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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예 / 순간적인 것의 기념비

이선영

순간적인 것의 기념비

  

이선영(미술평론가)


  

전도예의 작품에서 꿈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낮/밤의 관계처럼 현실과 평행선상에 놓인 또 다른 세계로서의 꿈은 그 자체로도 강렬하다. 꿈 속의 서사는 깨고 나면 불확실해지지만 느낌은 남는다. 전도예는 그 감정을 색으로 표현한다. 튀는 듯한 강렬한 색의 원천은 현실이 아닌 꿈이다. 꿈에서 겪은 심신의 강도는 현실까지 전해지며 그 흔적을 남긴다. 꿈 속에서 외치는데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 무서운 상황에서 도망가는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등등...전도예는 부친이 돌아가시는 악몽을 꾸고 깬 후 눈물이 얼굴을 모두 적셨던 경험을 말한다. 작가 말대로 악몽은 오히려 다행이다. 작업은 악몽 속 부정적 감정을 빼내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직접 꾼 꿈들의 내용을 각색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그 속의 감정을 드로잉과 색으로 나타낸다’고 말한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스타일은 이전 작업에서도 보여진다. 




여름 불도 쬐다 나면 섭섭하다, 현수막 천에 혼합재료, 227×170cm, 2020



천년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이전 작품 [믿음의 배신] 시리즈는 설화로 가득한 실제 공간에서 허구의 몫을 강조했다. 최초의 전공이 불교미술이었던지라 초기작으로 갈수록 환상적이다. [파니 아띠 : 하릴없이 노는 친구] 시리즈는 불교적 도상과 상호작용하는 귀여운 캐릭터를 보여준다. 꿈은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대로 압축(condensation)과 전치(displacement)이기에, 해석을 요구한다. 해석은 한번이 아니라 거듭되어 이루어지며, 이러한 해석과정은 자기 안 타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다. 예술은 대표적인 자기 주도적 활동이지만, 의식의 산물만은 아니다. 작가의 심신 상황은 지진파처럼 작품에 반영된다. 전도예의 작품에서 다른 파장과 파고를 가지는 선들이 그 예다. 물론 사는 것과 말하는 것에는 차이는 있다. 예술은 살기 보다는 말하기에 해당 된다. 언어적 존재에게 삶과 분열은 필연적이다. 현대철학은 언어의 분열적 조건을 밝히며, 이는 언어의 주체로 가정된 존재의 분열 또한 암시한다. 


꿈은 현실의 조각조각이 색다르게 이어진 또 다른 현실일 뿐 비현실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재편집처럼 상당한 정도의 합리성부터 완전히 뒤죽박죽된 혼란까지 이른다. 꿈과 예술은 유사하다. 시간의 차원에서 보자면 몽타주에 기반하는 영화가 그렇고, 공간의 차원에서 보자면 꼴라주에 기반하는 그림이 그러하다. 학부 때 불교미술을 전공한 작가가 영향을 받은 불교적 시공간관 또한 합리주의에서 가정되는 선적 인과관계를 해체한다. 전도예의 작품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등장한다. 공간 또한 시간처럼 복합적이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 미래는 하나라는 불교의 시간관을 말한다. 현실의 재현을 넘어서는 미학이 현대예술의 주류가 된 이래 꿈과 무의식, 우연적 요소는 중요시되었다. 하지만 꿈 자체는 재현되기 힘들다. 누구나 꿈을 꿀 수 있지만 이러한 잠재성이 결실을 맺으려면 현실적 단계가 필요하다. 불안정한 것을 안정된 무엇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흥행을 보장할 것이다. 




그 여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현수막 천에 혼합재료, 235×176cm, 2020



여름을 견디다, 현수막 천에 혼합재료, 260×180cm, 2020



오늘날 정보사회는 밤낮을 불문하고 개인의 자투리 시간을 사업에 십분 활용한다. 예술 또한 확정되지 않은 현실을 구체화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도전이다. 작가에게 그것은 기법으로 나타난다. 기법은 고안과 수정이라는 점에서 실험인데, 그 과정은 끝없는 작업을 통해서만 진행된다. 손을 놓고 있는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하다. 작가란 손과 함께 생각하고 꿈꾸는 자이다. 꿈은 현실과 같은 단어를 쓰곤 하지만, 의미의 연관 고리는 좀 더 느슨하다. 재현은 선적인 인과관계를 요구하는데, 꿈에는 잃어버린 고리들이 있다. 이 비어있는 부분들은 부조리와 넌센스를 낳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의미의 원천이다. 현실 세계와 평행한 대안의 세계로서의 꿈과 환상은 예술과 친근하다. 그러나 재현주의 철학의 가정과 달리, 현실 또한 선적 인과관계로 배열되지 않는다. 현실은 이성적 질서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되기를 요구받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간극은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을 전부라고 보는 부류는 이를 불완전하거나 불안정한 것, 즉 바로 세워야 하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본다. 전도예는 시작과 끝이 합리적으로 맞물리는 노동의 방식이 아니라, 작업의 과정 그자체를 즐기는 작가다. 읽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고 무의식적으로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다. 위반은 쉽지 않고 희생이 따를 수도 있기에 이들은 꿈으로 보상받는다. 작가는 어릴 때 어머니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종이에 적어 쓰고 버리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보내지 못한 편지는 그자체 만으로도 생성되는 무엇이 있으며, 그러한 과정이 결국은 작업의 모델이 된다. 작업은 자기 안의 무언가를 계속 쏟아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닿을 명확한 메시지라기 보다는, 우선적으로는 작가가 그 시간들을 살아내는 수단이다. 그것이 유일한 수단이자 목적이 되는 사람이 바로 작가이다. 




