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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숙/ 매달린 십자가들, 떠도는 유령들

고충환

이윤숙/ 매달린 십자가들, 떠도는 유령들 


전시장은 건물 지하에 있었다. 대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노출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하벙커나 대피소 같다고 느꼈다.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기 전 옆으로는 통로가 있었는데, 어둑한 벽면을 스크린 삼아 영상이 투사되고 있었다. 좁고 긴 통로 위로 쏟아지는 영상이 영상터널을 보는 것 같은 긴박감을 준다. 해안선을 따라 철책이 연이어져 있고, 그 철책 위로 크고 작은 십자가의 실루엣들이 어른거린다. 떠도는 유령들을 보는 것도 같고, 죽은 혼령들이 아우성치는 소리 없는 메아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면 양쪽으로 측백나무가 늘어선 샛길이 관객을 맞아들인다. 정화를 위한 입문과정 같고 관문 같다. 그렇다면 전시장 안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건 정화의식? 그런데 웬 측백나문가. 측백나무는 향이 강해 공기정화기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병든 사람이나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는데 소용되었다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정화의식과 무관한 것 같지는 않다. 작가가 교외 작업실에서 직접 키운 것들이라고 한다. 한 번씩 간벌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나무들이라고 한다. 작가는 나무만 키우는 것이 아니다. 작가(레지던시)도 키우고, 지역공동체(대안공간)도 키우고, 골목길(벽화마을)도 키운다. 작가에게 키우는 건 예술을 실천하는 것이고, 그 자체가 이미 예술이다. 
그리고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온갖 형태의 십자가들이 철사 줄에 수도 없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30여년 작가가 이러저런 경로로 모은 300개쯤 되는 십자가들이라고 한다. 작가 자신이 조각가인 만큼 직접 만든 것도 있고(작가는 십자가 외에 각종 성상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다), 여행하면서 현지에서 수집한 것도 있고, 더러는 신자들로부터 건네받은 것들이라고 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르겠거니와, 한눈에도 십자가들은 조형가치와 골동가치보다는 상처와 사연 같은 상징가치(혹은 표상성)가 강한 것들이다. 성한 것도 있지만, 대개는 깨지고 터진, 썩어 문드러진 십자가들이 저마다의 상처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강한 십자가들이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극적인 효과를 강화한다. 어둑한 공간에 비친 조명으로 인해 대비가 강조되면서 극적인 효과가 배가된 것이다. 재차, 죽은 혼령들을 보는 것도 같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것도 같다. 
국립협대미술관 소장 작품 중에는 유태인학살과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작업하는 크리스티안 볼탄스키의 작업 <유령들>이 있는데, 오브제보다는 오브제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극적 효과를 준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십자가를 통해서 어떤 종류의 상처와 사연을 표상하고 싶은 것일까. 폭력으로 희생된 여성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고, 분단현실이 낳은 희생자들(아마도 대개는 이념적인 이유로 희생되었을)을 위무하고 싶다고 했다. 
부연하면, 이번 전시는 경기여성연대가 작가를 초대하는 형식으로 열렸다. 아마도 상처와 치유와 재생을 키워드로 가져가는 작가의 평소 작업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소그룹 슈룹의 <예술정치, 무경계프로젝트>를 실천하는 수행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참고로 작가는 슈룹 회원으로서, 2017년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 비무장지대 250킬로미터에 달하는 철책 길 따라 걷기를 수행한 바 있고, 그 과정을 낱낱이 영상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한차례 전시를 연 바 있고, 이번 전시는 그 후속작업으로 보면 되겠다. 이처럼 작가가 여성희생자와 분단희생자를 지목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지만, 사실 작가가 위로하고 위무하고 싶은 희생자가 따로 특정되거나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정치, 무경계프로젝트>라는 타이틀에서도 엿볼 수 있듯 작가는 제도가 그어놓은 모든 종류의 불합리한 경계로부터 폭력이 초래된다고 본다. 그런 만큼 그 경계를 타파하는 것이 곧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부정과 긍정이 더 이상 모순이 되지 않는 세상(작가의 말)을 그리는 것이다. 
그렇게 전시장 공간은 극적 긴장감이 감도는 연극무대 같다. 사람 대신 십자가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사물극 같다고나 할까. 보이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혼령들을 불러내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제의의 현장 같다고나 할까. 그 연극무대 한 가운데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제의의 중심이며 클라이맥스에 해당할 그곳 바닥에는 나뭇가지들, 테라코타 두상들, 그리고 십자가가 어우러져 있다. 아마도 자연과 인간과 영성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통합되는 유기적인 관계를 표상할 것이다. 그 관계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치유와 재생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다. 아마도 지상의 성소에 해당할 그 공간 가운데 부분에는 위쪽으로 좁고 높은 유리천장이 내려다보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그 위치를 맞춰 바닥에 연출된 모습 그대로 유리천장에 반사되게 했는데, 마치 땅이 하늘 위로 들어 올려진 것 같은, 땅과 하늘이 서로 소통하는 것 같은 극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설치작업인 만큼 공간연출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부분(화룡점정?)으로 봐도 되겠다. 
그리고 디귿자 형태의 벽면에는 영상이 투사되고 있었다. 한반도 비무장지대 철책 길을 따라 걸으면서 찍은 영상, 올해 초 작가가 러시아와 남미를 여행하면서 찍은 영상, 남미로 간 조각가, 그리고 여성평화걷기 운동을 기록한 영상들이다. 세세한 차이를 도외시하고 본다면 대략 철책선과 그 위에 어른거리는 십자가 실루엣들, 그리고 광활한 자연풍경이 교차하는 풍경들이다. 영상과 설치가 서로의 언어를 교환하면서 한편의 드라마틱한 서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도 같고, 스펙터클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리고 벽면이 없는 한쪽으로 트인 공간에는 따로 관객참여를 위한 장을 마련했다. 불합리한 경계에 대한, 그 경계를 타파할 수 있는 방책에 대한, 그리고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자연과 치유, 상생과 화해에 대한 저마다의 소회를 손바닥만한 크기의 나뭇조각에 그려 설치하게 했다. 이 일련의 내용들은 작가의 평소 예술 관념이 반영된 것이며 이번 전시의 주제이기도 한 것이어서 사실상 전시감상을 저마다 그림으로 표현한 것일 수 있고, 그런 만큼 그 자체가 또 다른 형식의 전시리뷰가 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가 열린 장소와 주제를 보자. 이번 전시는 수원 고색뉴지엄 전시실에서 열렸다. 수원산업단지 내에 10년간 방치되었던 폐수처리장을 문화공간으로 재생한 곳이다.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유휴공간이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마침 작가도 도시재생사업을 실천하고 있다. 수원 성곽 내 구도심을 대안공간과 지역공동체 공간으로 탈바꿈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해관계가 상호 부합할 뿐만 아니라, 영상과 설치가 어우러져 극적 효과를 연출하는 작가의 작업 성향과 공간의 성격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주목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거친 공간과 센 작업이 서로 궁합이 맞아떨어진다는 얘기다. 그리고 주제 <바람, 온새미로>에서 온새미로는 자연 그대로, 변함없는, 그 자체로 온전한, 이라는 의미의 순 우리말이라고 한다. 자연의 의미와도 다르지가 않다. 아마도 그 자체로 평소 작가가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관념이며, 작업에 대한 태도를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런 작가의 관념과 태도가 물화된 형식을 얻는 또 다른 장이며 계기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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