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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향기, 그리고 소리가 흐르는 정원

이선영

빛과 향기, 그리고 소리가 흐르는 정원 

  

이선영(미술평론가)

  

미디어의 숲길을 걷다.


[감각정원; 밤이 내리면, 빛이 오르고]는 시민들이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접근성 최고의 문화공간에서 열린 미디어 아트 전시다. 기획자 이기모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자리한 이 문턱 없는 미술관에서 관람자의 동선과 산책자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일치시키려 했다. 보기 위해 걷는다기보다는, 걷다 보면 보게 되는, 또는 참여하는 방식이다. 특히 길에도 프로젝션 되는 영상작품들은 스크린 위를 걷는 듯한 환상적 느낌이다. 길이 꽤 길어서 러닝 타임을 공유할 수 있는 순간도 있다. 여기에서 물도 흐르고 시도 흐르며, 아름다운 작품과 함께 하는 시간도 흐른다. 화이트 큐브를 잘게 구획하여 작은 영화관을 만들어 전방의 스크린만을 주시해야 하는 통상적인 미디어 아트 전시에서의 골치 아픔과 달리, 탁 트인 바깥에서 전신의 감각이 고무되는 간만의 전시다. 코로나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길어진 유폐의 시간들을 채워주었던 것도 미디어이긴 했을 것이다. 




2021-09-04-감각정원-전경ⓒACI BHT01



하지만 미디어 환경이 텔레비전이나 데크스톱 컴퓨터마저도 떠나 손바닥 안 스마트 폰으로 압축되면서, 작은 화면을 훑어내리는 초 근시안적 경향이 많아졌다. 손바닥 안의 인터넷이 세계와 더 잘 만나게 하기보다는 편향된 감각과 사고로 몰아가는 경향이 다분하다. 누군가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설계된 장의 한계에 갇힐 때, 인간은 그자체가 소비자-단말기로 환원될 따름이다. 대형 화면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관객은 ‘감각정원’을 나와 거리로 진입하자마자 수많은 스펙터클에 둘러싸이게 되는데, 이러한 거대 광고판들은 자본과 기술이 집중된 세련된 영상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이 전달하는 핵심 메시지는 결국 그 물건을 사라는 것 하나이며, 이를 위해 소외가 불가피한 물신주의가 요구된다. 끝없이 유혹, 또는 설득당하는 피로감은 미디어가 열어 놓은 신세계를 충분히 향유 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이제와서 제 2의 생태계가 된 미디어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빛과 바람을 받으며 산책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미디어 작품들로 채운 이 전시는 이미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에 친숙한 현대인의 지각 관습, 그리고 수동적 배경막에 지나지 않게 된 자연을 예술적 감각으로 만나게 한다. 넓게 펼쳐진 잔디광장과 긴 소방도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 건물 사이의 공간과 숲,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자연스럽게 발 닿는 곳의 굴곡 면에 설치된 미디어 작품은 실제의 장소와 더불어 효과를 극대화한다. 거기에서는 눈과 손가락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오감을 일깨울 수 있다. 이러한 공감각이 가능했던 것은 각 작품들이 자연을 끌어들인 덕분이다. 야외 미디어 전시의 대표적인 방식인 미디어 파사드는 건물 외벽 뿐 아니라, 나무숲을 비롯한 장소의 여러 굴곡 면에 적용했다. 장소 특정적 미디어 파사드 프로젝트다. 이 전시에도 거대한 프로젝션 매핑 작품이 나오지만, 건물 벽면을 넘어가는 화면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18대의 프로젝터가 동원되었다. 참여작가들은 경사진 잔디로 이루어진 하늘마당과 그랜드 캐노피, 냉각 타워와 배롱나무 숲 등을 최대한 활용했다. 장소와 장소를 잇는 길과 계단 또한 활성화된다. 


