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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수/ 감각 할 수 없는 차이를 감각 하는, 그러므로 어쩌면 공과 허와 무를 예감하는

고충환



김이수/ 감각 할 수 없는 차이를 감각 하는, 
        그러므로 어쩌면 공과 허와 무를 예감하는 



수평선은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공간의 경계선이고, 석양은 빛과 바람을 삼키는 시간의 경계선이다. 나는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시간이 흐른다. 시시각각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공기와 빛의 파장, 나는 그 경이의 풍경을 붙잡는다. 공기와 빛은 바스러져 수평선으로 밀려 들어간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선 너머로 잘게 갈라지는 풍경 속의 풍경, 그 미세한 차이의 풍경을 본다...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경계의 풍경...나의 작업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간극을 찾아내 현재에 호출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 


김이수의 그림은, 엄밀하게는 그림이라기보다는 화면은 아득한, 막막한,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 앞에 서게 만든다. 그 수평선이 끝나는 지점에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다. 수평선이라고는 하지만,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선을 수평선이라고 이해한다면, 사실 수평선은 바다 위 도처에 있다. 그러므로 수평선이라고 지각하는 선 혹은 수평선이라고 부르는 선은 사실은 그렇게 바다 위 도처에 있는 수평선들이 천 겹의 주름으로 중첩되고 포개지면서 하나의 선으로 지각되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착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는 다만 수평선들이 있을 뿐, 정작 그 수평선이 끝나는 지점 같은 것은 없다. 다시, 그러므로 수평선은 사실은 끝이 없고 경계도 없다. 

그렇게 천 겹의 주름으로 중첩되고 포개지는 풍경을 작가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선 너머로 잘게 갈라지는 풍경, 풍경 속의 풍경(선 속의 선)이라고 부르고, 차이의 풍경, 그러므로 차경이라고 부른다. 차경? 여기서 차경은 자크 데리다의 차연을 연상시킨다. 모든 의미는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연기될 뿐, 궁극적인, 최종적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다.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수평선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선 너머로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잘게 갈라질 뿐,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수평선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은 결코 붙잡을 수가 없다. 작가는 그렇게 끊임없이 잘게 갈라지는 선을, 그러므로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선을 붙잡는다는, 어쩌면 불가능한 기획을 실천한다. 예술이란 이처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기획을 실천하는 것, 비록 논리로는 모순이지만 감각으로 표현 가능한 기획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작가의 기획은 예술의 정의를 재확인하고 재정의하게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이처럼 끝도 없고 경계도 없는 풍경을 경이의 풍경이라고 부른다. 왜 경이의 풍경인가. 사실 해묵은 전설처럼 아득한 일이 되었지만, 원래 풍경,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은 경이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유한한 인간을 초월하는 대상이었고, 그러므로 어쩌면 신이었다. 경계에서 본, 엄밀하게는 없는 경계에서 본 존재가 신이 아닌 다른 무엇일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계 너머로 본, 파스칼의 신과도 다르지 않다. 낭만주의 철학자 칸트에게서 되살아나고, 후기모더니즘의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게서 재조명된, 그리고 화가로 치자면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지지하기 위해 호출된 숭고 개념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마크 로스코는 말년에 자신의 그림으로 꾸민 채플(교회)을 꿈꾸었다. 그러므로 로스코에게 숭고는 그림과 종교의 상관성을 의식한 개념이었다. 

