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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정 / 탈주를 위한 변신의 무대

이선영

탈주를 위한 변신의 무대

  

이선영(미술평론가)


  

층을 나누어 설치한 수 십 점의 작품이 걸린 고수정의 [잘 드러나지 않는 통로] 전에는 작업을 풀어나가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이 많이 담겨 있다. 전시 부제에 있는 ‘통로’는 작품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에게 통로란 작품이 잘 풀리기 위한 지름길이기도 하고, 그렇게 작품으로 만들어진 길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무엇일 수 있다. 굳이 그 어려운 길을 가려는 자에게만 열리는 마술 같은 길이다. 작가의 카프카나 카프카적인(Kafkaesque) 세계에 가진 관심을 생각할 때, 통로란 무엇보다도 탈주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향한 탈주인지는 불확실하다는 점이 카프카적 부조리로 지속된다. 탈주의 과정을 포함한 작품은 무엇보다도 미지의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지 안다면 굳이 갈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비록 제자리에서의 미세한 변화일지라도 이동의 가능성 그자체다. 예술은 이러한 가능성에 열린 몇 안 되는 수단이자 목적이다. 



방향을 상실한 존재 (50M 116.8 x72.7 oil)



고도를 기다리며 (3P 27.3x19.0 oil)



하지만 탈주를 추동하는 억압과 갈등의 요소들은 일시적으로 해소될 따름이다. 자연적 욕구와 달리, 인간적 욕망은 끝이 없다. 자연적 욕구와 주체의 욕망 사이에서의 요구를 상상적으로 충족시키려는 것이 예술이다. 풍요 속 결핍이라는 역설적 시대의 키워드인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 작가는 라깡에 관련된 수업을 챙겨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론적 복잡함과 정교함에 비해 허무한 결론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차라리 작가가 심리학이나 철학보다 더 오랫동안 심취했던 문학에서 반복되었던 주제였던 것이다. 고수정은 작품 제목 아래에 그 작품에 관련된 이야기를 적어놓곤 한다. 그 또한 작품만큼이나 은유적이지만, 순간적으로 빛을 발했다가 스러지는 마음의 파편들을 모아 놓는 것은 중요하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면 사라져 버리는 (무)의식의 편린들의 저장고이며, 저장고 속의 몇몇은 어느 순간 생각지 못한 결실을 맺기도 한다. 


문자적 기록은 고수정의 그림이 어떤 사고의 도해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그의 사유 자체가 유동적이기에 작품은 복잡하고, 문자적 텍스트는 은유적이기에 그것의 시각적 번역이 재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작가에게 작업이란 거듭되는 변형의 과정이다. 최초의 출발이 무색한 뒤집기와 도약의 연속이다, 현대의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은 예술과 근친 관계다. 그것들은 예술을 지속적으로 호명할 뿐 아니라, 불투명한 문체들 또한 공유한다. 탈주는 고수정이 관심을 가져왔던 카프카적 변신이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K’같이 익명적으로 처리되곤 하며, 그렇기에 특정 개인을 넘어서 보편성을 확보한다. 타인을 위하는 척 하지만 결국은 이기적 속내를 드러내는 작품 속 등장인물이나, 가학피학적인 관계 속의 인간은 그 누구도 아니지만 모두일 수 있는 대중-개인주의의 모습이다. 인간으로 대표되는 유기체적인 덩어리는 촘촘한 권력의 그물망에서 탈주하기 힘들다. 




나는 타인 (25M 80.3x53.3 oil)



비좁은_구상 (50F 116.8x91.0 oil)



