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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생태예술 포럼_지구가 품은 예술 2부

고충환

순천 생태예술 포럼_지구가 품은 예술 2부

작가 연구/ 생태예술_도시의 경우 

금혜원. <Blue Territory>. 재개발 내지는 재건축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푸른 비닐 천(일명 방수포 혹은 타폴린)으로 덮여있는, 친근하면서도 낯 설은 풍경을 소재로 한 일련의 사진작업들이다. 일종의 폐허의 랜드스케이프로 명명할 만한 이 작업들의 이면에는 도시 풍경으로 유형화할 만한 관심의 지점들이 읽히고, 그 자체로 사회적인 문제의식에도 맞닿아있다. 지정학적 장소와 잠정적인 장소성이 애매하게 혼재한다는 점에서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초장소) 개념에도 맞물린다. 특히 청색은 죽음을 상징하는 낭만주의의 상징색이며, 이로써 폐허가 된 문명의 죽음에 바치는 레퀴엠 같다. 

문명의 쓰레기에 대한 관심은 이후 <Green Curtain> 시리즈로 확대 재생산된다. 난지공원은 원래 쓰레기 산 위에 조성된 인공공원이며 인공자연이다. 작가는 그 공원 일대를 뒤덮고 있는 녹색 잔디를 주제화한 것. 전작에서의 재개발 내지는 재건축 현장을 가리는 타폴린과 근작에서의 쓰레기 산을 가리는 녹색 잔디의 의미기능이 상통한다. 여기서 작가는 도시 혹은 도시풍경에서 파사드가 갖는 의미기능을 추상해낸다. 그것의 의미기능은 말하자면 도시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들, 이를테면 그 몰골을, 실체를, 실패를 덮어서 가리고 포장하는 것이다. 파사드 뒤편이 의심스럽고, 그 외장이 요란할수록 더 의심스럽다. 

쓰레기에 대한 관심의 시점은 또 다른 작업에서, 이번에는 도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도심 한 가운데 있는 쓰레기 처리장(하치장?)을 소재로 한 것. 대개는 멀쩡한 빌딩의 지하공간에 은폐된 듯 숨어있는 그 공간은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해당하며, 왠지 도심의 표면으로 나와지면 안 될 것 같은 도시의 그림자에 해당한다. 그 곳에서 뭔가 의심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곳은 말하자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도시의 생리를 위협하는, 도시를 불안하게 하는 암중모색의 유비적 표현 같은 장소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덧붙이자면, 쓰레기 처리장에 모인 폐 가구며 전자제품 등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폐품들을 사람들이 마치 일상공간에서 그렇게 하듯 그럴 듯하게 재배치하고 재배열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짐짓 사무실이나 응접실처럼 꾸며놓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경우에 따라선 일종의 사물초상화 개념을 착상할 수도 있을 듯. 여하튼 쓰레기처리장에마저 인테리어 개념을 적용하는, 무차별적이고 기계적인 삶의 습관과 생활의 관성이 발견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터널 속에서 지하철이 통과하는 모습을 촬영한 <Speeding Curtain>. 무서운 속도로 지하철이 통과해 지나가면서 마치 유성의 꼬리와도 같은 빛의 줄기 혹은 다발로 환원되면서 실제 공간을 추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는다. 속도는 경쟁사회의 최상의 미덕이다. 효율성의 법칙과 경제성의 법칙에 편승한 속도의 미덕은 현대인의 왜곡된 욕망을 실어 나르면서, 동시대적인 특수성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일종의 아이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욕망의 아이콘 같은. 문제는 그 욕망이 모든 실제를 지우면서 추상화시킨다는 것.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이 일련의 사진들에서 작가는 도시풍경에 내장된 잠정적인 폭력과 불안 같은 사회적 이슈를 짚어낸다. 겉보기에 멀쩡한 인공풍경에서 도시의 트라우마를 캐낸다. 

김상균, 아파트 조경.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것이어서 친근하고, 알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알고 보면 짜깁기되고 편집되고 연출된 것이어서 낯설다. 그 차이를 매개하는 것이 공공연하게는 자연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이다. 그 욕망을 페티시즘이라 하고 물신이라고 한다. 신을 상실한 시대에 물신이 사실상 신을 대체하고 있다고 한다면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까. 그 욕망은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이다. 그 무분별한 욕망의 드라이버 앞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원래 신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을 가장한 조경이며, 광고보드와 공사장 가림 막을 장식하고 있는 자연 이미지를 빌려 어쩌면 진즉에 상실했을 자연을 주지시키고, 그저 풍문으로나 떠도는 자연에 대한 덧없는 이야기를 되불러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불현듯 현실이 낯설어지고 일상이 이상해 보인다. 