그림과 종교의 상관성? 공교롭게도 발터 벤야민 역시 그림 그러므로 예술의 특수성을 언급하면서 중세 이콘화를 예로 든 적이 있다. 그림이든 이콘화든 거기서 찾아낸 종교란 사실은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림으로 화한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렇게 그림으로 육화된 정신을 아우라라고 부른다. 사실은 멀리 있는 것인데,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다. 사실은 관념적인 대상인데, 흡사 감각적인 대상처럼 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이다. 어떻게 그런가. 분위기다. 암시다. 플라톤으로 치자면 상기다. 그렇게 작가는 분위기를 통해서, 암시를 통해서, 상기를 통해서 그 자체 종교적인 감정 또는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은 풍경, 경이의 풍경, 숭고의 풍경, 그러므로 경계 없는 풍경을 경계 위로 불러낸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경계 없는 풍경을 그리는가. 사실 작가의 그림은 그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사실은 그리지 않은 그림, 만들고 구축하는 화면, 그러므로 구조적인 회화에 가깝다. 처음에 작가는 석고붕대 위에 석회를 발라 판을 만들고 그 위에 연필로 드로잉을 했다. 드로잉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우연한 흔적이나 스크래치에 가깝다. 여기에 비정형의 가장자리는 여차하면 부서질까 아슬아슬하다. 아마도 너무 섬세해서 잘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 상처를, 외상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상처가 꼭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실리콘으로 합판의 결 그대로를 떠냈다. 이번에도 역시 상처를 떠냈다. 모든 풍경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인 상처를, 정치적인 상처를, 사회적인 상처를, 그리고 존재론적인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그 자체 작은 풍경인 사물 역시 저마다 상처를 기억하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경계를 그리기 전에, 경계 없는 풍경으로 넘어가기 전에 풍경의, 사물의, 존재의 상처를 먼저 그렸다. 

그리고 작가는 합판 위에 종이를 층이 지게 쌓아 올렸다. 종이 위에 종이가 중첩되고 포개지면서 그렇게 맞닿는 지점마다 선이 생기고 경계가 생겼다. 그러나 그 선은 그리고 경계는 상처와 마찬가지로 너무 섬세해서 잘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다. 비록 상처의 풍경에서 경계의 풍경으로 건너왔지만, 섬세한, 여릿한, 희박한, 박약한, 겨우 존재하는, 아니면 마찬가지 의미지만 그 실체가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존재론적 조건(그저 사물이라고 해도 좋고, 매체의 질료 그러므로 매질이라고 해도 좋을)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감성은 여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은 외관상 드러나 보이는 형식 요소 이전에, 매체의 질료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감성 자체가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에서 결정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림에 빛을 도입한다. 석회 대신, 그리고 합판 대신 아크릴 보드에 반투명 종이 트레이싱 페이퍼를 마찬가지 방법으로 층이 지게 쌓는다. 지지대도 종이도 반투명한 탓에 빛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감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유백색 화면이 지배적인 가운데, 작가의 색채감정은 가급적 최소한으로 절제되는데, 설핏 청색 기운을 머금은, 색채라기보다는 색조가 은근하고 아득한 느낌을 준다. 투명한 깊이를 내재한 색의 기운, 빛이 정조(정서적 환기)로 화해진 색조라고 해야 할까. 깊이가 됐든 넓이가 됐든 그 끝을 알 수 없는 경계, 경계 없는 경계, 중첩되고 포개지는 경계, 흔들리는 경계, 차라리 미세하게 떨리는 경계에 적절한 물적 형식을 위해 작가가 찾아낸 빛의 질료이며 색의 감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일종의 막간에 해당하는 작업으로, 때로 반투명한 아크릴 박스 뒤로 보이는, 색실을 중첩 시켜 레이어를 만든 다층구조의 작업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색의 질료를 확장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흔들리는 경계, 떨리는 경계, 그러므로 마치 신기루처럼 환영(환각?)을 불러일으키는 경계를 또 다른 형식으로 심화한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트레이싱 페이퍼는 그 표면에 아크릴을 바른 반투명 테이프로 바뀐다. 석회와 종이를 소재로 한 종전 작업에서 재료의 물성에 주목했다면(이를테면 유백색의 색채감정과 함께, 비정형의 가장자리나 터실터실한 표면 같은), 이후 작업, 즉 트레이싱 페이퍼와 반투명 테이프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는 재료의 물성보다는 빛과 색의 상호작용과 이로부터 유래한 특유의 분위기와 같은, 좀 더 은근하고 섬세한 감각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크게는 물성에서 감각(차라리 감수성?)으로 작업의 무게중심이 옮겨왔다고 할 수도 있겠고, 보기에 따라선 물성이 감각적으로 더 심화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물성을 회화의 논리(회화의 자율성?), 질료의 논리에 속한다고 본다면, 감각과 감수성은 물성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입장에 가깝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기를 억제함으로써 사물 대상의 성질이 드러나게 돕는 것에서, 자기를 개입하고 매개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쪽으로 작업을 전개해 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기를 억제해 사물의 성질이 드러나게 돕는다? 미니멀리즘이다. 자기를 개입하고 매개시킨다? 후기 미니멀리즘이다. 