화이트 큐브에 이미 만들어진 것을 툭 가져다 놓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다양한 변수를 감안했고, 전시 기간 중에도 열린 공간에서 최적화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작품의 진화는 계속된다. ‘밤이 내리면(Night Falls) 빛이 오르고(Light Fulls)’라는 전시 부제는 기획자의 자작시에서 온 것으로, 자연과 문명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하려 한다. 특히 작품들에서 나오는 현대적 음향과 풀벌레 소리, 빛과 향기의 만남 등이 신선했다. 8명의 현대 미술 작가와 1명의 시인이 참여한 이 전시는 각각의 독백이 아니라 서로를 반향 하는 대화적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반향은 서로 다른 작품들의 자연스러운 연결망을 만든다. 미디어 아트의 특징인 몰입은 흐름을 통해서 가능한데, 한 작품에도 흐름이 있지만, 작품들 간에도 흐름이 있게끔 조율된다. 기획자는 ‘흐름’이라는 전시의 키워드에 대해,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흐름은 원자와 그 원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허공에 대한 상상력을 전제한다. 


레고 블록처럼 구성적인 단위들이 조합되어 무언가 만들어지는 미디어 또한 원자론적 상상력과 만난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초기 이오니아 자연철학자들은 공기, 물, 흙, 불의 4 원소로 만들어진 우주를 상상했다고 보면서, 그들에게 생성이란 ‘벽돌과 돌로 구성된 벽’(아리스토텔레스)과 같은 방식의 결합으로 간주됐다고 지적한다. 고대의 원자론적 사고에 의하면 새로운 세계들은 이제는 사라진, 영원히 분해된 세계들에서 흘러나온 잔해들로부터 형성된다. 몇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과학적이고도 신화적 사고는 이 전시의 작품들에도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세상이 일련의 구성 입자로만 되어 있다는 상상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고대 원자론]은 고대 원자론자들의 상상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가 본질적으로 불연속이라는 사실이다. 즉 존재가 산재한다면 그것의 필연적 상관물로서 무(無), 달리 말해, 거대한 허공이 존재해야 한다. 끝없는 흐름은 원자와 허공을 동시에 전제해야 했다. 장 살렘에 의하면 고대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가 그린 우주에서는 일종의 브라운 운동이 일어난다. 


물질 입자들이 추는 끊임없는 춤은 이번 전시의 작품 여러 곳에서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원자론자들이 상상한 빈공간의 존재는 흐름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무대이며, 거대한 정원에서 열린 이 전시는 그 공간을 확장한다. 다양한 작품들에서 빛을 입은 입자들은 ‘탈영토화한 기호’ 즉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티 외디푸스]가 말한 시니피앙을 말한다. 관객이 바람결을 따라 만나는 기표들은 그자체가 우리를 묶어 두고 있는 묵직한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암시한다. 기표들은 분절되면서도 만난다. 기획자는 각 작품이 보이지 않는 망으로 연결되기를 바랬다. 연결, 즉 흐름은 생성의 조건이자 결과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할 포스터의 연구가 담긴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은 ‘욕망은 기표의 흐름을 따라 이동’(앙드레 브르통)한다고 말해진다. 그에 의하면 기표는 다른 기표를 불러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욕망의 이동은 잃어버린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초현실주의적 행위로 귀결된다. 이 전시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흐름’은 잃어버린 대상을 찾아 헤매는 욕망의 과정과 중첩된다. 


그것은 끝없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나타날 뿐이지만, 이 전시의 형식적 바탕을 이루는 미디어는 어느 시대의 주도적 양식보다 그러한 대체물을 담아낼 무한한 여력이 있다. 그것은 미디어 아트의 근간을 이루는 네트워크가 수평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횡적으로 연결되는 뿌리줄기를 닮았다. 알렉스 라이트는 [분류의 역사]에서 네트워크에는 꼭대기란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각 노드(node)는 동등하며 스스로 방향을 결정한다. 알렉스 라이트가 예로 드는 네트워크에는 민주주의, 한 무리의 새들, 월드와이드웹 등이 있다. 우리는 여기에 예술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자유롭게 흐르지 못하는 세상에서 흐름은 연결, 생성, 탈주와 같은 관념과 연동된다. 밤 시간대에 빛을 발하는 미디어 아트는 계절의 변화 또한 품는다. 정지가 아닌 흐름을 특징으로 하는 미디어 아트는 시간이라는 축을 서사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물론 이 전시작품들의 서사는 기승전결의 이야기보다는 시적 은유가 강하다. 신화와 역사, 개인과 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길부터 벽면에 이르는 다양한 공간을 무대로 펼쳐진다.  

