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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산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서

고충환



명작 산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서 



미술사는 크게 양식사로서의 미술사(하인리히 뵐플린),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막스 드보르작), 도상학으로서의 미술사(에르빈 파노프스키), 그리고 작가사로서의 미술사(조르조 바자리)로 나뉜다. 양식사로서의 미술사는 당대의 지배적인 시대 양식과 형식, 모드와 스타일 위주로 미술사를 기술하는 방식이며,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는 미술사를 다름 아닌 이념과 정신의 역사로 보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예술을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본 헤겔과도 통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도상학으로서의 미술사는 미술을 상징의 일종으로 보는 입장으로서, 동양의 불교미술에서처럼 주로 작가가 무명씨로 알려진 중세 기독교미술과 통하고, 여기에 상징을 기호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기호학과도 통한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사로서의 미술사가 있다. 양식과 정신과 도상이 유래한 원천에 주목하고, 그 원천에 해당하는 창작 주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란 점에서 다른 경우들과는 구별된다. 한편으로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고 창작 주체를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반영이론이고 거울 이론이다. 이처럼 예술은 무엇보다도 창작 주체를 반영하는, 창작 주체의 산물이다. 저자 혹은 작가의 죽음과 관련한 일부 현대미술 담론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술가 신화에는 흔들릴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녹슬지 않는 견고한 사실이 있고 실재가 있다. 예술사란 말하자면 예술가 신화의 역사다. 보들레르는 예술가를 살아있는 예술, 걸어 다니는 예술이라고 했고, 여기에 흔히 예술가는 별종이고 4차원이라는 우스갯소리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예술가 자체가 이미 신화다. 예술가가 없으면 양식도 없고 정신도 없고 도상도 없다. 여기에 물론 보통 사람의 차원을 넘어서는 별종도 없고 4차원도 없다. 

명작은 어디서 생산되는가, 그러므로 누구로부터 유래하는가, 라고 명작 산실은 묻는다. 명작은 골방처럼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작업실에서 소리소문없이 잉태되고, 그 집을 지키는 자발적으로 고독한 작가에 의해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명작 산실은 세상과 동떨어진 채, 어쩌면 일부러 거리를 유지한 채, 저 홀로 치열한 작업실과 그 주인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란 점에서, 그 주인을 세상 바깥으로 끌어낸 것이란 점에서, 그러므로 작가사로서의 미술사를 복원하고 실천한 것이란 점에서 각별하다. 

작업이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이다(김영세). 작가는 개인적으로 될 때 비로소 작가가 될 수 있다(김영환). 완벽한 것은 마네킹과 같고 살아있는 것에는 정형이 없다, 아름다움은 육신이 아닌 영혼에 있는 만큼 영혼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최태화).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다,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전체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김영진). 작가는 보통의 의미에서의 사회 구성원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혼자 가야 한다(리우). 

예술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이미 알려진 것들이다. 진부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고, 진정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육성은 이런 진부한 이야기,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부한 이야기 속에 깃든 진정성으로 화들짝 각성시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명작 산실은 어쩌면 지금까지 메아리 없이 외로웠을 그 이야기에 깃든 생생한 예술혼을 채집하고, 아카이빙하고, 전시로까지 성사시킨다는 점에, 그러므로 어쩌면 미술사를 재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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