주지하다시피 미니멀리즘은 상황 논리에 강하다. 예술이 성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상황(도널드 저드의 경우에는 반복적인 구조)에서 찾는다.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상황(마이클 프리드의 연극적인 상황)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작품은 그저 일상에서 빠져나온 오브제(즉물적, 즉자적 오브제)일 뿐이다. 이처럼 일상과 겨우 구분될 뿐인, 그 상황(미니멀리즘의 일본판으로 볼 수도 있는 모노하의 용법으로는, 현상)에 작가적 개성이 매개될 일은 거의 없다. 미니멀리즘이란 말하자면 작가의 존재를 최소화한다(익명적인 작품과 저자의 죽음?)는 의미일 수 있다. 그렇게 미니멀리즘은 무표정한, 무덤덤한, 무미건조한, 가치중립적인, 모던한, 장식적인, 세련된 미술을 낳았다. 

그리고 후기 미니멀리즘이 미니멀리즘에서 배제된 작가의 존재를 다시 소환한다.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차이, 흔적과 자국, 시적 감성, 그리고 때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의해 추방된 재현과 서사의 암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렇게 재소환된 것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각과 감수성도 있다. 정리를 하자면, 한쪽 끝(미니멀리즘)에 도널드 저드가 있고, 다른 한쪽 끝(후기 미니멀리즘)에 아그네스 마틴이 있다. 그리고 칼 안드레가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이상의 사실을 근거로 유추해보자면, 작가의 작업은 외관상 평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하나의 질료와 함께, 쌓기라는 단순 반복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미니멀리즘에, 그러면서도 수평선이라는 풍경적인 요소를 암시하는 한편으로, 이로부터 어떤 정서적 환기를 꾀한다는 점에서 후기 미니멀리즘에 각각 맞물린다. 크게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확장하고 심화하면서, 미니멀리즘을 자기화하는 과정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단색화의 경우를 적용해도 그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데, 작가는 단색화 이후, 일군의 작가들과 함께 소위 후기 단색화로 분류되고 범주화된다. 

범주는 일종의 유형화 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그 자체가 특정 카테고리로 작가를 한정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작가의 계보를 밝혀준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계보란 미술사적 방법으로나 유용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현재진행형 작가에게 대놓고 적용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작업이 위치한 장(피에르 부르디외)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최근작에서 작가는 바탕화면 위에 층층이 쌓아 올린 테이프를 떼 낸다. 테이프를 붙였다가 도로 떼 내면서 남긴 자국과 흔적으로 테이프를 대신한 것이다. 여기서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테이프를 도입한 이유를 복기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반투명한 테이프를 도입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빛과 색의 상호작용과 그로부터 유래한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가 그 속에 빛의 기운을 머금은 투명한 깊이를, 끝 모를 깊이를, 유백색의 깊이를, 하얀 깊이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 앞에, 천 겹의 주름으로 포개지고 중첩된 수평선 앞에, 어쩌면 실재하는 바다보다는 실재하는 바다로부터 추상 된 내면의 바다 앞에 서게 만든다.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사라질 듯 아스라한 풍경, 시간과 공간의 경계선 너머로 잘게 갈라지는 풍경 속의 풍경(중첩되는 선들의 풍경)을 상기시키고, 경계 위의 풍경, 경계 없는 풍경을 암시하고, 흔들리는 경계, 차라리 섬세하게 떠는 경계 앞에 서게 만든다. 

