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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진달래꽃잎, 존재의 원형을 그리워하는

고충환




김정수/ 진달래꽃잎, 존재의 원형을 그리워하는 



옛날에 어머니들은 동산 지천으로 깔린 아름다운 진달래꽃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을까.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볼 수 있었고, 먹을 수도 있었던 진달래꽃을 따서 소복이 바구니에 넣고, 하늘에 뿌리며, 우리 집안 우리 자식 잘되게 해달라고 축복해달라고 빌었을 기원 속 진달래는 바로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다. 근현대사의 뒤안길에서 헌신하고 희생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작가 노트). 

정체성, 문명의 이기와 김수희의 애모 사이. 1980년대 국내 화단은 모노크롬을 중심으로 한 제도권 미술과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한 비제도권 미술이, 그리고 여기에 전위를 표방하는 제3의 미술 지대가 첨예하게 맞섰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 와중에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은 작가 김정수는 입체미술과 전위예술 그리고 비구상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미술 현장에 일원으로 합류한다는 포부를 안고 1980년대 초 도불을 감행한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확인한 바로는 여전히 평면이 대세였다. 여기에 작가는 현대 문명을 대변하는 TV며 폐기된 PC를 소재로 한 문명 비판적인 평면작업으로 호평을 받았고, 유명 갤러리의 전속작가로 활동한 지 3년 만에 프랑스 영주권을 취득했다. 그렇게 반쯤 프랑스인으로 살아도 좋겠거니 했다. 그러던 차에 전시 협의를 위해 국내에 들렀다가 지나는 길에 우연히 김수희의 <애모>를 처음 듣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한국인 고유의 유전자 정보가 새겨져 있음을 절감한다. 정체성 문제에 맞닥트린 것이다. 그리고 세계적인 작가 대신 한국적인 작가로 남기로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소재가 진달래꽃이었다. 환경결정론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만, 정체성에도 국적이 있다. 중국이 대륙적인 기질을 선호한다면, 일본은 장식적인 미감이 강하다. 반면 한국은 소박하고 수더분한 것이 자연의 성정을 닮았다. 있는 듯 없는 듯 굳이 자기 존재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은근하게 존재감을 발산하는 것이 꼭 진달래꽃을 닮았다. 그렇게 작가에게 진달래꽃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닮았고,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을 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닮았다. 여기서 닮았다는 것은 개념으로 환원하자면 표상이 될 것이고, 정서로 치자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진달래꽃을 매개로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을 표상하는 한편, 어머니(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소환한다.
 

진달래꽃, 철쭉과 벚꽃 사이. 그렇게 작가는 진달래꽃을 그렸다. 처음엔 풍경을 배경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소쿠리에 소복한 진달래꽃을 그렸다. 풍경으로 치자면 화면 아래쪽에 좁고 길게 드러누운 들판을, 판잣집 동네와 도시의 정경을, 그리고 냇가에 총총한 돌 징검다리를 배경으로 그려 넣었는데,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늘과 상대적으로 작은 면적만을 차지하는 풍경과의 대비가 실제보다 더 멀고 아득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부재를 다시금 존재 위로 되불러오는 기억의 소환이며 그리움의 환기를 위한 최적의 구도로 봐도 좋을 것이다. 

기억의 소환? 그리움의 환기? 작가의 그림은 현실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기억을 그린 것이고 그리움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을 연상시키는 모노 톤의 화면이 이렇듯 멀고, 아득하고, 아스라한 느낌을 더한다. 그렇게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시간을 되돌려놓은 듯, 흡사 기억을 재생한 것처럼 흐릿한 풍경 위로 진달래꽃잎이 하늘거리며 떨어진다. 큰 화면(그리움의 크기?) 탓에 더 먼(그리움의 거리?) 곳에서 온 것처럼 진달래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그렇게 작가는 도시 위로, 풍경 위로 흩날리는 진달래꽃잎을 그리다가, 이후 점차 소쿠리에 소복한 진달래꽃잎을 그린다. 옛날에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지천으로 핀 진달래꽃잎을 소쿠리에 한가득 담아내곤 했던 어머니의 추억을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그 생긴 꼴이 예사롭지 않다. 소쿠리에 소복한 진달래꽃잎이 꼭 놋쇠 주발에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을 연상시키는 것이, 흡사 꽃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냥 밥도 아닌 꽃밥을 고봉으로 담아낸 것에서 어머니의 차고 넘치는 자식 사랑을 알겠고,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그리움의 크기를 알겠다. 

이 일련의 그림에서 핵심적인 것이, 어쩌면 김정수 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 다름 아닌 진달래꽃잎 색깔(어쩌면 그저 색깔이라기보다는 색조? 분위기?)이다. 미묘한 어쩌면 섬세한 연분홍빛인데, 조금만 짙어도 철쭉이 되고, 연하면 벚꽃이 되고 만다. 색깔이라기보다는 빛깔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데, 빛을 머금은 색깔, 빛의 기운을 환원한 색깔이다. 빛을 머금은 속살과 표면에서 아롱거리는 빛의 유희가 하나로 어우러진, 어쩌면 어린아이 속살같이 (반) 투명한 색깔이다. 작가의 지난한 실험과 감각이 찾아낸 색깔이다. 색깔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는 창백한 표정의 하얀 캔버스 대신 거뭇거뭇한 아사 천(아마포) 위에 그림을 그리는데, 바탕 재 그대로의 색감이며 질감이 흙의 색감을 닮았고 땅의 질감을 닮았다. 그 질감이며 색감이 자연의 성정을 닮아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다. 


미디어아트,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옛날에 시인들은 노트를 가지고 다녔다. 날아다니는 시어를 날아가 버리기 전에 붙잡아둘 요량이었다. 그 노트가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바뀌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도구도 바뀐 것이다. 화가도 마찬가지. 언젠가부터 작가는 캔버스 대신 스마트폰에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 뛰어난 명암비와 색 재현력에 기반한 만큼 평면 회화만큼의 밀도감과 함께, 여기에 평면과 마찬가지로 따로 에디션이 없어서 평면 회화와는 또 다른 원본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게 작가는 근작에서 영상 미디어 작업을 제안한다. 평면화면에 박제된 진달래꽃잎이 실제로 흩날린다거나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 평면 회화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고, 정중동과 같은 관조적인 느낌을 더한다. 아마도 앞으로도 한동안은 평면 회화와 함께 또 다른 미디어 작업이 병행되는 것으로, 그리고 그렇게 또 다른 감각세계를 열어 보이는 것으로 기대를 해봐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문학적이다. 그림 속에 서사가 있고, 사연이 있다. 저마다 그림 속 서사에 쉽게 감정 이입하게 하고, 그림 속 사연에 공감하게 만든다. 작가의 그림이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서사적인 작업에서 주제는 작가의 그림을 이해하고 해석하게 해주는 또 다른 단서가 된다. 

이 땅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기억의 저편, 그리고 근작에서의 축복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붙인 주제를 보면 비록 표면적으로는 다를지 모르나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하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진달래꽃을 매개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이고, 기억 저편으로부터 그 그리움을 소환하는 것이며, 생전(그리고 어쩌면 사후에서마저도 여전한) 어머니의 축복을 오마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그 어머니는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어쩌면 저마다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그리움의 원형이며 존재의 원형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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