 

참여 작가들


1. 오도함  

푸릇한 잔디 언덕 한가운데 놓인 비눗방울처럼 생긴 오도함의 작품 [당신의 피부가 듣는다]는 다른 차원을 향해 이동하는 입구다. 1인용 에어볼 안에 들어간 관객은 자신의 애청곡을 스마트 폰과 블루투스를 연결하여 들을 수 있다. 이어폰으로 혼자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인 하늘광장에 울려 퍼진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붕 뜬 듯 한 기분, 그것도 공개된 장소에서 함께 들을 때의 축제적 기분이 고조된다. 귀로만 듣는 것과 온 몸으로 듣는 것, 혼자만 듣는 것과 같이 듣는 것은 다르다. 작가는 청각장애인이 진동으로 음악을 듣는 방식에서 영감을 얻었다. 소리를 진동으로 변환해 주는 장치인 택틀 트랜스듀서(tactile transducer)를 활용했다고 한다. 이 촉각 변환기는 가장 근본적인 감각을 활성화 시킨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에게 시각 청각 후각의 메커니즘은 촉각의 특수한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원자론자들에게 촉각은 모든 다른 감각들이 그것에로 환원되는 감각이었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지각을 확장시키면서 쾌락을 제공함과 동시에, 장애의 치료에도 도움을 주는 기능성도 가진다. 장애인뿐 아니라, 모두가 영향을 받는 총체적 재난의 국면에서 치유의 의미까지 포함한다. 

 

2. 고기영

잔디광장을 지나 진입하게 되는 건물의 높은 천정에는 구름을 떠올리는 에매랄드 빛이 일렁거린다. 어둠이 내리면 바로 앞의 숲은 잘 안 보이지만 숲속에서 일어날법한 자연적 심리적 사건들은 인간이 만든 거대한 기념비인 건축을 극장 삼아 이어진다. 근처의 배롱나무 숲에 적용된 예술 조명은 보이지 않는 어디에서인가 출발한 빛이 식물의 세세한 부분까지 도달하여 보석처럼 빛난다. 고기영의 [에메랄드 빛의 숲]은 연말연시에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자고 나무에 전선을 칭칭 감아서 고통을 주는 그런 고문형 조명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건축조명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는 조명의 변화만으로 숲 근처의 썰렁한 화장실도 들어가고 싶은 클럽처럼 바꿨다. 관객은 발밑에 그냥 지나칠법한 작은 식물에서 아침 이슬같은 영롱한 빛의 무리를 볼 수 있다. 때로 그것은 투과적이어서 지구 생명체를 가능하게 하는 엽록소 공장이라고 할 식물의 미시적 세계로 다가온다. 고정되지 않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빛은 바로 옆의 그 생명을 닮았다. 냉각 타워나 숲, 계단 등에 흩뿌려진 빛의 무리는 공간 전체를 춤추게 한다. 주변을 춤추는 입자로 가득하게 만드는 고기영의 작품은 ‘햇살 속의 먼지 알갱이들’에서 원자론을 상상한 데모크리토스의 사고를 떠오르게 한다. 고기영의 작품은 고대 원자론이 매우 현대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최성록

최성록의 작품 [시작의 계곡]은 숲과 건물 사이에 난 긴 길을 일종의 계곡으로 삼았다. 작가가 세상을 이루는 3 원소로 생각하는 빛, 불, 물은 변화무쌍한 흐름을 보이는 요소다. 작품은 그 3 원소가 원초적 혼돈 속에 뒤얽혀 있다가 갈래쳐 나오며 세상이 생성되는 이야기이다. 시작에 관한 이야기는 무조건 신화이다. 그 이후는 역사이다. 역사는 신화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신화 없는 역사는 개별적 사실들로 흐트러지고 만다. 역사주의의 함정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단편적 정보들을 묶어내는 상상력은 필수다. 약간 경사진 긴 소방도로에 넘쳐 흐르는 용암 이미지가 압권이다. 단지 애니메이션 프로젝션이 만든 가상공간 임에도 불구하고 반사적으로 발을 들게 될 정도로 실감 난다. 영상이 입혀질 3차원 공간과 그 안에서 움직여진 관객의 시점에 대한 철저한 연구의 결과다. 미디어 공간을 생태계로 삼는 음악(작곡가 요한 일렉트릭 바흐)은 생성의 드라마에 활기를 부여한다. 태초에 소리가 있지 않았겠는가. 그의 작품은 원초적 신화에 국한되지 않고, ‘디지털 스크린 위에 데이터로 이루어진 색점들이 만드는 이미지’(작가)가 현실을 대체하는 동시대성을 확보한다.  

