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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필 전 / 실재에 대한 직관

이선영

실재에 대한 직관

윤성필 전 (2022. 2. 10 – 3. 8, 표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Maxiature-일련번호]로 붙여진 윤성필의 작품은 기하학적으로 딱 떨어지는 완벽한 형태가 특징이다. 기하학적 형태라고 단순한 것은 아니다. 안팎의 관계가 모호한 그의 작품은 ‘고무판 위의 기하학’이라고 비유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차원까지 상징한다. 그는 큰 것과 작은 것을 모두 포함하는 역설적 작품 제목을 통해 고무줄처럼 유동적일 수 있는 작품 크기를 암시한다. 갤러리 3개 층에 걸쳐 전시된 작품들은 계획이자 결과물이다. 시뮬라크르의 시대에는 모델과 완성작 간의 거리는 대폭 줄어든다. 거푸집이 필요 없는 복제의 시대에 조각 또한 발상의 변화를 요구받는다. 유학 이후 국내외에서 꾸준히 발표되어온 윤성필의 미학적인 뿌리는 20세기 초의 구성주의로 보인다. 20세기 초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구성주의는 자연의 외피를 모방하기보다는 자연을 구조적으로 탐구했다. 굳이 이전의 전통과 관련짓자면, 재현이 아니라 상응이자 유비이다. 




Maxiature 20-1, 2020,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 440 X 380 X 410cm(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표갤러리)



Maxiature 20-2, 2020,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 260 X 260 X 350



분석적인 경향을 가지는 구성주의에서 발상과 과정 그리고 결과 사이의 간격은 줄어든다. 구조적 본질을 표현하려는 경향에서 구조를 감싸는 장식적 외피는 불필요했다. 가령 [제3인터내셔날 기념비](타틀린)은 실제로 구현되지 못한 모델이었지만,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서유럽의 구성주의 또한 많은 실험작을 남겼다. 구성주의는 미술의 영역을 넘어 환경의 차원으로 고양, 또는 해소되었다. 하지만 새로이 발굴되는 재료나 기술에 의해서 새로운 방식의 융복합도 가능하다. 전시장에는 작품과 색을 맞춘 좌대는 물론, 사진 이미지로도 만들어져 벽에 붙어있다. 그렇게 전시된 평면작품들 또한 추상 회화같은 느낌이다. 3차원 현실에 존재하는 조각작품이 크기를 초월할 가능성이 생겨난 것은 기술 덕분이다. 이때 기술은 예술에 필요한 기술뿐 아니라, 작가가 활용할 수 있는 동시대 첨단 기술력을 포함한다. 2차원뿐 아니라 3차원 출력 기술은 작은 부품부터 건축적 차원에 이르는 생산물을 뽑아내곤 한다. 


가령 최근 개관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미래박물관]은 건축이 조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건축물 앞에 조각이 놓이는 것이 아니라, 건축 자체가 조각인 것이다. 물론 건축의 조형적 경향은 근대 이래 계속된 것이지만, 기계 복제기술은 이전의 경계를 더 쉽게 넘나들게 한다. NFT 같은 새로운 유통방식은 복제가 원본임을 보증하는 역전 현상까지 나타낸다. 그것은 복제 때문에 원본의 가치가 고양되는, 즉 서로를 지시하면서 강화되는 메카니즘의 완성본이라 할만하다. 어느 것이 더 먼저라 할 수 없는 탈중심화 경향이다. 조각에서는 소형 모델을 제작하여 완성작을 가늠하는 관례가 있다. 그림으로 치면 밑그림인데, 현대미술에서 드로잉 자체가 자족적인 작품으로서의 위상을 가질 수 있게 되듯, 조각에서의 모델 또한 그럴 수 있다. ‘Maxiature’라는 조어가 암시하는 바가 그것이다. 물론 전시장의 좌대 위에 놓인 작품들은 무척 섬세해서 그렇게 한눈에 쏙 들어오는 작품이 기념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을 때, 또 다른 기술적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Maxiature 20-3, 2020,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 440 X 440 X 280cm



Maxiature 20-5, 2020,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 370 X 370 X 300cm



Maxiature 20-6, 2020,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 200 X 200 X 420cm