박용일. 어수선한 풍경. 땅, 잠자는 땅, 풍경 - 바람, 어수선한 풍경은 박용일이 10년 넘게 터 잡고 살아온 일산의 주변 풍경을 그린 그림들에 부친 주제어들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그대로 일산이 개발돼온 과정을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일산을 품고 있는 고양은 최근 십수 년 내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도로 개발화가 진행된 도시다. 오죽하면 그 같은 경우로 세계 10대 도시에 꼽혔을 정도다. 그러니만큼 작가의 그림 속엔 그 낱낱의 과정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에서의 그 반영은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예컨대 흔히 그렇듯 개발과 투기로 얼룩진 땅이 그 벌건 속살을 드러내지도 않거니와, 새로운 주민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내몰리듯 자기의 땅을 떠나는 원주민의 분노를 찾아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름모를 들풀 몇 포기로 어설픈 생태 운운하면서 도사연하지도 않는다. 대신 작가의 그림 속엔 이 모든 풍경의 계기들이 유기적으로 녹아들어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을 자기 내부로 불러들여 심미화한 일종의 실존적 풍경이나 존재론적 풍경으로 부를 만한 그 그림들은 문명의 흔적이나 삶의 상처가 깡그리 지워진 국적불명의 풍경화가 대부분인 현재의 풍경화단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건축용 내장재로 쓰는 테라코타에다가 한지의 원료인 닥을 풀어 섞어 만든 자신만의 안료로 화면을 칠한 다음, 그 위에다가 먹과 아크릴을 혼용해 그린 작가의 그림은 얼핏 보기에 그저 무분별한 붓질의 놀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큼직한 붓질이 땅값을 올려 받기 위해 경작하지도 않는 땅에다가 다만 흉내로만 심어놓은 옥수숫대를 지우고, 황량한 들판 뒤쪽으로 멀리 그 모습을 설핏 드러내 보이는 회색빛 아파트를 뭉갠다. 지우고 뭉개는 붓질의 뒤쪽에서 육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몇 안돼는 형상인 옥수숫대와 아파트, 그리고 들판은 그 경계를 잃고 다만 혼미한 흔적만으로 남겨진다. 이렇게 땅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터로 변질되며, 황량한 들판은 어수선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어수선한 풍경은 말하자면 개발의 과정을 낱낱이 간직하고 있는 땅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이며, 마치 주름처럼 인공의 폭력이 겹쳐진 땅의 결을 되살려낸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킬 만큼 무분별한 붓질이 만들어낸 이 어수선한 풍경은 사실은 시대를 향한 작가의 현실인식을 반영한 사회학적 풍경이며, 이와 동시에 그 현실에다가 자기의 내면을 투사한 존재론적 풍경인 것이다. 흑백의 모노톤으로 나타난 그 풍경의 빛깔은 콘크리트 구조물의 그것처럼 암울한 잿빛을 닮았다.

작가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황량한 들판 위에 작가의 황량한 마음이 겹쳐진 심리적 풍경이며, 어수선한 풍경 위에 작가의 어수선한 시대인식이 포개진 사회학적 풍경이다. 

김보중, 숲의 순례자. 숲이라고는 했지만, 그 숲은 어쩌면 진정한 숲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도시의 공원에 기생하는 숲이고, 도시의 변방에 이식된 숲이다. 진정한 숲이 아니면서 숲으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떠맡은 임시방편의 숲이고 임시변통의 숲이다. 그런 만큼 그 숲의 순례가 온전할 리가 없다. 덩달아 그 숲의 순례자 역시 순례가 무색할 정도로 그 태도가 어중간하다. 왠지 불안하고 불안정해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현대인의 어중간한, 불안하고 불안정한 정체성을 도시 변방을 기웃거리는 의심스런 순례자의 초상을 통해 풍자한다. 현대인의 부유하는 정체성을 표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숲의 순례자는 사실은 순례할 숲을 잃어버린 도시의 순례자이며 변방의 순례자이다. 그렇게 작가는 심지어 숲을 그리고 자연을 그릴 때조차 결코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다. 도시를 떠날 수가 없다. 도대체 누가 도시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가. 그렇게 도시의 변방에 붙잡힌 삶을 사는 의심스런 순례자의 불안정한, 부유하는 정체성이 근작에서의 <흐르는 거주지>의 형태로 변주되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작가는 회화의 경계를 넘어 설치로의 확장(회화설치 혹은 설치회화)을 꾀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부분이다. 

