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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회화와 일상을 매개하고 간섭하는 시트지

고충환

박상희, 회화와 일상을 매개하고 간섭하는 시트지 


Under the Skin. 박상희가 자신의 근작에 붙인 주제다. 피부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살과 피가 타는 밤이 있다. 욕망이 있다. 낮이 도시의 피부라면, 밤은 도시의 욕망이다. 낮에 욕망은 드러나지 않는다. 욕망이 드러나기 위해선 밤이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욕망이 자신을 드러낼 때 도시는 더 도시답다. 욕망이 거래되고 소비될 때 도시는 더 도시답다. 현란한 불빛 아래서, 네온으로 번쩍거리는 인공불빛으로 반사될 때 도시는 더 도시답다. 아마도 작가가 도시의 야경을 즐겨 그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감수성은 도시적이다.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이미지를 훔치는 이미지 사냥꾼이다. 꽤나 오래전 일이지만, 그렇게 도시를 어슬렁거리던 작가의 눈에 간판이 들어왔다. 도시의 전형이고 아이콘이다. 그래서 작가는 간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간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간판에서 시트지를 발견했다. 오리기도 쉽고, 붙이기도 쉽고, 원하는 형태며 색깔로 모양내기도 쉬운, 그리고 여기에 값싸기조차 한 싸구려 시트지야말로 마치 불빛을 찾아 모여드는 부나방 같은, 하루살이 같은 덧없는 도시의 욕망을 표상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간판에서 욕망 쪽으로 옮겨갔고, 욕망이 더 잘 드러나 보이는 도시의 야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꽤나 오랫동안 도시의 야경을 그렸다. 서울과 인천의 밤거리를 그렸고, 동경과 홍콩의 욕망을 그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시트지는 도시의 욕망을 표상하고, 현대도시의 생활사를 표상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표상만으론 그림이 되지 않는다. 표상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표상이 표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시트지를 이용해 도시의 야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다른 색깔의 시트지를 겹겹이 붙였다. 그리고 칼로 조각하듯이, 드로잉하듯이 어슷하게 표면을 오려내면 겹겹이 붙여진 색색의 레이어가 드러나 보인다. 숨어있던 도시의 지층이, 욕망의 단층이, 도시의 상처가 드러나 보인다. 자연광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감싸고 드러내 보인다면, 인공불빛은 카멜레온처럼 형태와 색깔을 왜곡시킨다. 도시의 야경이 숨어있기 좋은 은신처가 되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트지에 칼질로 드로잉하는 작가의 행위는 도시가 은폐하고 있는 욕망을, 상처를, 도시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주제 Under the Skin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의 피부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로 도시가 은폐하고 있는 욕망이 있고, 상처가 있고, 무의식이 있다. 작가는 바로 그 도시의 욕망을, 상처를, 무의식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도시의 무의식이라고 했다. 도시의 무의식이 뭔가. 여기서 무의식은 표면과의 대척점에 있다. 그러면 다시, 도시의 표면은 뭔가. 제도가 개별주체에게 내재화한 것이고, 그 장치가 이미지 정치학이다. 사람들은 실재를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표면으로 충분한 것이다. 표면이 실재고, 이미지가 사실이다. 그 실재, 그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안 봐도 비디오라고 생각한다. 상식을(롤랑 바르트라면 doxa 그러므로 부르주아의 언술이라고 했을) 당연지사라고 생각한다. 그 표면 밑에 억압된, 그 비디오 화면에 가려진 것이 무의식이다. 그렇게 잠자는 무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낯설게 하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주제 Under the Skin은 낯설게 하기(표면에 칼집을 내기, 표면에 균열을 내기)를 통해 사람들의 무감한 의식을 각성시키고, 진정한 실재와 참사실을 일깨우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자크 라캉이라면 상징계(언어와 상징으로 조직된 표면)가 억압한 실재계(언어와 상징이 거세하고 추방한 상상계)가 폭로되고 드러나 보이는 계기라고 했을 것이다. 