윤성필의 어떤 작품은 종이접기처럼 날렵하고 어떤 작품은 방파제 구조물처럼 묵직하다. 전시장에서의 실험적 작품만큼이나 공공미술 제작 경력도 꽤 쌓아온 작가의 경우, 큰 작품을 축소해서 전시장이라는 한 장소에서 여러 작품을 볼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즉 그것은 선택된 이후에 현실화 될 수 있는 모델이다. 그의 작품은 대칭과 균형, 질서와 조화, 고요와 역동 등 조각 예술이 줄 수 있는 심미적 기준 외에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발터 벤야민)이라는 화두를 포함한다. [Maxiature] 시리즈는 마치 사진을 출력할 때처럼 같은 형태의 크기를 다르게 제작할 수 있다. 어느 맥락에 놓이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사안이다. 전시장 안이나 바깥이나 똑같은 공공영역이며, 작품이 한번 발표되면 실제로 보는 만큼이나 인터넷 등에서 디지털 이미지로 소통되는 경우가 많기에, 현대의 작가는 그 모든 차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으로 마감된 깔끔한 색감,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하고 안팎으로 미묘하게 연결된 섬세한 형태는 여러 인터페이스의 회로를 거칠 때도 실제로 볼 때의 느낌을 보존하며, 심지어는 더 멋져 보이기도 한다. 작업의 많은 과정이 컴퓨터를 매개로 한다면 그만큼 인터페이스에도 최적화될 수 있다. 특히 조각작품은 사진이라는 또 다른 예술의 힘이 아니고서는 이미지로 소통되기에 제한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도시적 세련됨과 활력이 내장된 윤성필의 작품은 도시 자체가 인터페이스가 되어 가는 경향과 어울린다. 기계 복제는 원본의 아우라를 사라지게 했지만, 기술은 새로운 아우라를 덧입힌다. 윤성필의 작품에서 철가루 페인트 도장을 한 몇 작품은 거칠거칠한 느낌이다. 구조주의처럼 한날한시에 만들어진 것도 다른 시공간대의 흔적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감과 기술력의 집적체들은 고요함 속의 약동이 있다. 




Maxiature 20-8, 2020,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 460 X 220 X 450



Maxiature 20-9, 2020,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 240 X 240 X 400cm



Maxiature 20-10, 2020, 레진 위에 철가루 페이트 도장, 340 X 340 X 490cm



안정감을 주는 그의 작품은 현대적인 고전주의라고 할만하다. 세모 네모 식의 단순한 기하학이 아니라, 복잡한 곡면과 섬세한 각, 매끈한 반사면들이 조화를 이룬다. 그의 작업은 현대미술 하면 우선 떠오르는 불안하고 거칠고 아마추어식으로 내던져진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한 경향은 최초의 충격이 가시고 나서, 또는 그 개념이 소비되고 나서 피로감을 주었으며 대중의 불신을 야기했다. 이것저것 다 쳐낸 순수예술은 본질만 남기보다는 황폐해졌다. 코드화된 세상은 이전보다 더 많이 매끄러워졌고, 예술 또한 변화된 세상과 상호작용한다.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방식인 기하학은 발전된 기계와 더불어 업그레이드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나오는 것처럼, 이상적인 형상들은 세상에 대한 모델이기도 하다. 삶을 살면서 우연적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문제들이 많아지다 보면 고요한 시공으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세상이 주는 자극이 너무 많고, 개인에게는 늘 과부하가 걸려 있다. 


예술은 이러한 욕망에 대답하려 한다. 작가 또한 번잡한 세상에서 한걸음 물러나 그것을 구조적으로 직관하면서 자신만의 규칙으로 재구성하려 한다. 단지 고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감과 창안이 현실적인 방해 없이 매끄럽게 구현되는 시공에서 작업하면서 재미와 의미를 찾는다. 현실적 풍파가 없는 고요한 지대에서 미묘한 차이들과 유희하는 것은 예술가만의 소망은 아니다. 정해진 규칙만이 작동하는 기하학은 이상적인 영역이다. 시오반 로버츠는 세계를 대칭과 패턴으로 읽은 기하학자 콕세터를 연구한 저서 [무한 공간의 왕]에서 이러한 이상주의의 원천을 고대에서 찾는다. 세상을 수로 파악한 피타고라스나 그의 후계자인 플라톤은 기하학을 신성시했다. 시오반 로버츠에 의하면 ‘신은 언제나 기하학 원리를 적용한다’고 선언한 플라톤은 우주의 비밀이 숫자와 형상으로 구체화되어 있다고 여겼다. 이데아는 이러한 형상에 바탕하는 세계다.



Maxiature 20-11, 2020,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 220 X 150 X590cm



Miniature 20-12, 2020, 레진 위에 우레탄 도장, 300 X 300 X 390cm



이데아적인 기하학 형상들인 원, 구, 정사각형, 정육면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물리적 세계와는 독립적인 그들이 속한 보다 높은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어졌다. [무한 공간의 왕]의 평가에 의하면, 수학적 형태로 이루어진 플라톤의 세계는 근대 과학이 지금까지 계속 따라온 방법론을 제공했다. [무한 공간의 왕]은 ‘이데아적 개념은 수학적 관념이다. 수학적 개념이나 체계는 그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실재가 된다’(로저 펜로즈)는 말은 인용하면서, 체계가 실재한다는 관념은 위로를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수학자들이 수학을 독자적인 실재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 예술가는 이러한 관념을 감각적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관념이 단순히 피상적 장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 요컨대 작품은 실재에 대한 직관이라는 점이다. 세상의 어떤 것을 외적으로 흉내 낸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힘있게 서 있는 예술작품은 실재에 대한 모델이자 직관이며, 더 나아가 실재 그자체 일 수 있다. 

 

출전; 미술평단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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