이완. 흔한 축구공과 야구공. 그런데 알고 보니, 축구공은 고양이 사체를 갈아 만든 것이며, 야구공 또한 생닭을 갈아 만든 것이란다. 죽음(혹은 주검)이 매개가 돼 극적 반전을 이끌어내고 있는 이 공들은 푼돈을 받고 하루 종일 가죽 공을 꿰매는 일에 동원된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풍경의 설원 또한 케이크로 만들어진 것이며, 풍경이 케이크와 함께 썩어가고 있다. 썩음과 부패가 불러일으키는 죽음에의 환기가 낭만적인 풍경과 충돌하면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낭만적인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썩음과 부패를 내장하고 있고, 죽음과 파멸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아름다움을 결합시킨 것은 낭만주의의 위대한 유산이다.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선미합일사상)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죽음의 순간이 아름답다. 숭고의 미학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이 감정은 극적이고 장엄하다. 그런데, 여기에 자본주의의 욕망이 덧붙여진다면?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각종 명품 브랜드가 디스플레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부패한 죽은 참새가 눈에 들어온다. 명품은 죽음마저도 넘어선다는(넘어서게 해준다는) 뜻일까. 불현듯, 감미로운 선율이 자본주의의 욕망에 바쳐진 레퀴엠처럼 들린다. 

김수연. 헤테로토피아, 어떤 장소. 사회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들만의 장소로 모여드는데, 그곳이 바로 육체와 영혼이 거래되는 장소, 헤테로토피아다. 도심에 둥지를 튼, 도심 속 변방인 그곳은 버려진 곳, 폐허가 된 곳이며, 도심의 쇠락을 침묵으로써 증언해주고 있는 곳이다. 이를테면 재개발 건축현장의 빈 방이나, 버려진 공장지대, 교각 밑 어스름한 곳과, 수변시설물 같은.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저마다의 발가벗은 몸을 전시한다. 이렇게 발가벗은 몸을 전시하는 이유는 자신의 영혼과 대면하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동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며(자신과 마찬가지로 쓸쓸하고 피폐해진 영혼을 냄새 맡는 커밍아웃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현듯 그곳에 들이닥칠 지도 모를 물신을 위해 아직 남아있는 자신의 몸이 갖는 상품적 가치를 확인하고 전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곳은 장소도 의심스럽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의심스럽다. 그곳도, 그 일도 친근하면서 낯선데 알만한 장소 탓에 친근하고, 비정상적인 상황 탓에 낯설다. 여기서 작가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누가 그들을 지목하고, 그들에게 비정상성의 낙인을 찍고, 그들을 타자로써 추방하는가? 작가는 자본주의 물신이 팽배해진 시대에, 천민자본주의의 속물근성이 노골적인 시대에 일어날 법한 사회적 현상들,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는 소외의 계기들을 추슬러 한편의 장대한 드라마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그 드라마의 색조는 지옥의 묵시록을 방불케 할 만큼 암울하고 비극적이고 비장하고 장엄하다. 세계의 장엄한 종말? 마침내 노예는 정체성을 쟁취하고,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의 허위를 넘어설 수가 있을까? 작가의 작업은 이런, 암울한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정재철, 실크로드프로젝트. 정재철의 작업은 여행과 수집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발상을 본격화한 것이 실크로드 프로젝트이다. 그 대략을 보면, 국내에서 온갖 형태의 쓰다버린 플래카드를 수거하고 세탁하고 포장하여 경유지에 해당하는 각 국가별 촌락에 들러 이를 현지인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주로 6개월)이 지난 연후에 재차 현지를 방문해 현지인들이 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것이 이 퍼포먼스의 근간이다. 이때 플래카드는 내국인에게 일종의 의미(이를테면 일종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기호)로서 다가오지만, 외국인에게 그것은 의미로서보다는 그저 알록달록하고 현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식적인 천으로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해서, 이를 소재로 하여 집을 꾸미기도 하고, 몸을 치장하기도 하고, 모자나 가방 그리고 베개 커버와 같은 각종 생활소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플래카드 본래의 의미기능이 변질되고 변환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으며, 이로써 미술이 의미론(차이 나는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퍼트리는)과 소비학(의미기호가 이미지로 전유되고 변용되고 소비되는) 그리고 교류사(간섭과 매개와 수정의 과정을 동반한 상호영향사와 문화적 혼성)와 같은 여타의 사회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지층과 만나질 수 있는 접점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정재철의 실트로드 프로젝트는 여행과 수집이, 여행의 스킬과 도쿠멘타가 미술(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행의 기술은 곧 삶의 기술이며 존재의 기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공감을 자아낸다. 