시트지 회화에서 시트지 드로잉으로. 그렇게 작가는 시트지 회화라고 부를 만한 그림을 그렸다. 바탕색을 칠하고, 시트지를 붙이고, 칼로 오려내고,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리는 그림을 그렸다. 때로 시트지가 강조되고, 더러 덧그린 그림이 부각 되는 그림을 그렸다. 수년 전부터는 도시의 야경과 함께 풍경과 정물을 그리는데, 모노 톤의 단조로운 색채감정이 시트지의 물성보다는 회화적 효과를 강조하는 경우로 보인다. 시트지를 매개로 한 재현적인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한편, 그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 심화해 온 과정이며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먼 길을 돌아 다시 시트지로 돌아온다. 시트지 회화가 처음 시작됐던 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작가는 시트지 자체를 보고, 시트지 자체에 주목한다. 시트지만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엄밀하게는 그림을 덧그리는 그리기의 과정이 생략되었으므로 시트지로 화면을 구성하고 만드는데, 어쩌면 당연하게도 종전의 회화적인 화면과는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관건은 시트지 고유의 성질을 이해하고, 그 성질에 부합하는 회화적 형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시트지의 물성과 회화의 물성은 다르다. 시트지의 물성은 무미건조하고 중성적이다. 반면 회화의 물성은 감각적이고, 여기에 감정적이기조차 하다(마샬 맥루한이라면 차가운 미디어와 따뜻한 미디어의 차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 무미건조하고 중성적인 성질은 자본주의에 부수되는 소비와 상품과 욕망 같은 표정 없는 것들, 혹은 들끓는 것들을 표현하고 전달하기에 역부족인 면이 있다. 전작에서도 역시 자본주의의 욕망(욕망의 표상으로서의 도시와 야경)을 다루기는 했으나 회화적으로 각색된 것이어서 시트지 자체의 물성에 주목하고 부각하는 경우와는 처음부터 그 경우가 달랐다. 

나아가 시트지는 재현적이기보다는 탈재현적인 그림, 그러므로 추상과 형식논리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추상과 형식논리? 무미건조하고 중성적인?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부수되는 미학적 장치들이고 성질들이다. 그렇게 작가는 시트지를 소환하면서, 동시에 모더니즘 패러다임도 호출한다. 그리고 그렇게 시트지를 매개로 한 일련의 형식실험을 통해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재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제안하고 있는가. 시트지를 매개로 작가는 어떤 형식실험을 예시해주고 있는가. 시트지는 색면이다. 시트지는 오려 붙이는 물건이다. 여기에 시트지는 임의로 붙이고 떼어낼 수 있는 성질과 기능을 가진 물건이다. 이러한 사실 인식에 착안한 작가는 시트지의 색면을 오려 붙이기, 시트지를 임의로 붙이고 떼어내기를 시도한다. 시트지의 색면을 캔버스에다, 벽면에다, 공간에다 붙이는 방법으로, 때로는 이런저런 생활 오브제 위에 붙여서 감싸는 방법으로, 붙였다 떼어내는 방법으로, 그리고 그렇게 붙였다 떼어낸 흔적과 과정 그대로를 남기고 전시하는 방법으로 색면구성을 시도하는 한편, 어쩌면 설치작업과 함께 공간확장을 꾀한다. 시트지로 만든 색면구성(그러므로 회화)을 캔버스의 틀에 한정하지 않고, 공간확장을 꾀함으로써 시트지가 처음 유래했던 일상성의 맥락으로 시트지를 되돌려준다. 추상회화의 확장된 형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회화와 일상의 경계를 허물어 회화를 일상으로 확장 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2라운드는 회화와 일상이 상호간섭하는 과정을 통해 회화와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경계를 허물어 종래에는 그 차이를 지우는 지경을 지향한다. 그리고 여기에 장소 특정성 개념이 매개된다. 장소가 없으면 작업도 없다. 장소가 전제되어야 작업도 가능해진다. 작업이 매개되면서 장소의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장소와 작업이 운명을 같이하는 개념의 작업이다. 아마도 차후에 작가는 일상 공간 여기저기에 시트지를 매개로 한 침투와 간섭을 감행할 것이다. 이를 통해 장소의 의미를 변환시킬 것이다(다니엘 뷔랭의 작업에서처럼). 어쩌면 일시적이나마 장소의 기능을 정지시킬지도 모른다(장 크리스토의 작업에서 보는 바와 같은). 

앞서 작가는 근작에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재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고 했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가져오지만, 그렇게 가져온 패러다임을 매개로 정작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허무는(예술과 일상의 경계 허물기) 데 사용함으로써 종래에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확장 시킨다. 향후 시트지를 매개로 한 작가의 작업이 회화를 넘어, 회화와 일상의 경계를 넘어 어디로 어떻게 향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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