나의 여름, 장지에 혼합재료, 27×22cm, 2022



너의 여름, 장지에 혼합재료, 27×22cm, 2022



이번 전시의 주를 이루는 [여름이 지나가다] 시리즈에 대해 작가는 ‘청춘들의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상태를 꿈과 현실을 오가며 느끼는 중첩된 감정들과 연관시킨’ 작업이라고 말한다. 청년기 특유의 불안은 유동적인 화면을 낳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작업은 청년기의 불안을 표현했다기 보다는 감내할 수 있게 했다. 전시 부제인 [여름이 지나가다] 아래에 배치된 작품들에 공통적인 여름이라는 계절은 작가에게 청춘을 상징한다. 여름은 멀지 않은 미래에 수확을 앞두고 인내하는 시기다. 청춘의 기준은 시대마다 달랐다. 1990년대만 해도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최영미 시인의 시가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지금 30대면 각종 사회문화 프로그램에서 ‘청년’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어른의 기준이랄 수 있는 취업이나 결혼, 출산 등이 대부분 서른 이후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나이를 넘어서 작업을 통해 예술의 정수인 젊음을 향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때 전도예의 ‘여름’은 상징적이다. 


30대 중반의 작가에게 여름은 그 정점을 지나가고 있지만, 생산을 목표로 하는 작업에서의 여름은 상상적이다. 상상 또한 꿈처럼 현실성이 있다. 현실은 작품의 크기 만큼의 여지도 주지 못할 정도로 비좁다. 작가로서는 작업이라는 자기 주도적인 영역을 조금이라도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현수막 천을 바닥에 깔고 하는 작업 과정은 작가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가게 하며 에너지를 아래로 쏟게 한다. 현수막은 좁은 공간에서도 대형작업을 할 수 있다는 잇점으로 2-3년 전부터 선택됐다. 묘사나 표현보다는 분출의 과정이 중요한 작가에게 현수막은 다른 동양화 재료에 비해 대형작업을 할 수 있게 했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화면은 제도 교육에서 강조하는 동양화의 ‘덕목’으로 많이 벗어나 있다. 하지만 작가의 모태 언어로서의 속성은 유지되고 있는데, 채도가 높은 색상이나 검은 선이 그렇다. 먹선을 떠올리는 검은 선은 현수막 천과 어울리는 재료인 마카와 매직으로 그려졌다. 




아부지의 여름을 기억하다, 장지에 혼합재료, 36×52cm, 2022



여름은 뜨거웠다, 현수막천에 혼합재료, 98×164cm, 2020



현수막이라는 소재는 작가의 이력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되는데, 그것은 전도예가 전공한 불교미술에서 걸개그림의 전통이 있었다는 점이다. 걸개그림은 억압으로 해방을 추구했던 1980년대에 중요한 형식이기도 했다. 여러 이질적 요소들이 함께하는 풍경같은 형식이지만 시각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작품 [그 여름으로 돌아갈 수 없다](2020)는 기하학적 형태와 유기적 형상이 공존하는 추상적인 풍경이다. 같은 형태와 형상이 다른 크기로 여기저기 배치되어 원근감이 있다. 여러 층의 불연속적 공간은 불연속적 시간을 말한다. 구불구불한 길처럼 보이는 선, 단번에 순간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은 통로로 보이는 원과 직사각형이 보인다. 축제적 느낌을 주는 밝은색 선이 드리워진다. 영험한 하얀 구름은 걷히는 중일까 드리우는 중일까. 전도예의 작품 속 띠나 구름은 불화에 나오는 전통적 모티브와 관련된다. 부처 주변에서 도상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 띠는 새로이 맥락화 된다. 