박대성. 작가는 유년시절 유난히 잦았던 이사에 대한 기억과 짧지 않은 유학생활로 인해 집에 대한 남다른 관념을 가지기에 이르렀고, 그 의미는 자연스레 정체성 문제와 연결된다. 새들의 집짓기를 흉내 내고, 판잣집을 재현하며, 기억을 더듬어 옛집을 재생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작가는 집을 정체성의 메타포로서 사용한다. 일개의 집이 개별주체의 정체성을 상징한다면, 집들이 모여 있는 도시는 한 사회의 정체성을,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런가하면 집은 나에겐 친숙한 공간(캐니)이지만, 타자에겐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언캐니)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집이 나에게 한결같이 친숙하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나는 집에 의해 주체로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타자로서 내몰리기도 한다. 내 속엔 주체와 함께 타자가 살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집으로 상징되는 존재론(주체와 타자와의 관계)과 함께, 집으로 대변되는 사회학적 의미(주체와 제도와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태담론의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근작에선 자연과 집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매개로 작업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집은 원래 자연에 기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바위를 거스르지 않고, 나무를 피해가지 않는다. 이 바위와 나무를 형상화한 석고 덩어리에 집을 덧대 만든 구조물이 서정적인 느낌을 주며, 생태담론의 또 다른 장을 열어놓고 있다. 

김남훈. 작가는 주로 포장할 때 쓰는 청테이프를 가지고 벽에 난 크랙을 가리기도 하고, 깨어진 물건을 봉하기도 하고, 봉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도 하고, 집을 온통 둘러싸기도 하고, 심지어 옷을 만들기도 한다. 작가에게 청테이프는 말하자면 마치 요셉 보이스의 펠트 천이 그런 것처럼 사회를 치유하는 주술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술은 가난한 삶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회고와 향수의 묘약으로 기능한다. 

작가 연구/ 생태예술_자연의 경우 

김주영, 길 위의 퍼포머 혹은 길 위의 행위예술. 나는 자주 나의 예술을 한길 바닥에서 줍습니다. 특히 낯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땅바닥에서 발견한 것들에서 말입니다. 그건 아주 쉽습니다. 그러면 재미있어서 사는 것이 권태롭지도 않습니다. 내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짓을 하노라면 시간이 간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아니면 내 인생의 긴, 지리멸렬한 공간과 시간을 무엇으로 매울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내가 행위예술이라는 것을 하게 된 동기입니다. 시간성의 개입이지요. 이때 시간은 작업 또는 사는 수단 과정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삶과 예술의 혼돈의 장에서. 

김주영의 이 말은 시간을 매개로 하여 예술과 삶의 접점을 찾은 경우로서, 예술행위를 철학적인 성찰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킨다. 김주영은 모든 자연이나 삶의 흔적이 곧 예술이라고 말한다. 죽은 것들이 그 뒤에 남겨놓은 흔적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을 헤집어 사는 이유를 밝혀줄 의미 있는 계기들을 발견해내는 행위에서 예술의 당위성을 찾는다. 그리고 이는 진혼제와 진혼굿 그리고 살풀이의 행위예술로써 나타난다. 그의 작업에서 행위예술과 굿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다큐멘터리와 퍼포먼스, 로드무비(로드아트?)와 대지예술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질적이고 유기적인 지층을 노마디즘 즉 유목주의가 지지하고 있다. 여기서 유목주의는 말할 것도 없이 사유의 유목을 의미하며, 특히 길(삶과 존재의 다른 이름인)을 사유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김광우. 작가는 길 위의 유목민이다. 길을 떠돌고 길의 냄새를 맡고 길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길은 전형적인 삶의 메타포다. 그러므로 길 위에서 작업하는 작가의 작업은 사실은 길 위에서 사는 것이다. 작업과 삶이 이처럼 일치되는 경우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우리 모두 잠시 잠깐 삶이라는 길 위를 떠돌다가 가도록 운명 지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다시, 작업과 운명이 이처럼 한 몸인 경우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운명론이 아니다. 순리고 숙명이고 숭고다. 자연의 습성을 따라 사는 것이니 순리고, 자연의 습성을 자신의 습성에 합치시키는 것이니 숙명이고, 인성을 넘어 자연성을 좇는 것이니 숭고다. 그렇게 작가는 길을 찾아 세계 도처를 떠돈다. 그리고 그렇게 떠돌다가 머문 자리를 사진으로, 영상으로, 퍼포먼스로, 설치로 기록하고 남긴다. 그렇게 뒤에 남겨진 흔적들은 그대로 삶의 증거가 되고 존재의 증명이 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예술이 존재하는 의미에 대해 그 실천 논리에 대해 재고하게 만든다. 

