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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 우리의 밝은 미래와 함께하는 식물

이선영

우리의 밝은 미래와 함께하는 식물

이선영(미술평론가)


식물은 동물에 비해 수동적이라 생각된다. 이동할 수 없는 식물은 동물(動物)의 배경이 되어줄 따름이다. 그러나 식물도 바람이나 기타 외부의 요소에 의한 움직임이 아닌 내부의, 또는 미시적 움직임이 있다. 내외부적 요인의 움직임은 식물의 생존전략이다. 이정민이 여러 형식을 통해 다루는 주요 소재는 내부와 외부 모두를 아우르는 움직임 속의 식물이다. 외적일 뿐 아니라 내적인 과정도 표현하기 위해서는, 식물이 아니더라도 대상을 그저 작품으로 옮겨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대상은 그저 묵묵히 존재할 따름이며 침투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작가는 대상에 이미 존재하는 상투성을 걷어내고 존재 그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중심주의를 비롯하여 이미 선점되어있는 의미를 거부했던 현대예술의 목표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드러내는데 사진은 회화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정민은 회화를 전공했지만, 사진(또는 사진적 과정)은 작업의 중요한 단계를 차지한다. 하지만 자연은 훌륭한 소재지만, 회화만이 가능한 깊이와 강도 또한 요구한다.




시안미술관 전시전경



부드러운 속도 ,sunprinting, oriental ink, botanic emulsion on paper, 162*448cm, 2021



유화는 정밀한 회화적 재현에 유리한 매체지만, 재현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작가는 식물 추출물은 물론, 먹이나 수채화 등 이물감이 없는 안료를 선호하며, 그것들은 종이나 천 등을 만나서 스며들고 변화한다. 작가는 명확한 형태나 색채보다는 흔적들의 축적을 표현한다. 그래서 작품이 완성된 후에도 조금씩 상태가 변화하며, 이 또한 작품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물론 예술은 자연이 아니기에 무작정 변화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연적 안료를 화면에 안착시켜야 하는 과제도 있는 만큼, 이정민의 작업은 서정적 측면과 탐구적 측면이 공존한다. 얼마 전 시안미술관의 그룹전 [규약하는 사회] 전에 출품한 작품 [부드러운 속도](2021)는 자연의 비법이 가득 담긴 듯한 역작이다. 그 크기 때문에 마치 담벼락에 남아있는 넝쿨식물을 보는 것 같다. 그것은 패널을 연결시키면서 확장되는데, 동일한 크기의 패널을 이리저리 연결하는 다른 전시의 작품에서도 보인다. 하나로도 작품이 되면서 설치적인 단위로 이합집산하는 유연성이 있다.


물론 그것은 설치미술을 해야 해서가 아니라, 작가가 관찰한 자연의 다양한 면을 최대한 담기 위한 또 다른 선택이다. 자연은 총체적으로 재현될 수 없으며 시공간의 단면인 샘플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정사각형의 틀을 가지는 일련의 단위가 구성된 작품은 자연관찰자의 분석적 시점이 두드러진다. 시간을 축을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단면을 채집하고 채집된 것을 바탕으로 조형적 아이디어를 전개한다. 직접 수집하기도 하고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하여 수집하기도 한다. 사진은 회화와 경쟁하며 출발했던 당시에도 세계를 수집하는 기능으로 경쟁력을 확보했다. 작가는 오래된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수집한 식물의 씨앗 등을 모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씨앗에는 지금은 유예된 희망이 접혀있을 것이다. 작가는 방치된 재개발지의 우울한 풍경에서 길어 올린 얼마 전 개인전에 [우리의 밝은 미래]라는 제목을 붙였다. 황량해 보이는 지방의 구도심에서 서식하는 식물들의 씨앗을 모은 작품은 되시작 하는 식물의 순환적 삶의 주기, 즉 희망을 말한다.