작은 틈으로도 빠져나갈 수 있는 변신, 또는 틈의 발견이 필수적이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취약한 현실의 틈을 벌릴 수도 있다. 작품 [발상]의 구멍 난 양말에서 머리가 삐죽 나오는 자화상은 틈과 구멍이 고수정의 작품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위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길거리에서 본 과일 트럭에서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을 생각한다. 감정 이입될 수 있는 다른 유기체로의 변신이 여의치 않다면 유기체적 총체를 이루는 부속 기관들을 탈각시켜버린 ‘기관 없는 신체’로의 변신도 방법이다. 정해진 시공간 속의 난장인 축제이자 작품 속에는 인간이라는 기준을 초월한 존재들이 출몰한다. 고수정의 작품에서는 각종 괴물이 어른거린다. 이것저것이 뒤섞인 것인 괴물은 과잉 또는 결핍을 상징한다. 너무 많은 것은 없는 것과 같은 차원에 놓인다. 이러한 괴물은 숭고할 수도 비천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기준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중심주의가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타자화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이탈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처럼 억압된 타자는 회귀한다. 고수정의 작품에는 자신의 죽음을 보는 환시는 물론, 담배 연기 같은 분자적 상태로도 변신한다. 작품을 통해서 남김없이 사라지고픈, 그래서 오히려 작가로서 복귀할 수 있는 역설이 있기에 이러한 가학적 충동은 합리화된다. 고수정에게 작업은 무엇보다도 변신의 무대다. 작품 속 주인공은 대부분 작가다. 거울 같은 상상의 무대인 작품에서 작가의 분신은 기괴한 모습이다. 환상의 무대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상적으로 성취하려 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적이지만, 고수정의 경우 반대의 길을 간다. 기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작가와 더불어 등장하는 것들도 비슷한 분위기다. 쥐처럼 작가도 좋아하지 않는 징그러운 도상도 자주 등장한다. 작가는 여러 작품에 출몰하는 쥐에 대해 ‘꿉꿉한 느낌’, 즉 안 좋은 느낌을 말한다. 




Mental_tower (30P 90.9x65.1 oil)



가공인물 (60F 130.3x97.6 oil)



도전먹빵 (1F 22.7x15.8 oil)



이번 전시 바로 전의 2019년 개인전 제목이 [나, 거울 속의 단편]이었다. 분열된 몸을 상상적으로 봉합하기는커녕 분열을 가속화시킨다. 화면에 가득한 인물들이 있는 작품 [가공 인물]은 몸은 하나인데 얼굴은 여럿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텅 빈 캔버스를 과잉으로 채우려는 삶은 픽션’이라고 말한다. 고수정의 작품에는 ‘먹방’ 등 과도한 소비에 대한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결핍의 또 다른 모습이다. 토할 정도로 끝없이 먹어대는 먹방 이미지는 과소비로 성장을 일구는 자본주의의 희화화된 모습이다. 상반신이 가려진(또는 하반신과 따로 노는) 존재를 그린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 작가는 ‘채워지지 않는 장소에서 나는 나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추락 공포가 있는 작품 [불안 기포]에서 추락하는 존재를 받아주기에 너무나 취약한 종이배는 불안을 표현한다. 지상의 포식자들을 피해서 나무 위에서 살았던 인류의 조상에게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부상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추락은 원초적 공포로 각인되어 격세유전한다. 


작품 [방향을 상실한 존재]에서 주체는 마네킹으로 사물화된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라는 인생의 핵심 주제는 시선을 매개로 전개된다. 타자 시선은 자신의 관점과 차이가 있기에 이 줄어들지 않는 간극을 채우기 위한 움직임이 발생한다. 고수정은 시선의 간격을 자연에서도 느낀다. 눈을 가리고 나무숲을 가는 여자를 그린 작품 [풍경이 본다]는 나무에 박힌 옹이들이 흡사 사람의 눈처럼 보이는 숲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랭보의 싯귀를 따른 작품 제목 [나는 타인]을 통해서는 타자를 보려 했지만 결국은 자신을 보는 상황을 표현한다. 타자에게서 나를 보는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모든 것의 중심에 자신을 놓는다. 그것은 현실 및 진실로부터 소외된 자, 즉 타자일 따름이다. 작품 [굴]은 자기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구멍을 원했지만, 그런 소박한 희망조차도 좌절됨을 표현한다. 작가는 ‘굴은 무너지기 쉽고 바스러지기 쉽다’고 말한다. 