신용구, 이미지퍼포먼스. 순환, 꿈, 바람을 안고가다, 미로속의 실타래, 현의 변주, 그리고 꿈의 조각들을 모으다. 신용구가 지금까지 자신의 작업에 부친 주제들이며 주제의식들이다. 여기서 순환은 자연의 섭리를 상징한다. 삶은 죽음을 향하고,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재생된다. 그렇게 삶과 죽음은 무한 반복되면서 무한정 연쇄된다. 그러므로 삶은 어쩌면 그렇게 무한 반복되고 무한 연쇄되는 과정의 한 순간이며 계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한 반복되고 무한 연쇄되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에서 잠시잠깐 꾼 막간의 꿈같은 것일지도 모르고, 망각의 강을 건너는 순간 다 잊힐 일장춘몽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처럼 무한 반복되고 무한 연쇄되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의 고리를 끊어 그 과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뫼비우스의 띠와 윤회의 고리를 끊어 미궁과 미로로부터 탈주하는 일이다. 

이 주제들이며 형식들은 저마다 자족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끝이 없는 이야기, 끝이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불러들이고 파생하는 열린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그 자체 논리적인 개연성이나 내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유자재한 서사구조, 어디서나 시작할 수 있고 급작스럽게 끝낼 수 있는 마치 유기적인 흐름과도 같은 서사구조를 열어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존재가 자기의 비의를 내보이는, 드문 순간이며 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 같다. 그래서 일종의 이미지퍼포먼스로 명명할 만한 작가의 행위는 이런 이미지들이 떠도는 흐름이며 지속 앞에 서게 만들고,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정적인, 그래서 오롯이 자기 자신과 만나지게 하는, 그런 극적인 순간 앞에 서게 만든다. 

홍현숙. 작가는 흙이 내재한 생명력을 일종의 사회학적 기호인 옷과 결합시킴으로써(옷의 층과 흙의 층을 마치 지층처럼 교차 중첩 시킨 작업) 자연의 잠재 에너지를 표출하거나 자연 에너지를 사회학적 맥락으로 전용한다. 

김주연. 작가는 식물을 키운다. 식물은 누구나 키우고, 또 식물을 키운다고 저절로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작가가 식물을 키우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그 예사롭지 않은 방식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개념이 이숙(異熟)이다. 다른 방식의 성장을 의미하는 불교용어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고, 그 방식들이 다 존중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았을 것이다. 그럼 이 개념이 작가의 작업에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보통 식물은 땅에서 생장한다. 이숙이 아니다. 작가는 땅 대신 드레스에, 스웨터에, 저고리에, 소파에, 침대에, 그리고 심지어 신문 더미에 식물을 심는다. 이숙이다. 그리고 그렇게 식물이 심겨지고 생장하는 토양(환경)이 달라지면서 매번 그 의미도 달라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육기간이 짧은 식용식물을 키운다는 것이다. 생육기간이 짧아야 한자리에서 생과 사가 물고 물리는 생사순환의 고리를 보여줄 수가 있다. 작가의 작업은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로 옷을 대지 삼아 식물을 생장시킨다는 점에서 흔히 에코페미니즘으로 분류된다. 다른 한편으로 생과 사가 순환하는 생생한 현장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바니타스(무상한 삶)의 또 다른 버전으로도 읽힌다. <존재의 가벼움>이란 의미심장한 제목도 이런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임동식. 작가는 대략 자연 흉내 내기 혹은 자연에 동화되기, 선사시대놀이, 그리고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로 정의할 만한 일련의 그림들을 그린다. 이 가운데 자연 흉내 내기 혹은 자연에 동화되기나 선사시대놀이를 주제화한 그림들은 주로 1980년대 국내 최초의 야외설치(현장)미술 그룹운동인 <야투>(1981년 창립)의 일원으로서 활동해온 경험과 연이은 독일 유학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를 주제화한 그림들은 귀국 후 일종의 마을 공동체 운동인 <예술과 마을>(1993-2003)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과정에서의 경험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 편의상 주제와 영향관계를 이렇게 구분할 수는 있지만, 그 구분 자체가 필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정하게는 상호 삼투되는 것으로 보인다. 

