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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풍성,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

고충환

정풍성,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 


작가는 불안하다. 그 불안은 구체적 실체를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다소간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이다.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불안?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든 불안하다. 불안에 보편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누구든 통과의례처럼 겪는 통증이라고 해야 할까. 시대 감정 혹은 세대 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불안은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이며 증상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게 작가의 시대 감정 혹은 세대 감정은 불안하다. 불안에 민감한 더듬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작가가 시대에, 그리고 세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 자체는 주관적이지만, 시대와 세대 감정을 객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 정풍성에게 불안은 주제라고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적어도 그의 작업이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시작되고 결정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고, 이로부터 자기 내면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성찰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불안은 비록 작가 자신의 것이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불안을 모티브로 한 작가의 작업은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다. 이로써 작가는 자신의 작업의 주제를 <everyone>, 그리고 <ordinary people> 이라고 부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안한 시대 감정이며 세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조형할 것인가. 불안에 어떤 옷을 입힐 것인가.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유년을 소환한다. 놀이만으로 마냥 행복했던 유년의 아기를 불러낸다. 불안한 어른과 행복한 아기? 행복한 아기를 통해 불안한 현재를 증명한다? 역설법이다. 행복했던 유년을 불안한 현재와 대비시켜(혹은 이입시켜) 불안한 현재를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소환된 유년의 아기는 도래할 미래(그러므로 현재)의 불안을 증명해야 할 지상과제를 떠안고 있는 만큼 그때처럼 마냥 행복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불안을 내재화한 아기가 되었고, 불안한 아기가 되었다. 불안한 아기? 어른아이다. 키덜트다. 몸은 아긴데 생각은 어른인 아이가 되었고, 흡사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 나오는 오스카처럼 어른을 거부하는 그러므로 성장을 거부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게 작가는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자신의 유년을 소환하고 성장을 거부하는 아기 그러므로 어른아이를 불러낸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불러낸 어른아이를 캐릭터화하는데, 왜소한 몸에 반해 상대적으로 머리가 큰(무거운? 버거운?) 체형이 영락없는 아기 그대로다. 표정이 사뭇 진지한데,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 아마도 자기 내면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얼굴에는 입과 귀조차 없는데, 아마도 세상과 연결된 소통 채널(그러므로 어쩌면 유혹)을 끊고 오로지 자신에 몰두하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내면화의 경향성을 강조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불안한 아기, 진지한 아기, 생각하는 아기, 무거운 아기의 원형이 태어났다. 그리고 작가는 이 원형을 원형(몰드) 삼아 마치 공장에서처럼 똑같은 아기들을 반복 재생산하고 병렬하는데, 자신의 불안을 증폭한 것 같고, 집단 불안의식으로 나타난 사회현상을 조형한 것도 같다. 

작가는 이처럼 몰드로 떠낸 폴리에 우레탄 채색으로 마감하는가 하면, 동판 용접으로 캐릭터를 조형하기도 한다. 크고 작은 삼각형을 모나드 삼아 같은 크기와 형태를 반복 병렬, 집적하는 모듈을 적용하고 있는데, 작은 조각이 모여 하나의 전체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패치 조각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반복이 만든 패턴이 강조되는데, 때로 삼각형 대신 옆으로 긴 사각형의 패턴이 마치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 것 같은, 그렇게 상처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대개는 눈을 감은 채 뒷짐을 지고 있는, 그리고 여기에 더러 팔짱을 낀 채 웅크리고 있는, 빈약한 몸통에 비해 마치 힘에 겨운 듯 상대적으로 큰 머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아이답지 않은 상처를 내재화한 것도 같고, 생각하는 사람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도 같다. 

작가는 불안한 생각이 들 때면 머리가 부풀어 오른다고 느끼는데, 아이의 머리가 왜 큰지를(커졌는지를) 알겠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머리의 크기는 불안의 크기에 비례한다. 여기서 불안의 크기는 생각의 크기이기도 하다. 불안은 생각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서 머리가 큰 아이는 생각이 많은 아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눈에도 왜소한 몸통에 비해 저보다 몇 배나 더 큰 사각기둥을, 때로 직립하거나 변형된 입방체 도형을 머리 삼아 이고 있는 작업도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을 <생각의 기둥>이라고 부른다. 생각이 부풀어 올라 흡사 토템폴을 연상시키는 탑으로, 기둥으로 자라난 것인데, 머리가 추상적 도형으로 대체된 것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불안과 같은 심리적 현상으로서보다는 생각 자체를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게 만든다. 말하자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론적 조건에 기념비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 같은, 자신의 생각에 마치 직립하는 기둥과도 같은 질서의 표상을 부여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상대적으로 머리가 큰 아이의 경우와는 구별되는, 생각하는 사람의 또 다른 버전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불안을 조형한다. 그리고 탐욕을 주제화한다. 인간의 탐욕으로 사슴과 코뿔소의 뿔이, 그리고 코끼리의 상아가 은밀하게 또는 대놓고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때로는 약으로 쓰기 위해, 더러는 고급의 수제 공예품을 만들 요량으로 죄 없는 동물들이 남획되고 죽어 나가는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작가는 사슴과 코뿔소, 그리고 코끼리의 머리를 조형하는데, 뿔과 상아 부분을 광택 마감 처리해 다른 얼굴 부위와 구별했다. 그렇게 유별나게 번쩍거리는 표면 질감이 마치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을 침묵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코로나 시대의 우울한 집단 초상화를 예시해준다. 아기 같은 몸매나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하지만, 전작과 다른 부분이 있다. 하나같이 얼굴에 마스크를 쓴 것이 펭귄처럼도 보이고, 하나같이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것이 무뚝뚝하게도 보인다. 세상에 대해 자기를 닫아건 방어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렇게 똑같은 모양의 캐릭터들이 도열해 있는데 흡사 마스크를 사기 위해, 진단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선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똑같은 외양과 빈틈없는 줄이 전체주의를 떠올리게도 된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이 옷처럼 덧입고 있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저마다의 개성(아니면 저마다 내재화된 불안?)을 보는 것 같아 안도하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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