다. 


그렇게 작가는 까까머리 유년 시절에서부터 노년에 이른 현재의 자기를 포함하는 한 사람의,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 중 누구도 될 수 있는 한 사람의 사진들을 벽에 걸어서 보여준다. 그리고 또 다른 설치작업에서 작가는 그 사진들을 여러 장의 대형필름으로 만들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겹쳐서 보여준다. 한 사람의 삶의 궤적(그러므로 어쩌면 삶의 흔적, 존재의 흔적)을 하나의 이미지를 관통해 보여주는 것이면서, 시간에 박제된 존재의 흔적(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편린, 존재의 조각)을 예시해준다. 그러므로 관객은 그 흔적들 사이를 거닐면서 저마다의 사이_존재와 만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반) 투명 아크릴판 사이에 사진 필름을 넣어 고정한, 두 장 이상의 사진 필름을 하나로 중첩 시켜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하는 존재의 흔적을 한 장으로 겹쳐 찍은 사진 작업의 또 다른 버전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아크릴판으로 상징되는 시간에 갇힌 박제된 존재를 표상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사진 필름들이 하나로 겹쳐 보이는 과정을 편집 제작한 영상작업도 있다. 스틸 화면에 바탕을 둔 작업이 정지된 시간에 박제된 존재의 순간을, 조각을, 편린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진 속에는 분명, 엄연히, 돌이킬 수 없이 존재하는(그러므로 어쩌면 존재했었던) 역설의 형식을 제안하고 있다면, 영상작업은 흐르는 시간 속에 무상한 존재를 떠올리는 애도의 형식을 예시해준다(시간도, 존재도, 흐르는 것들은 모두 무상하다). 

<가려진 존재>(그러므로 어쩌면 롤랑 바르트의 사이_존재와도 통하는)로 나타난 주제 의식으로 치자면 이 일련의 작업은 전작에서의 주제 의식과도 통한다. 이를테면 <또 다른 너의 존재>(2008)가 그렇고, <규정과 무규정의 사이>(2012)가 그렇다. 존재란 언제나 일정 정도 가려진 존재다. 자기를 살면서 동시에 자기_타자(자기 분신과 그림자)를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기_타자는 또 다른 너(그러므로 나)의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언제나 일정 정도 규정과 무규정 사이를 오갈 것이다. 

그 무규정자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질 들뢰즈는 어떠한 전제도 없이 자기 발생적 사유를 강요해오는 기호라고 불렀고, 롤랑 바르트는 화살처럼 나를 꿰뚫는(그러므로 푼크툼?), 코드가 부재 하는 그러므로 읽을 수가 없는,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발견한 이해 불능의 상형문자 그러므로 어쩌면 트라우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기에 <아르케>(2014)가 있다.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를 소재로 한, 숲이 품고 있는 정기 같기도, 영적 기운 같기도 한, 마치 가려진 존재에서처럼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된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작업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전작에서의 주제 의식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심화한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리어왕은 절규했다. 존재론을 묻는 순간, 예술은 철학이 되었다. 감각을 도구로 묻는 감각 철학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진을 매개로 한 작가의 일련의 작업은 자기_타자를 매개로 존재론을 되불러오고 거대 담론을 소환한다. 나는 누구인가. 불교에서는 진아라고 했고 무아라고 했다. 내가 없는 것이 진짜 나라는 역설이다. 세속적인 말로 치자면 욕망이 없는 상태다. 프로이트는 존재를 욕망이라고 불렀는데, 그러므로 역설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어쩌면 감각 철학으로서의 예술은 감각을 도구로 이런 역설을 돌파하는 기술 그러므로 역설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사진 설치작업은 그렇게 저마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존재론적 물음을 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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