유형무형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을 회화의 일반적인 경우로 볼 때, 적어도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이 경우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재현한 대상이 예사롭지가 않다. 작가가 그린 주요한 그림들 상당수가 자신이 실제로 퍼포먼스를 벌인 장면을 바탕으로 이를 회화로 옮긴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기록물 즉 도쿠멘타의 성격을 갖는 것이면서, 이와 동시에 그 자체가 독자적인 회화적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거북이로 그리고 때로는 토끼로 분장한다. 엄밀하게는 분장한다기보다는 흉내를 내거나 연기한다. 이를테면 그림에서 작가는 발가벗은 채 거북이를 등에 업고 거북이처럼 땅을 기는 자세로 고목과 마주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거북이와 자신을 동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거북이처럼 느린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갖는 의미를 곱씹게 하며,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재고하게 한다. 빠른 것이 미덕인 문명화된 시대에 이처럼 거북이의 느린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는 일견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그런 만큼이나 오히려 그 메시지(느림의 미학)는 더 강력하게 그리고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와 함께 다른 그림에서 작가는 양쪽 귀에다 나뭇잎을 갖다댄 자세로 명상에 잠겨 있는데, 그 나뭇잎이 흡사 크고 넙적한 토끼의 귀를 흉내 낸 것 같다. 이처럼 작가는 동물(자연)을 흉내 내고 연기하는 행위(질 들뢰즈의 논법을 빌리자면 거북이 혹은 토끼 되기)를 통해 자연에의 동화현상과 그 의지를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흉내 내는 행위는 다른 그림들에서 자연과 교감을 시도하고 꾀하는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현상한다. 이를테면 헐벗은 산에 아마도 식수를 위해 심겨졌을 아기 소나무와 가부좌 자세로 마주 앉은 작가를 묘사하고 있는 그림 <아기 소나무와 마주한 생각>에서 소나무의 여린 솔잎과 작가의 수염이 끈으로 묶여 서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풀잎과 마주한 생각>이란 또 다른 그림 역시 이와 유사한 상황이 재현돼 있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작가의 수염과 연결된 끈을 통해 실제로 소나무나 풀잎의 생각이 그대로 작가에게 전달될지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여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이 제스처는 말하자면 자연과 하나 되는 어떤 경지를 이념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흉내 내고 자연과 교감하는 행위를 통해 궁극적으론 자연에의 동화현상을 꾀하는 작가는 마침내 자연과 인사하기에 이른다. 즉 자신을 향해 꽃봉오리를 숙여 보이는 꽃들에게 자신도 인사하는 그림 <꽃과 마주한 인사>가 자연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엿보게 한다. 적어도 작가가 보기에 자연은 영적 존재인 것이다. 이로부터 이를테면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범신론과 물활론과 같은 영적 존재로서의 자연관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향한 경외감이 오롯이 묻어난다. 이 일련의 그림들, 그러니까 자신의 퍼포먼스 장면을 회화로 옮겨 그린 그림들에서 작가는 문명인의 태를 벗고 자기 내부의 자연인과 대면하려는, 자연성과 본성을 회복하려는 심각한 자기반성적 행위와 과정을 일깨워준다. 

차기율. 순환의 여행, 방주와 강목 사이. 차기율의 작업을 대변하는 주제다. 여기서 방주는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고, 강목은 생태환경을 집대성한 본초강목에서 차용해왔다. 각각 서양의 생명사상과 동양의 생태학의 원형에 해당한다. 이로써 적어도 주제로 볼 때 작가의 작업은 동양과 서양의 사상적 원형을 하나로 아우르는 거대서사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작가는 포도나무를 차용한다. 알다시피 포도나무는 그 생김새가 구불구불하고 비정형이어서 재목으로 쓸 수가 없다. 작가는 이 포도나무를 잘라 토막 낸 다음, 그 토막을 하나로 연이어 붙여 긴 띠를 만든다. 마디마디가 있을 뿐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거대한 뫼비우스 띠를 만들어 무한 순환하는 존재의 여행을 표상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생태를 상징하는 포도나무와 자갈돌, 기를 상징하는 파문과 리좀처럼 퍼져나가는 뿌리 드로잉과 함께 근작에선 게의 집을 차용한다. 갯벌에 게가 지은 집 그대로를 모종삽으로 떠내 노천 소성한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생태학을 바탕으로 자연의 원형과 존재의 원형이 만나지는 접점을 모색하는 것에 맞춰진다. 

