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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기/ 자두, 상실된 고향을 일깨워주는

고충환




정창기/ 자두, 상실된 고향을 일깨워주는 





작가 정창기는 자두와 딸기를 그린다. 자두와 딸기의 특정 소재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소재주의로 볼 수 있겠다. 자두와 딸기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감각적으로 와닿는다는 점에서 감각적 사실주의로 볼 수 있겠고, 마치 실물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극사실주의 경향의 회화로 볼 수가 있겠다. 

소재주의라고 했다. 소재주의의 덕목은 단연 기술이다. 기술이 없으면 소재주의는 불가능하다. 무슨 기술인가. 핍진성이다. 실재와 그림의 차이가 지워지고 구별이 무색해지는 것인데, 그림이 이 지경에 이르기 위해선 기술이 있어야 하고 인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기술과 인내의 합작품이고, 노동집약적인 작업 과정의 산물이다. 기술이라고 했고, 인내라고 했고, 노동이라고 했다. 평소 작업을 대하는 작가의 정직한(그리고 성실한) 태도라고 해도 좋고, 작가의 작업을 뒷받침하는 에토스(작업의 윤리)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 자체 장인정신의 소환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실제로도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리는, 기본에 충실한 작업을 추구한다고 했다. 사실적인 그림이 대중과 소통하기도 쉽고, 그 간극(아마도 작가와 관객의 미적 취향의 차이)을 줄여주는 기법이라고도 했다. 예술은 소통의 기술이다. 더러 소통되지 않는 예술(예컨대 아도르노), 일부러 소통을 외면하는 예술(이를테면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한다는 불가능한 기획을 실천하는 예술)이 있지만, 적어도 작가는 그림을 매개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고,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그림으로 대중과의 차이를 줄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기술과 인내와 노동을 도구로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았고, 극사실주의 경향의 회화를 매개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자신만의 채널을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다만 잘 그린 그림, 기본이 충실한 그림일 뿐일 것인가. 핍진성 곧 영락없는 실물 그대로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일 뿐일 것인가. 앞서 작가의 그림은 감각적 사실주의라고 했고, 극사실주의라고도 했다. 여기서 감각적 사실주의란 실물을 통한 감각경험과 그림으로 재현된 감각경험이 차이가 없는 경우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실물을 제안하고, 또 다른 현실을 제시하는 경우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확장하는 경우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극사실주의는? 지극한 사실은 사실의 경계를 넘는다. 마찬가지로 사실과 현실의 차이를 간과하고 보면, 지극한 현실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다. 클로즈업(형식적으로)? 편집증(태도와 입장에서)? 클로즈업과 편집증은 말하자면 사실과 극사실 사이에 난 틈이고, 현실과 비현실을 가름하는 크랙이고, 작가의 간섭과 매개가 빛을 발하는 경계일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작가는 어떤 간섭과 매개로 사실의 경계를 넘는가. 그리고 그렇게 사실의 경계를 확장하는가. 작가는 회화적 사실주의를 매개로 그 경계를 넘는다. 회화적 사실주의?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사진적인 느낌보다는 회화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사실주의다. 보통 극사실주의는 사진적인 사실주의로 알려져 있다. 사진과 그림이 비교되는 것인데, 사진이 재현해 보여주는 그림(그리고 이미지)은 알려진 것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사진은 그림(그리고 이미지) 전체와 자체를 하나의 톤(그리고 분위기)으로 싸안는 경향이 있고, 그림 속 개체가 전체적인 톤에 파묻히는 경향이 있다. 사진적인 사실주의가 대개 플랫한 느낌을 주고, 세련되고 모던한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가 지향하는 회화적 사실주의는? 일종의 과장 화법인데, 실제보다 더 빨갛게(그리고 노랗게), 실제보다 더 오롯하게, 실제보다 더 투명하게, 실제보다 더 볼만 하고 먹음직하게 그려 그림 속 개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를 과장하는 것이며, 실제에 기생하면서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며, 실제를 숙주 삼아 감각을 확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작가는 노랑과 연두 그리고 빨간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채 스펙트럼을 포함하고 있어서 자두를 그린다고 했고, 빨간색이 주는 강렬함에 이끌려 딸기를 그린다고 했다. 빨간색에 더해, 자두가 다양한 색채의 폭을 가지고 있어서 자칫 단조로울 수도 있는(그러므로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그림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무슨 포인트나 되는 것처럼 부분적으로 잔 가지나 꼭지 끝에 달린 녹색 잎을 그려 넣어 생기를 더한다. 

여기에 더해, 특히 자두가 가지고 있는 투명성에 주목하고 싶다. 알다시피 자두는 외피가 얇고, 얇은 외피 속에 반투명한 속살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빛이 관통하면서 마치 스스로 투명성을 머금고 있는 것 같은 특유의 감각적 느낌을 준다. 그 느낌에 비해 보면 다른 과일들은 그 색깔이 거의 불투명한 피막처럼 보일 정도이다. 작가 역시 그 느낌에 매료되었을 것이고, 실제 그림에도 그 매료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이 감각적 쾌감을 준다. 

그리고 회화적 사실주의는 연출을 통해서도 실현(그리고 실험)된다. 처음에 작가는 정면성의 법칙을 적용해 그렸다. 소쿠리나 바구니 그리고 도기 소재의 쟁반에 가득 담긴 자두를 직각으로 내려다보고 그렸는데, 아마도 가능한 주관적 해석을 배제한 채 사물 대상(그러므로 어쩌면 세계) 자체와 직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점차 시점에 변화를 주면서 일상 시점을 적용해 그렸다. 그리고 때로 화면 가득히 자두가 빼곡한 풀사이즈로 그리기도 했다. 

시점에 변화를 주면서 그림의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 것인데, 일상 그대로의 시점이 자연스러운, 그래서 친근한 느낌을 준다면, 일상에서 벗어난 시점, 이를테면 직각으로 내려다본다거나 특히 풀사이즈로 그렸을 때 그림은 상대적으로 더 현대적이고 회화적으로 각색된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일종의 사물 초상화로 불러도 될 어떤 차원을 예감하게도 된다. 사실 사실주의 그림에서 현실을 회화적으로 연출하고 각색할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는 편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작가는 시점 변화로 그 한계를 나름 타개해나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작가의 말을 소환해보자. 사람들은 과일이라는 소재가 주는 보편성과 붉은색이라는 강렬한 이미지에 끌리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붉은 과일이 풍성하게 담겨있는 데서 고향의 정겨움, 푸근함, 넉넉한 인심을 느끼는 것 같다고도 했다. 개별적인 경험을 보편화하는 것, 개인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보아내는 것에서 예술은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자두와 딸기 같은 과일에서 작가가 느낀 감정 자체는 작가에게 속한 것이지만, 동시에 보는 이에게도 쉽게 공감을 주고 보편성을 얻는다. 그렇게 고향의 정겨움, 푸근함, 넉넉한 인심은 작가의 감정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보편감정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 보편감정은 현실적인 감정, 현실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어쩌면 부재를 되불러오는 감정, 상실된 것을 그리워하는 감정, 과거로부터 길어낸 감정, 희미한 기억의 그림자와 함께 소환된 감정일 수 있다. 좀 극적으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유년을 상실하고, 원형(존재의 근원)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서 고향은 지리적 고향이라기보다는 마음속 고향을 의미하며, 그렇게 현대인은 마음속 고향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자두와 딸기를 소재로 그린 작가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실된 고향을 일깨워주고, 고향의 정겨움, 푸근함, 넉넉한 인심을 회상하고 추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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