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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연, 구름아이가 들려주는 존재 이야기

고충환

조지연, 구름아이가 들려주는 존재 이야기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존재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이유 같은 건 없었던 것인지, 존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존재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니면 아예 아무 것도 없는 것인지, 나아가 존재 자체가 뭔지, 존재는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등등. 
저마다 주제와 형식은 다르지만, 결국 예술은 이 이야기의 변주일 수 있다. 인간의 자기반성적인 성향이 이처럼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사로잡히게 만드는데, 흔히 그 이야기를 형이상학(아니면 존재론? 혹은 존재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을 오문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질문의 대상이며 설정이 잘못 꿰어진 것인 만큼 당연히 답도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인간의 자기반성적인 성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쩜 자기반성적인 성향이야말로 인간의 타고난 자질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예술가는 그 자질에 민감한 부류들이다. 그렇게 일상을 살 때는 잠자고 있던 그 성향이며 자질이 불현듯 존재를 방문하고 부지불식간에 존재를 사로잡는다. 혹자는 그 불청객의 방문을 받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일상을 열심히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잠시 유보될 뿐.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말은 빚을 청산받기 위해 되돌아온 억압된 욕망을 지시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이처럼 유보된 문제며 지연된 문제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쩜 우리 모두는 존재론적인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채무의식을 자의식이라고 부른다. 유독 자의식이 강한 부류들이 있는데, 조지연이 그렇다. 자의식은 말하자면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며 원동력이 된다. 

여기에 이야기가 있다. 구름아이가 예닐곱 살 때 겪은 기이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다. 구름아이가 깊은 밤에 문득 깨어나 본 비전에 대한 이야기다. 그 비전속에서 구름아이는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다가 오색 점들이 둥실 떠다니는 것을 보는데, 작가는 그 오색 점들이 파동 하는 욕망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욕망들이 비존(非存)으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모호하게 떨리고 있다. 구름아이는 밤마다 수평선 위로 검은 선들이 곧게 솟구치는 것을 보는데, 그 선들은 경계 너머로 녹아 사라진 것들에게 보내는 신호다. 구름아이는 그 신호를 통해 비존에 대한 그리움을 타전한다. 경계의 문 없는 문 앞에는 네 발 달린 기이한 짐승이 지키고 있다. 짐승은 우주, 차원, 생명, 만물, 육체, 마음, 고(苦), 순환, 반복, 소멸, 무의미함, 절대, 영혼, 존재, 무심, 유, 무, 해탈, 윤회...바로 그것의 그림자다. 그 짐승의 목에는 죽음이라는 끈이 매여져 있다. 그리고 그 수문장이 구름아이에게 묻는다. 왜? 도대체 왜? 왜 애초에 우주가 존재하는가. 

