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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프롤, 비극적 영혼의 화신

고충환




릭 프롤, 비극적 영혼의 화신 





릭 프롤의 그림은 살인, 폭력, 린치, 마약, 섹스, 중독, 죽음, 그리고 분노와 고통만이 유일한 현실인 양 온통 암울하고 어둡다. 미래를 저당 잡힌 세대 감정을 보는 것 같고, 세계를 상실한 시대 감정을 보는 것도 같다. 코믹하게 각색된 유머에도 불구하고, 청춘에게 허락된 유일한 몸짓인 저항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는 것이 태생적으로 비극적 영혼의 소유자 같기도 하다. 그에게 그림은 현실에 대한 증언인가, 아니면 내면에서 분기된 환상을 그린 것인가. 그는 피폐한 시대를 직면한 리얼리스트인가, 아니면 지리멸렬한 세계와 한 몸으로 해체되고 산화한 정신분열증적 환상주의자인가. 질 들뢰즈는 정신분열증적 분석을 편집증에 대비시켰다. 형식논리로 치자면 형식과 탈형식, 구축과 해체의 대비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탈의 논리를 예술기계 곧 예술가의 선천적인 기질이라고 했다. 정신분열증적 분석은 말하자면 파편화된 세계를 읽고, 반응하고, 종합하는 예술가의 타고난 자질이다. 

왜 이렇게 어두운가. 왜 이렇게 암울한가. 사실 이처럼 어둡고 암울한 작가의 그림은 꼭 낯설지만은 않다. 한눈에도 작가의 그림은 독일 표현주의를 떠올리게 만든다. 전후 독일의 피폐한 시대 상황을 거리를 지나치는 몽유병자와도 같은 사람들에 빗대어 그린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나, 신화적인 알레고리로 각색한 막스 베커만 같은. 혹자는 표현주의가 특정 시기에 한정되기보다는 어둡고 암울한 시대라면 언제든 또 다른 버전으로 되돌아오는 열린 형식이며 양식이라고 했다. 환경결정론과 주정주의를 반영한 입장이다. 그렇게 독일 표현주의는 시공을 넘어 신표현주의로 부활했고, 다시금 198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로 되돌아온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는 정치적으로 암울했고, 예술적으로 황금기였다. 시대가 암울할수록 예술은 오히려 발전한다는(시대를 반성하는 예술?) 역설 아닌 역설을 증명한 시기였다. 

한국인으로서 당시 뉴욕의 정치적 현실이 어떠했는지 소상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레이건 행정부 당시 미국 본토 예술가들이 느끼는 시대 감정은 꽤 암울했던 것 같다. 미국과 러시아가 핵을 두고 대립하던 냉전 시대였고, 실직과 높은 범죄율, 약물중독과 에이즈가 창궐하던 시대였고, 냉소와 허무가, 적극적인 저항보다는 개인적인 모드로 저항을 대신했던 펑크적 감성이 지배적인 시대였다. 그렇게 장 미셀 바스키아가 1988년 약물중독으로 사망했고, 키스 해링이 1990년 에이즈로 사망했고, 데이비드 워나로비치 역시 1992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특히 워나로비치는 1987년 액트업을 설립했는데, 에이즈 관련 정책 수립을 촉구하기 위한 단체였다고 한다. 형식적으로 1980년대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아트신은 그 스펙트럼이 넓은데, 팝아트와 펑키 스타일, 퀴어적 감수성과 코믹, 스트리트아트와 그라피티 아트를 아우르는 것이었고, 그 와중에 비극적 영혼의 화신 릭 프롤도 있었다. 

릭 프롤은 1980년 뉴욕 쿠퍼 유니언을 졸업(순수미술 전공)한 직후인 1982년 장 미셀 바스키아를 처음 만나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곧잘 두 작가가 비교되기도 한다. 두 작가가 형식적 유사성이 있으면서도, 릭 프롤 쪽이 상대적으로 더 자기 파괴적이고(아마도 자화상을 그린,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온몸에 칼을 맞고 있다), 내면적이고(작가의 그림은 대개 밀폐된 방구석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자체 작가의 내면 풍경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비극적 세계감정(그 내면 풍경에는 성한 유리창이 하나 없다)이 지배적이다. 특히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주제 <깨진 유리창>은 그대로 작가의 시대 감정이며 세계감정의 표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도 작가는 캔버스 그림과 함께 깨진 유리 창틀과 문짝과 폐가구 등 각종 생활 오브제 위에도 그림을 그렸는데, 발견된 오브제와 함께 스트리트아트를 실천한 경우로 보인다. 

이외에 인상적인 경우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깨 위에 시체를 둘러업고 있다. 아마도 작가가 업고 있는 그 주검은 예술가 동료들의 주검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의 주검(그림자? 분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 작가의 시대 감정이며 세계감정을 표상하는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은밀하게, 아니면 차라리 공공연하게 세계(그러므로 어쩌면 예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에서 비장감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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