부드러운 속도, sunprinting, botanic emulsion on paper, 162*336cm, 2021



The Flow,video, 3min 45sec, sound, 가변설치, 2021



유연한 오늘, sunprinting, 들풀, natural dyed on paper, 72.7*72.7cm, each * 9, 2021



멀리서 본 풍경과 현미경적 관점이 공존하는 이정민의 작품은 예술적일 뿐 아니라 자연적 사회적 연구의 단초가 된다. 특히 재개발 지역처럼 강제로 자연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장소에서의 공공 작업들은 인간 문명을 장기적인 맥락에 재배치한다. 페허에 가까운 동네에서 발이나 빨래처럼 걸려 있는 설치 작품들은 사람 사는 흔적을 떠올리는 반가운 기표다. 이러한 공공 설치작업은 원래의 장소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이며, 재료나 소재도 친환경적이다. 인간이 그렇게만 살았어도 그토록 빨리 낡거나 쓰레기가 되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이정민의 작업은 정확한 자연적 형태를 품은 채 회화의 깊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기본바탕은 사진적 과정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옛 사진 기법이 총동원되는 고풍스러운 작업에서 ‘빛이 그린 그림’이라는 사진의 어원을 살린다. 거기에 빛과 밀접한 존재인 식물의 이미지와 그 추출물 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최대한 빛을 받기 위해 벽에 밀착하여 자라는 덩굴식물의 줄기는 그것들이 좀 더 많은 빛을 찾아 더듬어 나아간 궤적이 바로 형태가 된다.


수없이 그은 선으로 이루어진 추상화같은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다른 색조의 작품 [부드러운 속도 2]는 색감 때문인지 흐르는 물 같다. 물살에 몸을 맡기는 해초들의 모습도 연상된다. 그것은 자연이 멈춤 없이 흐른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혈맥과도 같은 흐름이 인공의 힘에 의해 막힐 때, 그리고 이러한 막힘이 쌓일 때 재앙이 발생할 것이다. 화장품이나 요리 등에 자기만의 비율로 자연을 갈아 넣는 방식이 있듯이, 먹과 식물 추출물 등을 활용해 만든 오묘한 색은 빛의 작용과 어우러지면서 종이 위에 자연스러운 식물의 궤적을 남긴다. 그리기 대신에 선택한 선 프린팅의 효과는 식물이 빛을 붙잡아 생태계의 필수요소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작가는 단지 자연의 외형이 아니라 자연의 방법 또한 참고한다. 브라운 계열의 색상은 약간 어두운 톤의 피부 아래 얽혀 있을 실핏줄도 연상시킨다. 색감은 다르지만 식물이 가지를 뻗어가며 자라는 모습은 물질과 에너지가 공간에 분배되는 패턴을 내포한다.




달여진 기억은 모두 떠난다, sunprinting, botanic emulsion on Cotton 450*100cm, 2019



화풍난양 (和風暖陽), Sunprinting, botanic emulsion on Cotton, 200*78cm, 2019



복숭아꽃이 피었습니다 ,Sunprinting, botanic emulsion on Paper, 61*91cm, 2019



지나는 길입니다, Sunprinting, 소제동에서 채집한 감, botanic emulsion on Paper, 73*91cm, 2019



가지와 뿌리가 같은 형태인 것도 같은 이유다. 그것은 강줄기나, 나무줄기, 옆맥, 동물의 혈관계와 신경계 등에서 발견되는 분지의 체계와 동형적 구조다. 작가는 자연의 외관이 아닌 구조와 운동을 표현한다. 프랙털 이론이 말하듯이, 분지의 체계는 식물과 동물, 소우주와 대우주의 세계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펼쳐지고 접혀지는 것이다. 이정민의 작업은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자연과 구조적 동형성을 가진다. 작품 [유연한 오늘]은 자연에서 출발하는 작업을 하면서 유지했던 감정적 기조가 유연함과 부드러움임을 암시한다. 그 반대는 경직됨과 딱딱함이다. 그것은 죽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간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연도 생산력의 수탈에 맡겨졌을 때 경직되고 딱딱해진다. 정사각형 패널을 정방형으로 배열한 작품은 초록 식물들이 결국은 갈색으로 변하면서 한해의 생애주기를 마치고 다음의 순환을 위해 준비함을 알려준다. 이정민의 작품에서는 브라운 계열의 색상이 식물의 여러 단계를 반영하는 촉감과 만나면서 다양한 뉘앙스로 변이를 거듭한다.