조명환. 양서류의 시점, 무당개구리의 울음. 멀리 오페라하우스가 보이는 시드니, 올림픽 스타디움이 보이는 베이징,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뉴욕,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 구겐하임미술관이 보이는 빌바오, 금문교가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마천루가 보이는 시카고, 부산, 베니스, 마이애미, 밴쿠버, 히로시마, 리옹, 산토리니, 도하, 루체른, 홍콩, 두바이, 상하이, 싱가포르, 런던, 바르셀로나, 베수비오, 융프라우, 몽블랑, 후지 산, 그리고 매트호른이 물에 수장되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수장되고 있는 것들을 찍은 시점을 양서류의 시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귄터 그라스의 <무당개구리의 울음>은 문명과 환경파괴를 경고한다. 그렇게 작가는 양서류의 시점을 빌려 문명과 환경파괴를 경고한다. 

함연주. 작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실 삼아, 그리고 투명한 레진을 접착제 삼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이어 붙이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마치 거미줄에 이슬이 맺힌 것 같은 환상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그리고 이런 망구조가 확대되면서 공간을 잠식하는데, 흡사 온통 거미줄이 점령하고 있는 오랜 폐가를 보는 것 같은 황량하면서도 서정적인 풍경을 전개해 보인다. 미세한 바람에도 하늘거리는 미약하고 섬세한 망 구조물이 덧없는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시간의 그물이며 미망의 그물 같다. 머리카락을 소재로 공간에 개입하고 공간을 구성한 공간설치작업으로서 공간 자체가 작품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장소특정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편이다(공간이 없으면 작품도 없다). 머리카락이라는 미약한 소재를 사용해 서정적인 공간을 연출한 것에서는 여성주의의 감성과 몸 담론(특히 애브젝션)에 대한 공감이 읽힌다. 작가는 이처럼 부드러운 소재를 매개로 하여 소재 특유의 장력을 가시화한다. 허공에 떠 있는 구조물이 너무나 미약해서 그 실체감이 쉽게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오히려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조형물과 실체감을 겨룬다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존재감이 희박한 조형물과 상대적으로 실체감이 뚜렷한 그림자가 어우러져 허공중에 실제와 허상의 레이어를 만든다. 작가의 작업은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심약한 소재 속에 일말의 긴장감을 숨기고 있다. <부드러운 긴장>이라는 주제도 그렇거니와 그 드러나 보이는 형식이 부드러운 조각의 특정성과도 통한다. 