이 이야기에서 작가와 구름아이는 동일인일 것이다. 그렇게 치자면 이 이야기는 작가가 예닐곱 살 때 본 비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비전? 깊은 밤에 문득 깨어나 본 비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꿈일 수도 있겠다. 꿈이든 비전이든 작가는 왜 하필 유년시절에 본 것을 지금 다시 새삼스레 일깨우는 것일까. 그리고 그건 과연 유년시절에 본 비전 그대로일까(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에선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만들기도 한다는데, 여하튼). 분명한 건 여하튼 작가가 유년시절에 본 비전을 되불러왔다는 점이고, 이로써 지금도 여전히 그 때 본 그 비전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다. 예지로 가득한 이 이야기는 작가 자신에게 그리고 어쩜 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에게 의미가 있을 어떤 의미심장한 이야기라도 숨겨놓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구름아이인가. 알다시피 구름은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이처럼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구름에다가 인격을 비유한 것이니 정체성 상실이고 정체성 혼란이다. 전형적으로 볼 때가 그렇고, 요새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알다시피 후기구조주의 이후 정체성은 그 자체 고정된 실체며 결정적인 대상으로서보다는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 움직이는 주체, 가변적인 주체, 이행 중인 주체, 그리고 여기에 복수주체(하나의 목소리 속에 다른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하나로 섞여 있음을 인정한 미하일 바흐친의 다성성 개념과도 통하는)가 그것이다. 공교롭게도 작가는 전작에서 이처럼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구름에다가 심지어 핵이며 중심(다중심 多中心)을 부여하기조차 한 것으로 보아 진즉에 이런 변화된 주체관념을 의식하고 있었다고(혹은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나마 실현하고 있었다고) 봐도 되겠다. 
그런 구름아이가 여행을 한다. 여행은 모든 이야기들의 원형이다. 원형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들은 바로 이 원형적인 이야기를 각색하고 변주한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에게 하나의 과제가 주어지고, 그는 그 과제를 풀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그는 장애물도 만나고 조력자도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이러저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주어진 과제를 푸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과제란 무엇인가. 그 과제가 핵심이다. 그 과제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고, 그 과제를 푸는 것이란 진정한 자기(진아)를 얻는 것(사실은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푸는 것이고, 존재의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존재론적인 빚이고, 자의식이다. 모든 이야기는 이 기본서사를 변주하고 각색한 것이다. 
그렇게 구름아이가 가는 길에 오색 점들이 둥실 떠다닌다. 욕망이다. 그리고 욕망은 유혹이 그 본질이다. 유혹이 오색 점들로 표상된 것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이라고 했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그건 알고 보면 실재가 아니고 마음이 불러일으킨 착각(그러므로 유혹)일 수 있다는 말에 꼭 들어맞는 표상이다. 그 욕망들이 손짓하는 경계 너머에 비존(非存)이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비존을 그리워한다. 비존? 존재가 아닌? 여기서 비(非)와 무(無)는 다르다. 비는 00가 아니라는 말이고, 무는 00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비존은 최소한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담 어떠한 식으로든 존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존재돼 존재가 아닌 존재다. 거듭난 존재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덧입은 존재다. 각성한 사람이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다. 퇴행적으로 보면 어른을 벗고 어린아이를 되찾은 존재다. 어쩜 어린아이는 어른의 상실한 원형,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원형일지도 모른다. 앞서 작가는 유년시절에 본 비전을 되불러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 때 본 그 비전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다. 아마도 작가는 그렇게 자신의 유년(구름아이)으로 대변되는 상실한 원형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존재와 비존재를 가름하는 경계를 수문장(짐승)이 지키고 있다. 이 상황설정 역시 이야기들의 원형이며 원형적 이야기에 해당하는 신화 그대로다. 그 경계 곧 관문을 통과하면 경계 너머로 갈 수가 있다. 출생의 비밀을 풀 수가 있고,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가 있다. 바로 통과의례고 정화의식이다. 여기서 수문장은 스핑크스가 변주된 것이다. 방문객에게 수수께끼를 내 그걸 풀면 통과시켜주지만, 만약 풀지 못하면 방문객을 죽이는 것이 수문장에게 주어진 역할이다(짐승의 목에는 죽음이라는 끈이 매여져 있다). 여기서 작가는 존재의 조건 혹은 한계를 열거하고, 수문장을 그 조건 혹은 한계의 그림자라고 부른다. 그림자란 기미다. 기미는 양가적이다. 실재로 건너가는 길목(실재의 그림자)일 수도 아님 그저 허방(그냥 그림자)일 수도 있다. 삶이 꼭 그렇지가 않은가. 저마다 그림자를 부여잡고 살지만, 어떤 그림자가 실재의 그림자인지, 실재로 건너가는 길목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수문장이 구름아이에게 묻는다.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 왜 존재가 존재하는지 누가 알랴. 아마도 그걸 몰라서 존재는 죽을 운명인 모양이다. 
여기서 모르는 게 또 있다. 경계 너머에 도대체 뭐가 있는가. 작가는 다만 비존(비존재?)이라고 했고, 경계 너머로 녹아 사라진 것들이라고만 했다. 부재하는 것들? 죽은 것들? 비존재들? 거듭난 것들? 상실한 원형? 잃어버린 유년? 알 수 없는 일이다. 작가는 그 알 수 없는 것들을 그리워한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그 그리움은 모든 존재의 그리움이기도 하다. 가없는 수평선 앞에 서면 어김없이 발동되는. 그리고 그렇게 가없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처음엔 어린아이의 그림에서 착상된 것인가 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표현이 그랬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작가의 평소 인격이, 작가의 예술가적 아이덴티티가 저절로 발현된 것일 수밖에 없다. 전작에서부터 느꼈지만, 작가에게 형식을 위한 형식, 형식에 맞춘 형식은 의미가 없었다. 순진할 정도로 그랬다. 그렇게 작가는 매번 형식에 구애 받지 않으면서 형식을 만들고 있었다. 어쩜 아직 오지도 않은 형식을 선취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그에게 형식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절실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를테면 작가는 유독 구름이라는 특정 소재에 집착했는데, 그 집착은 오히려 집착하지 않기 위한 집착이었다. 다시, 구름은 그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고정된 무엇도, 결정적인 무엇도, 견고한 무엇도 아닌 것들을 표상한다. 그 무엇도 아닌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모두인 존재를 표상한다. 존재가 아닌 존재, 비존재(작가는 비존이라고 했다)를 표상한다. 
그리고 구름은 결국 작가 자신이었다. 구름아이가 그랬다. 그러므로 구름아이는 어쩜 구름이 그런 것처럼 흐르는 것들, 이행 중인 것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잊어버린 것들, 그러므로 덧없는 것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순수함 자체, 순진무구함 자체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 내면의 구름만큼이나 가벼운 아이를 내세워 존재의 무거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그러므로 어쩜 가벼운 아이와 무거운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와 무거운 이야기는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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