인간은 자연과 역사를 대조하면서 자연의 동일성만을 강조하지만, 자연 또한 차이로 가득하다. 채취한 식물을 직접 붙이기도 하고 식물의 색을 화면에 고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실험의 결과물은 자연과 근접해지려 한다. 작품 또한 자연처럼 시간의 흐름에 반응한다. 시간은 태어나 자라고 죽는 유기체의 생애를 지배하는 축이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도 변모지만, 죽음도 변모다. 식물이 이듬해에 당당히 부활한다면, 동물한테까지 이러한 주기를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동물의 죽음은 식물과 달리, 그냥 끝으로 다가온다. 시안미술관 단체전과 시간차를 두고 연이어 열린 대전 전시의 부제인 [우리의 밝은 미래]는 코로나 국면과 연결 지어 희망을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늘 배반당하는 희망에 대한 역설적 표현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우리의 밝은 미래에 꼭 필요한 것이 식물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지구상에 생물이 가능하게 한 것도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물의 느린 삶을 인간의 것으로 하기에는 문명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No.0325-1,3, Filament, T5 LED, Acrylic Panel, Box made by Compressed Styrofoam, Print on Tracing Paper, 85*61*10cm, each * 2, 2018



봄이 담긴 폐조개, 수산물시장 인근에서 수집한 조개 껍데기에 Cyanotype, 가변설치, 2018



안양천 갈대, Cyanotype on Cotton, 110*160cm, 2018



작가의 자연 관찰과 연구에 의하면 식물도 삶의 전략이 있으며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동물과 달리 최소한의 에너지 소비로 삶을 영위하는 경제적 시스템은 오래된 미래의 가치로 다가온다. 대전의 전시에서도 선보인 [부드러운 속도] 시리즈는 어슷한 전시장 벽면에 맞춘 유연한 모습이다. 그것은 자연처럼 당면한 상황을 저항으로 여기지 않고 역이용하거나 굴곡 면을 따라간다. 사회 속에서 생존이라는 화두는 비참한 느낌까지 들지만, 자연에서 살아있는 것, 살아남은 것은 그자체가 경이롭다. 작가로서의 이정민은 예술적 방식으로 그러한 경이로움을 표현한다. 작가가 잡초를 비롯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식물을 애호하는 것은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다. [버려진 녹색]이라는 제목은 식물이 녹색으로 보이는 이유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과 관련된다. 그것은 식물에 포함된 광합성 색소인 엽록소가 녹색광을 반사하고 다른 색의 빛은 모두 흡수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작가는 녹색 잎들에서 버려야 분명해지는 역설을 본다. 하지만 녹색 자연도 곧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


예술은 자연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초록보다는 초록 이후의 색이 더 지배적이다. 이정민의 작업은 다양한 톤의 브라운으로 풍부하다. 가을이 되면 녹색 엽록소는 파괴되고 다른 색들이 드러난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여름의 엽록소는 열과 빛에 파괴되지만 꾸준히 대체된다고 말한다. 가을에는 새로운 엽록소가 생산되지 않고 그래서 항상 잎새 속에 있었으면서도 엽록소의 강한 녹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른 색이 드러나게 된다. 원래 있었던 색이 녹색에 가려진 채 있다가 때가 되면 나타나는 것이다. 자연에는 자리바꿈이 일어날 뿐, 완전한 소멸이나 창조는 없다. 매해 다시 태어나는 식물은 그러한 자연의 진실을 알려준다. 자연에 대한 미시적 거시적 연구가 축적된 이정민의 작업에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이 가득하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며, 그 자연은 인생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공이 쌓인 것이기에 그러하다. 자연으로부터 출발하는 작품들은 생태학적 비전이 심미적 활동과 만날 때 서로를 상승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출전; 영천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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