작가의 작업에서 결정적이랄 수 있는 개인적인 감각과 감수성의 섬세한 차이가 여기에 다 있는데, 그렇다면 작가는 이것들을 뒤로 한 채 또 다른 작업으로 옮겨가는, 자기 변신을 시도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앞서 작가의 작업은 크게 물성에서 감각으로 옮겨간 것으로 볼 수 있고, 사실은 물성이 감각적으로 심화된 경우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근작에서의 작가의 변신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얘기를 할 수가 있겠다. 

어쩌면 테이프는 작가의 작업에서 마지막 남은 물성일 수 있고, 작가는 근작에서 테이프를 제거해 그 마지막 남은 물성의 잔재마저 털어 버린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물성은 최소한의 자국과 흔적 속에, 더 섬세해진 만큼 더 잘 숨을 수 있는 투명한 깊이 속에, 감각 속에 살아남았다. 최소한의 자국과 흔적에도 불구하고(기실 그것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근작에서 물성은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희미해진 기억이나 관념으로 겨우 상기하는 형태로나 남겨진 것 같다. 다시, 그래서 화면은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 같고, 그렇게 순수한 관념의 표상 같다. 

다만 그뿐 일 것인가. 그렇다면 그림 속에 남아있는 감각은 없는가. 여기서 잔영과 잔상, 여운과 기미와 같은, 그 존재 방식이 더 애매한 것들을 지시하기 위한 개념들이 호출된다.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귓전에 맴도는 소리가 있다.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보인다고, 생각하는 형상이 있다. 무엇이 그 소리를 그리고 형상을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게 만드는가. 그것은 사실 착각이다. 관념으로 편입된 감각이다. 어쩌면 관념으로 편입되기 직전, 감각의 끝자락이다. 그리고 듣고 싶다는 욕망이, 보고 싶다는 그리움이 그 감각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착각은 알고 보면 절실함이다. 절실함이 없으면 착각도 없고 환영도 없고 섬세한 감각도 없다. 감각을 관념으로 표상하기는 쉽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물성 속에서, 물성을 통해서, 물성을 간직한 채로 감각을 증명하는 일이고,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낸 작가의 작업은 그 증명에 성공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앵프라맹스_풍경>(Inframince_Landscape)이라고 부른다. 마르셀 뒤샹에서 유래한 이 말은 감각 하기 어려운 미세한 차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감각 할 수 없는 차이가 그려낸 풍경, 감각 할 수 없는 차이로부터 찾아낸 풍경 정도를 의미하겠다. 마침내 작가의 감각이 감각 할 수 없는 차이를 파고들 지경에 이른 것 같다. 그러므로 어쩌면 바다와 수평선 같은 재현적 대상은 다만 구실일 뿐, 작가의 진정한 대상은 감각 자체인 것 같다. 

그렇게 감각 자체와 씨름하는 작가의 화면은 설핏 텅 빈 것처럼 보인다. 선도 흐릿하고 색조도 희미하다. 있는 듯 없는 것 같고, 없으면서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 선이, 색조가 화면 속 하얀 깊이 속으로 수렴되는 것 같고, 그렇게 수렴되면서 사라지는 것 같다. 하얀 깊이 속으로 수렴되면서 사라진다? 그렇게 화면은 사라지면서 존재하는 것들,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증명하는 것들, 이를테면 공과 허와 무의 공간을 예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자체 공교롭게도 바다 끝에서 본 수평선이 불러일으키는 공간 경험과도 다르지 않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다시, 바다 끝에, 사실은 끝이 없는 끝에 들여다보이는 수평선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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