  

4. 문창환

문창환의 [더 완벽한 세계]는 나무, 불, 흙, 쇠, 물 다섯 가지 원소로 풀이하는 동양의 사주팔자가 작품의 배경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사주팔자로부터 출발한다. 관객은 여러 물상들이 흐르는 역동적 시공간 안에 자리 잡게 되는데, 그것은 작가의 세계, 또는 우주에 초대받은 것과 같다. 우주로 변화한 개인의 세계에 들어가 보는 경험으로 예술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영화와 미술은 경쟁하는데, 미디어 아트는 그 중간에 있다. 사주에서 돌산으로 태어난 작가 주변의 나무와 바다 등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우주적 에너지이며, 관객은 이 흐름 속에 잠기게 된다. 빛으로 물결치는 도로는 작가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빠르게 실어나른다. 사주 역학은 미신이 아니라 통계로 알려져 있다. 또한 통계는 한갓된 우연이 아니라 더 과학적인 객관성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 우연성 자체가 고대 유물론부터 현대과학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사주역학과 미디어 아트의 만남은 양자가 통계에 바탕 한 새로운 과학/기술과 조응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불확정적이지만 그렇기에 자유로운 이 세계에서 창백한 결정론은 사라지고 생멸하는 역동성만 남는다. 직접 작곡한 음악은 영상 자체를 뮤직비디오로 만든다. 화면과 음악의 일체성은 그 작품이 개인의 이야기면서 보편화될 수 있는 강력한 통로를 마련한다. 

 

5. 용세라와 하상욱 

그래픽 디자이너 용세라의 작품과 하상욱 시인의 만남은 이미지와 시의 상호적 상승을 낳았다.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내용이 모호할 수 있고, 언어만으로는 스펙터클의 시대에 소통하기 쉽지 않다. 마침 하상욱 시인(시팔이)의 시가 이미지처럼 강렬하다는 점이 양자의 접합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예전엔 좋은 일이 생기길 바랐다. 요즘엔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란다’, ‘나이가 드니까 복수도 귀찮다 알아서 망해...’같이 마치 래퍼가 내뱉는 듯한 싯구는 사운드(파블라 자브란스카의 작품)와 함께 영상 속에서 같이 흘러간다. 작품 [흘러가는 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하상욱의 시는 고전적 시의 세계와 어울리는 명상적 공간보다는 소음 가득한 도시의 거리에서도 큰 방해 없이 뇌리에 꽂힐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음악, 영상, 문학은 모두 시간성을 바탕으로 그 내용과 형식이 구성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 작품이 잠시 놓이게 되는 맥락, 즉 자연 또한 그러하다. 변화하는 색은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지나듯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한다. 이미지의 구성 요소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조금씩 변화하며 흐르는 용세라의 작품은 단어들의 조합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하상욱 시인의 작업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6. 권혜원

권혜원의 [풍경을 빌리는 방법]은 불의 기운이 많은 광주에 균형을 잡기 위해 있었던 인공호수가 사라진 현재로부터 고고학적 탐사를 진행한다. 1900년경에 있었다는 인공호수는 작은 국토를 몇 번이나 갈아엎는 재개발 공화국에서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우리에게는 불과 얼마 전 역사 조차도 고고학의 대상이 될 정도로 전통이 단절되어 있다. 권혜원의 작품은 지금 여기는 역사적 관점에 의해 한꺼풀 두꺼풀 벗겨지며 대안의 흐름으로 채워진다. 작품에는 광주의 원류인 무등산 샘골까지 물길을 추적하는 물의 역사가 담겨있다. 작가에 의하면 감각정원이 있는 광주는 무엇보다도 물을 필요로 한다. 100미터가 넘는 긴 스크린이자 길에는 옛 지도, 작가가 직접 광주천과 영산강 하류 등지를 하이킹하면서 수집해온 광주의 물줄기 흔적 등이 담겨있다. 차경(借景)은 경치를 빌려온다는 의미로, 정원의 원리이기도 하다. 자연도 인공도 아닌 그 중간 지대인 정원은 도시의 모범이자 예술의 모범이 된다. ‘카메라로 먼 곳의 이미지들을 포착해서 관람자의 눈앞에 다시 펼쳐 놓는 것’(작가)이 바로 차경 아니겠는가. 미디어 자체가 실체적 속성보다는 관계적 속성, 즉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볼 때, 권혜원이 제시한 차경은 지금 여기를 넘어선 전방위적 확장성을 가진다. 