굴 (60S 97.0x97.0 oil)



발상 (3F 27.3x22.0 oil)



불안기포 (4F 33.4x24.2 oil )



누군가를 이끌 수 있는 전능한 주체가 등장하는 작품 [안내인]에 대해 작가는 ‘그곳은 깊은 내면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외부’라는 라깡의 말을 인용한다. 자아의 상상적 무대인 작품 또한 주체의 분열을 공유한다. 작품 [비좁은 구상]에서 생각하는 포즈의 얼굴을 가진 주인공 무릎 위에는 아무 생각 없는 또 다른 자아가 자리한다. 작품 [출구 없음]에서 캔버스가 가득 새워진 방 한구석에 어디론가 이어지는 어두운 계단들은 작업의 출구 찾기가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작품 [다른 장소]와 [관람]에서 작가는 자신의 영정들이 있는 그림을 표현한다. 그림이라는 거울에서 시체가 된 자신의 분신을 보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서 스스로를 살해하는 고수정의 작품에는 죽음의 충동이 내재한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본능은 이전의 상태를 복원하려는 유기적 생명체에 내재한 어떤 충동이 있다고 봤는데 그것이 죽음의 본능이다. 모든 유기체가 무기체로부터 나왔으므로 유기체는 본능적으로 그 이전의 무생물, 혹은 정지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대립을 넘어서 모든 생명체의 목적은 죽음이라고 본 프로이트는 죽음 본능이야말로 본능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죽음충동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줄리안 페파니스는 [이질성의 철학]에서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에 열락 또한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삶의 불안정성을 비유기적 상태의 안정성으로 되돌리려는’ 죽음의 본능에 봉사하는 것이 쾌락원리이다. 우리가 현실원리 속에서 산다면 쾌락은 바깥 세계의 영향을 나타낸다. 자아의 바깥, 즉 타자와의 대화를 지속해왔던 작가에게 열락과 결합된 죽음충동은 ‘체계를 개방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것’(라캉)이다. 주체 뿐 아니라 그림 또한 타자에 열려 있다. 고수정의 작품에는 또다른 작품들이 등장하곤 한다. 자신의 메시지와 관련된 작품의 호명이다. 급격한 원근법이 있는 뭉크의 그림을 참조 한 작품 [픽션]에서 작가는 ‘나와 내 그림 사이엔,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겁에 질린 얼굴이 있다’고 고백한다. 




픽션 (30F 90.9x72.7 oil)



새로운 예속 (30F 90.9x72.7 oil)



다른 작품에서도 뭉크, 마티스, 루소의 그림이 자주 발견된다. 뭉크에 비해 마티스와 루소는 조화롭지만, 이전 시대 보다 한층 ‘순수’해진 근대 회화에 장식이나 야생의 관점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타자와의 대화라는 맥락에 놓인다. 근대인의 불안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뭉크의 비명은 작업이라는 칼 위에 올라간 여자의 비명과 겹쳐진다. 작품 [멘탈 타워]에서는 화면에 마티스와 뭉크의 그림 등이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뭉크의 불안, 벤야민의 틈, 카프카의 변신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불안-틈-변신과 관련된 일련의 고리가 고수정의 작품에 편재한다. 마티스의 붉은 실내의 구성이 있는 작품 [새로운 예속]에서 타자와 대화를 나누는 자신 또한 타자임을 가면을 쓴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니체-들뢰즈를 따라서 가면 뒤에 본 얼굴은 없다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관심은 ‘제 2의 성’으로 간주된 이들에게 더 자연스럽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에 의해 유명해진 ‘제 2의 성’은 다름 아닌 여성이다. 


보부아르는 [제 2의 성]에서 ‘그녀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정의되고 차이화 되지만 남성이 여성과의 관계에서 정의되고 차이화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우발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 대립되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그는 주체이고 절대이다. 그녀는 타자다. 타자라는 범주는 의식자체 만큼이나 원초적인 것이다’이라고 말했다. 조셉 칠더즈는 [현대문학, 문화 비평사전]에서 라캉의 사고와 보부아르의 사고의 연결점을 지적한다. 라캉의 사상이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호하지만, 타자에 대한 관심에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이 사실이다. 딜런 에반스는 [라캉 정신분석 사전]에서 ‘대타자는 대타성(the Other sex)이다. 대타성은 남성 주체이든 여성 주체이든 항상 여성이다’라고 말한다. 주체의 무의식이 분출되는 예술작품은 타자의 담론이다. 타자는 동일자에 의해 정복되고 승화되는 대상이 아니라 동일자의 통일성을 희생시켜서라도 기꺼이 맞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타자적 작품은 고수정 안의 타자와 독특한 연결고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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