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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 풍경의 상처, 상처의 풍경

고충환


강유정/ 풍경의 상처, 상처의 풍경 



2015년 서울, 말뚝박기. 일제강점기 일제는 명산의 정상에 쇠못을 박았다. 정상을 정기가 모이는 정수리로 보고, 생명줄을 끊어놓으려 한 것이다. 그 역사적 상흔이 작가를 움직였다. 작가는 생명을 죽이는 그 폭력적 행위가 시공을 넘어 동시대에도 여전하다고 본다. 생명을 죽이는 상징적 행위가 개별주체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경우로 그 폭력의 종류가 달라졌을 뿐. 산을 오르다 보면 이런저런 말뚝을 볼 수가 있다. 대개는 울타리나 이정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그건 동시에 산행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도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울타리를 그리고 이정표를 그린다. 산 정상의 레이더 기지를 그리고, 성벽에 기생하듯 붙어있는 초소를 그린다. 일제가 박아놓은 쇠못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폭력적 현실은 숨어있다. 공공의 안녕과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 뒤에 은폐돼 있다. 그렇게 이데올로기에 은폐된 폭력적 현실을 미셀 푸코는 생물권력이라고 부른다. 그 현장은 자연을 넘어 생활 공간을 파고든다. 작가는 그렇게 산속에 숨어있는, 그리고 일상 속에 공공연한 폭력적 현실을 고발한다. 

2017년 제주, 역사.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가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유령이 돼 떠돈다. 아마도 생전에 충분히 위로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일제강점기 폭력적 현실은 제주 4.3사건으로 되돌아온다. 해안에 접해 있는 아득한 절벽 아래쪽에 의심스러운 구멍들이 보인다. 아마도 해안포를 설치하기 위해 일제가 파놓은 인공동굴일 것이다. 그렇게 모든 풍경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역사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어쩌면 존재론적인 상처를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작가는 일제강점기 폭력적 현장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당시 해안포 진지를 그리고, 격납고를 그리고, 참호를 그린다. 그리고 들풀을 태우는, 바닷바람으로 번져나가는 들불로 자욱한 연기를 그린다. 아마도 제주 4.3사건의 원혼들을 그린 것일 터이다. 그 자체 어느 정도 원혼들을 위무하는 재생과 치유의 불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반복되는 역사, 자꾸 되돌아오는 역사적 현실을 통해 역사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밤의 형상들. 그리고 작가는 야행을 한다. 야행을 하면서 밤 풍경을 그린다. 공원을 그리고 강변 풍경을 그린다. 가로수를 그리고 저 홀로 불 밝히고 서 있는 가로등을 그린다. 텅 빈 농구코트와 테니스코트를 그린다. 모든 알만한 사물들은 하나같이 실루엣으로 환원되면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힌다. 그렇게 어둠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알만한 사물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신한다. 같은 사물, 같은 풍경이지만 낮에 보는 풍경과 밤에 맞닥트리는 풍경은 이토록이나 다르고 이질적이다. 마치 하나의 풍경이 잠재하고 있던 다른 풍경을 보는 것 같다. 풍경의 타자다. 이처럼 모든 풍경은 자신의 한 본성으로서 타자를 품고 있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그 타자가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밤은 타자가 발현되는 시간, 타자가 자기를 실현하는 시간, 타자의 시간일 수 있다. 자연은 물론이거니와 도시에 이식된 자연, 나아가 인공물마저 자신이 유래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일 수 있다. 밤에 본 텅 빈 농구코트와 테니스코트가 불현듯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실루엣으로 화한 사물들 사이로 설핏 보이는 빛(아마도 밤이므로 조명)의 기미가,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조명을 받아 난반사되는, 표면에 야광 띠를 부착한 교통 통제기구일 하얀 원뿔 형태가 밤의 이질감과 낯섦 그리고 그로테스크를 증폭시킨다. 그렇게 작가는 풍경의 다른 한쪽 면을, 그러므로 어쩌면 풍경의 타자를 드러내 보인다. 