 

7. 신미경

열린 마당에 설치된 신미경의 작품은 빛과 소리의 바다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 아트 전시에 다소간 부족한 후각을 자극한다. 물론 국내외에서 조각, 세라믹, 유리 등을 두루 전공한 작가가 비누라는 색다른 재료로 만들어내는 형태도 압권이지만, 그녀의 작품은 형태 그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변화를 더 중시한다. 대리석을 닮은 비누 덩어리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닳는다. 신미경의 작품에서 변화는 문화권 간의 번역의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문명에 대한 멜랑콜리한 정동도 있었다. 특이 장마철을 통과하는 전시 기간 중에 녹아내린 유적지 풍의 작품에는 날벌레들이 호박 화석처럼 끼어들어 자연과 문화가 엮이는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제목 [香水(향수)와 鄕愁(향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와 있듯이, 향기의 의미를 보다 강하게 부각시킨다. 15톤의 비누도 모자라 야외에서의 좀 더 선명한 후각 효과를 위해 향초도 설치했다. 작가가 영향을 받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향기를 통해 불현듯 촉발된 기억을 통해 재현으로부터 벗어나 생성을 향하는 ‘현대조각의 흐름’(로잘린드 크라우스)을 시적으로 간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프루스트-신미경의 작품에서 기억은 정확한 재현보다는 우연한 마주침에 더 가깝다. 재현에 대항하여 생성을 외쳐온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지각은 상기라는 유형의 기억에 호소하기 보다는 마주침이라는 유형의 지각의 확장이나 응축에 호소’한다고 말한 바 있다. 

 

8. 리경

중정에 설치된 리경의 작품 [더 많은 빛을_기쁨 가득한]은 작품 양쪽에 자리한 두 벽을 이루는 타공된 금속면과 유리면을 빛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변화시킨다. 반사면이 상호작용하는 간섭효과는 장치는 작아도 공간을 빛으로 장악하는 리경의 스타일이 잘 드러나 있다. 계몽주의자에게 더 많은 빛이 이성이라면, 리경에게 더 많은 빛은 기쁨이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에피쿠로스는 결코 쾌락에 맞서 절제된 삶을 살라고 권장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는 그저 쾌락은 잘 이해된 생의 에너지라고 가르쳤을 뿐이다. ‘생명체는 태어나자마자 쾌락에 즐거워하며 자연(본성)적으로 그리고 이성의 개입 없이 고통에 저항한다’(에피쿠로스) 중정 바닥에 떠오르는지 지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걸쳐진 달은 ‘블루 문’에서 ‘블러드 문’까지 조금씩 빛을 변화시키면서 생성과 소멸을 주관하는 천체의 속성을 극대화한다. 그동안 ‘더 많은 빛’을 추구해론 작가로서는 태양을 단지 반사할 따름인 달을 소재로 한 점은 장소특정성과 더불어 미디어아트 전시가 빛을 발 할 수 있는 시간특정성 까지도 생각한 결과물이자, 밤이 주는 포용성을 염두에 둔 선택이다. 태양이 분리를, 달이 종합을 상징한다는 ‘인류학적 상상계’(질베르 뒤랑)와 연관되는 사고다. 리경의 작품에서 태양은 금빛으로 조형된 천구 작품에 간접적으로 현시된다. 색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보석까지 박혀있는 황금빛 천구에 쪼여지는 빛은 벽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포함시키며, 끝없이 움직이는 우주의 원리를 극적으로 가시화한다.


출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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