띠의 중심(즉 부처)은 사라진다. 출렁이는 끈은 바람 또한 떠올린다. 재현은 아니지만 여러 다양한 것들이 한데 모여 일련의 풍경을 이루는 장에서 나풀거리는 끈은 장면들을 휘젓는다. 풀려서 나풀거리는 끈은 무엇인가를 안정되게 하는 끈으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있다. 작가란 묶지도 묶이지도 않는 존재이다. 작품 [여름 불도 쬐다 나면 섭섭하다](2020)에서는 리본체조 선수가 돌리는 띠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검은 선은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다. 그 위로 자유롭게 드리워진 것은 축제적인 색 선이다. 화면 안의 둥근 형태는 자아의 상징처럼 보인다. 자아는 공기 방울처럼 여러 차원을 가로질러 이동한다. 작품 [여름을 견디다](2020)는 물인 것처럼 흐르면서도 불인 듯이 솟구쳐 오르는 가는 선들이 심신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것이 예술이다. 




여름 하늘, 장지에 혼합재료, 52×36cm, 2021



여름 밤, 현수막 천에 혼합 재료, 164×113cm, 2020



예술은 순간적인 것의 기념비인 것이다. 다른 작품에도 나타나는 색 선은 길처럼 보인다. 활기차게 뻗어나가는 색 선이 있는 작품 [여름은 뜨거웠다](2020)는 나선형으로 말린 선들 말단 또한 뻗어나간다. 뜨거운 여름이지만 시원한 푸른 색조가 지배적이다. 작품 [여름밤](2020)에서 긴 선으로 출렁이는 검은 선들은 좀 더 조밀하게 엉겨있다. 전도예의 작품은 애초에 꿈과 무의식의 세계이지만 그 안에도 밤과 낮이 존재한다. 꿈속의 꿈, 밤 속의 밤이라고 할까. 검은 직사각형과 검은 원은 밤 속에서 드라마를 만든다. 장지에 혼합재료로 그린 소품은 여러 크기로 제작되어 평면 하나가 하나의 모듈이 되어 설치적으로 운용되기도 한다. 리드미컬하게 또는 일직선으로 배치되곤 한다. 한 개 크기가 15.8×22.7cm인 작품들이 설치된 [한 여름 밤의 꿈](2022)은 책의 한 페이지처럼 보이는 작은 작품들은 한 벽면에 나란히 배치되어 공간적으로 읽혀진다. 


서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장면들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작품 [나의 여름](2022)은 봄과 가을 사이에 있는 여름은 뿌려진 씨앗이 자라나는 성장기이며, 결실을 목표로 나아가는 시기를 표현한다. ‘나의 여름’이라 칭할만한 시기가 있다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공기 방울처럼 공간에 떠다니는 원들은 그 기간 동안의 수많은 여정과 시도였을 것이다 여기에도 드리워진 구름과 색 띠는 그 찬란했던 시기를 빛내준다. 작품 [너의 여름](2022)은 나의 여름이 있다면 나의 여름을 의미있게 해주었을 너의 여름도 있었음을 말한다. 마치 한 쌍을 이루는 듯한 작품은 같은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작품 [여름 하늘](2021)은 작은 작품이든 큰 작품이든 밀도가 비슷하다는 전도예의 작품 특징이 나타난다. 많이 뭉쳐있는 가는 선들은 나선형으로 회오리친다. 화면 공간상에서도 그렇지만 구름이나 색띠보다 기저면에 위치한 가는 선들은 좀 더 무의식에 가깝다. 




한여름 밤의 꿈(설치샷1), 장지에 혼합재료, 15.8×363.2cm(각 15.8×22.7cm), 2022



한여름 밤의 꿈(설치샷2), 장지에 혼합재료, 15.8×363.2cm(각 15.8×22.7cm), 2022



한여름 밤의 꿈, 장지에 혼합재료, 15.8×363.2cm(각 15.8×22.7cm), 2022



에고나 수퍼 에고는 그 위에 떠 있는 셈이다. 작은 작품은 하나의 단위를 이루어 연결되며 그 순서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이 담긴 풍경인 [아부지의 여름을 기억하다](2022)는 다른 작품들에서 흐르는 듯 휘몰아치는 가는 선들은 돌돌 말린 채로 자리한다. 직선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부친은 엄격한 면모도 있었던 듯하다. 아버지의 역할이란 원초적 현실이나 상상을 넘어서 사회의 지배적인 상징질서로 아이를 진입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생물학적으로 가까운 존재지만, 그만큼 잘 알고 있을까. 그들은 정확한 이해가 두려운 존재일 수도 있다. 내가 있기에 작업도 있는 것이지만 나야말로 미지의 존재일 수 있다. 작업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 여정에는 지름길이 없다. 우연찮게 그곳에 도달했다는 느낌도 들겠지만, 그 또한 재발견해야 하는 길이다. 거기에는 거듭되는 우회와 해석이 있을 따름이며, 그것이 작업을 지속하게 한다. 

  

출전; 영천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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