장지아. 오줌나무와 소금꽃. 작가는 오줌으로 오줌나무를 만들었다. 투명한 유리 플라스크가 링거 병을 대신하고 영양제나 피를 수혈할 때 사용하는 투명 비닐호스로 나뭇가지를 대신했다. 그리고 플라스크와 비닐호스에 피 대신 오줌이 흐르게 했다. 알다시피 오줌은 생리현상의 부산물이고, 의학은 생리현상을 관리하는 기술이다. 그렇게 오줌나무에는 유사의학이 포개져 있다. 그리고 오줌나무 자체에 주목해 보자. 나무에 똥과 오줌을 거름으로 준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오줌나무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순수한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나무지만, 동시에 성을 매개로 한 그리고 생리현상을 매개로 한 것이란 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상상력을 가동시켜 이것과 저것을 매개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 관심으로 오줌 꽃을 만들었다. 어항과 같은 수조에 이런저런 오브제들을 세팅해 놓고, 수조를 오줌으로 채웠다. 그리고 오줌을 건조시키면 소금 결정체가 오브제의 표면에 하얀 꽃처럼 피어난다. 그래서 오줌 꽃이다. 아닌 것과 아닌 것과의 결합이 피워 올린 꽃이다.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오줌처럼 혐오스런 물질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다. 여기서 작가는 혐오와 호감, 호와 불호, 미와 추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든다. 그 자체로 혐오감을 주고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이며 존재 같은 것은 없다. 물질이며 존재에 대한 감정은 상대적이고 양가적이다. 그 원료가 오줌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오브제를 보면 영락없는 소금 꽃이고 성에꽃이다. 여기에 그 꽃이 다름 아닌 오줌 결정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서 꽃에 대한 감정이 달라지는가. 꽃에 대한 호감이 불현듯 오줌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뀌기라도 하는가. 작가는 바로 그런 문제, 곧 물질이며 존재에 대한 상대적이고 양가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장지아의 작업은 성과 광기, 성과 권력, 정상성과 비정상성, 불경과 위반, 금기와 터부, 배설과 욕망, 에로스와 타나토스, 에로티시즘과 엑스터시, 쾌락과 고통, 가학과 피학, 수술과 고문, 폭력과 성스러움(르네 지라르), 그리고 욕망의 모호한 대상(루이스 브뉘엘)과 같은 거대담론과 미시담론의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거대담론의 지점 지점들을 미시담론의 층위로 전유하는가 하면, 미시담론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층위에서의 경험을 거대담론의 층위로 통섭해 들인다. 그렇게 존재가 아로새겨진 몸의 정치학을 가로지르고 위반의 정치학을 가로지른다. 작가의 작업은 특히 젠더 이후 간과된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몸을 부각하고 육질을 부각하면서 이 모든 담론의 지점 지점들을 호출한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호출된 지점 지점들을 감각의 층위에서 일어난 생생한 일이며 사건처럼 제안하고 재현하고 해석한 것이란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현실성을 획득한다. 특히 애브젝션 곧 비루한 것들의 미술에 대해서,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에 대해서 숙고하게 한다. 

김도희. 작가의 작업 중엔 유독 몸을 소재로 하거나 몸의 생리를 건드리고 있는 작업들이 많다. 물과 함께 오물이 변기 속으로 사라지는 녹화장면을 거꾸로 되감아 마치 삼킨 음식물을 게워내는 목구멍을 연상시키는 <무제>(2003), 근 한 달간 내내 밤새 아픈 몸을 뒤척이며 이불 대신 덮고 잔 장지에 고통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진, 그러나 정작 정보가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이 고통의 흔적임을 알 수 없는 <신치로이드 60>(2003), 겸제 정선의 원화 그대로를 수개월 걸려 대형화면의 샌드페이퍼에 손톱으로 옮겨 그린 <손톱산수>(2004), 일련의 연속된 숫자를 기록한 종이 띠를 감아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머리가 그 종이다발에 파묻히게 한 <자기 파괴 혹은 폭파되는 머리>(2004), 밀폐된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외부와 연결된 가녀린 관을 통해 흡입한 공기를 내뱉어 비닐봉지를 팽창시킨 <숨쉬기>(2005), 술 취한 노숙자의 감겨진 눈을 강제로 벌려 근접촬영 한 <이도 저도 아닌>(2005), 젖꼭지에 빨대를 대고 입으로 빨아들여 근육이 부풀게 한 <작용과 반작용>(2007), 화장지에 혈흔을 찍어 말줄임표를 재현한 <말줄임표>(2008), 내시경을 통해 소형 마이크를 삼키는 모습을 클로즈업한 <더 진실한 소리를 재현하는데 따른 어려움>(2009) 등등. 그리고 미친 듯 몸을 떠는 나무 <미친 나무-마비된 곳을 찌르다>(2005)와 모니터화면을 통해 발해지는 전자광(인공광)에도 자연광에서와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이며 생장하는 식물 <빛, 진리, 생명>(2008).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김도희는 끊임없이 몸을, 몸의 증상과 징후를, 몸의 생리와 관성을 호출한다. 이렇게 몸을 호출하고 타자화하는 과정이 대개는 생경하고 공격적이다. 타자화된 몸을 직면한다는 것은 이처럼 언제나 생경하고 공격적인 경험이다. 이처럼 타자화된 몸은 순수관념에 대한 강박에 의해 견인되는 정신의 기획에 대해, 그리고 몸을 성 상품화하려는 쾌락원칙에 의해 견인되는 자본주의의 기획에 대해 존재의 기획을 그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여기서 존재의 기획이 몸(타자화된 몸, 생경하고 공격적인 몸)으로부터 그 진정성을 얻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끊임없이 자기(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로 되돌려지는, 존재에게로 되돌려지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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