흑백. 작가의 그림에서 인상적인 것은 흑백 모노 톤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점이다. 그렇게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 수묵화처럼 보이고, 목탄화처럼도 보인다. 무채색의 풍경을 매개로 키아로스쿠로 곧 명암을 대비시켜 사물 대상의 세부를 표현하는 전통적 기법에 대한 형식실험을 꾀하고 있는 것. 여기에는 그저 형식실험 이상의 의미가 있다. 굳이 채색이 없이도 사물 대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고, 이보다는 채색화와는 다른, 어쩌면 혹 채색화가 간과하고 있을지도 모를 어떤 것, 이를테면 흑백 모노 톤 고유의 분위기 혹은 본성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게 뭔가. 흑백으로 그린 작가의 그림은 관념적으로 보이고 내면적으로 보인다. 낯설게 보이고 이질적으로 보인다. 문명에 추방된 자연이 되돌아오는 시간, 그렇게 귀환한 자연이 낯선 타자를 밀어 올리는 시간, 밤과 어둠의 시간 그러므로 어쩌면 영적 시간 고유의 아우라가 살아 숨 쉬는 것 같다(아우라에는 분위기와 함께 숨이라는 의미도 있다). 때로 그림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도 보이는데, 역사를 소환하고 기억을 환기하는 주제 의식에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채색이 없어서 오히려 더 오롯한, 빛과 어둠이 대비되거나 몸을 섞는 현상학적 풍경을 그린다. 

흙, 물, 불, 공기. 수면에 불꽃이 일렁인다(물과 불). 들풀을 태우며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번져나간다(흙과 불). 그 뒤편으로 연기가 피어오른다(공기).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폭죽이 터지고, 그렇게 튄 불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불과 공기). 그 잔해 중 일부가 수면 위로 낙하한다(다시, 물과 불). 그렇게 매번 되돌아오는 폭력적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역사를 소환한 작가는, 그리고 야경을 매개로 풍경의 이면 그러므로 풍경의 타자를 불러낸 작가는 근작에서 그 서사, 이를테면 역사적 서사, 밤의 서사 그러므로 어둠의 서사에 등장하는 원소 자체에, 현상 자체에, 질료 자체에 주목한다. 서사로부터 서사의 구성물질 쪽으로 주제 의식의 축이 옮겨왔다고 해야 할까.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관점으로 무게중심이 옮아왔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어쩌면 주제 의식의 자연스러운 진화과정으로도 보이는, 그러므로 상호 유기적인 관계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이는 그 관점에 붙잡힌 물질 그러므로 원소가 흙, 물, 불, 공기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흙, 물, 불, 공기는 그로부터 세계가 유래한 기원물질이며 최초의 원소로 알려져 있다. 이런 기원물질에 대한 신화는 동서가 다르지 않은데, 존재가 유래한 원형적 이미지에 끌린다는 점에서 향후 작가의 그림이 존재론으로 열리는, 그리고 그렇게 존재의 원형적 이미지를 파고드는 경우를 예감해봐도 좋을 것이다. 

신화. 신화는 이야기다. 이야기들의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가 그로부터 파생되었을 이야기들의 원형 그러므로 원형적 이야기다. 그 원형적 이야기 속에 원형적 이미지가 간직돼 있다(칼 융의 원형). 그리고 원형적 물질이 간직돼 있다(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이유가, 존재가 존재하는 이유가 보존돼 있다. 어떻게 삶이 죽음의 일부이며 죽음이 삶의 부분일 수 있는지, 물질이 어떻게 정신이 되고 또한 정신이 어떻게 물질로 환원되는지에 대한 답이 기다리고 있다. 정신의 논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질도 논리를 가지고 있다(질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 그렇게 오직 물질 그러므로 몸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답이다. 진즉에 작가가 풍경의 반쪽인 밤을 그리고, 칠흑 같은 바다 건너편에 섬광(아니면 무슨 계시)처럼 빛나는 하얀 수평선을 그리고, 포말을 하얀 거품으로 토해내는 검은 수면을 그리고, 찰나적인 빛으로 어둠 속으로 죽는 폭죽을 그린 이유가 따로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향후 작가가 혹 물질을 매개로, 물질(그러므로 어쩌면 감각)을 넘어 어둠 자체를 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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