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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 그라운드 제로에 불시착하다

이선영

그라운드 제로에 불시착하다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지은의 [집 같은 비장소 Non-place Like Home] 전 에서 ‘-같은’이라는 표현은 집과 비장소의 거리감을 전제한다. 원래는 집이 비장소여서는 안되고, 비장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는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집이란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이다....참된 의미로 거주되는 일체의 공간은 집이라는 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상찬한 가장 친근한 장소인 집을 낯설게 조명한다. 프로이트가 ‘기괴함(unheimlich)’이라는 심리적 현상을 분석할 때 그 무대도 바로 집이었다는 점은 집이 결코 낯설어서는 안되는 곳임을 알려준다. 비장소는 그러한 집과 상극에 놓여야 한다. 하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누구나 소비할 수 있도록 비장소 또한 친숙한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작가를 비롯해 사회에 관찰자적인 관점을 가지는 이들에게 장소/비장소의 모순은 쉽게 봉합될 수 없다. 



갤러리 시몬 전시전경 1층_1


비장소라는 개념어가 포함된 전시는 단순히 스산한 풍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주요 모순을 다룬다. 작가는 집/비장소의 관계를 극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회화 뿐 아니라 콜라주를 통해 상반되는 것을 충돌시킨다. 김지은의 콜라주 작품이 복잡하지는 않다. 워낙 작가가 주시하던 장소 자체의 성격 때문에 그대로 떠내서 다른 면과 만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몽타주나 콜라주 기법이 낳는 미학적 거리두기, 또는 낯설게 하기는 문예사조사에서 리얼리즘과 미학적으로 경쟁(가령 브레히트 vs 루카치)했지만, 김지은의 작품에서 양자는 수렴된다. 작가가 하는 일은 거짓된 화해를 봉합하고 있는 균열을 벌려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하지만 작가는 섣부른 계몽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김지은의 작품은 표면에 탐닉하면서도 분석적이다. 오고 가며 늘 봤던 ‘자연스러운’ 풍경을 선택했지만, 거기에는 현대사회의 모순이 중층적으로 깔려있었기에 가능했다. 


작가는 ‘장소성이 제거된 신도시(택지개발지구)와 평면 공간으로 제시되는 아파트 공간을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라는 개념과 접목해 비장소와 다름없게 된 집에 관한 이야기 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작품의 이론적 배경으로 제시한 ‘비장소’는 플랫폼과 비교될 수 있다. 비장소는 대개 공적인 장소이며 대개는 지나치는 곳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비장소는 ‘정체성, 관계, 역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없는 공간이다. 예컨대 공항이나 도로, 익명의 호텔방, 대중교통’ 등이라고 이야기한다. 근대문화의 특징을 연구하는 이 사회학자는 ‘역사적으로 오늘날처럼 비장소들이 그토록 많은 공간을 차지한 적은 없다’고 진단한다. 그 이유에 대한 바우만의 진단은, 새로운 힘이 결속 파괴와 도피 기술을 주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탓에 새로운 힘의 기술이 결과인 동시에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즉 힘이 자유롭게 흐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장벽과 장애물, 요새화된 국경들과 검문소들이 없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전시전경 1층_2



전시전경 1층_3


일체의 ‘농밀하고 탄탄한 사회적 유대의 네트워크, 특히 영토적으로 깊게 뿌리내린 네트워크는 반드시 제거돼야 할 장애물이 됨으로써’(바우만), 비장소들이 편재하게 된 것이다. 장소는 또한 삶이고 사람이라면, 비장소는 어떠한가? 비장소를 채우는 것은 원주민이기 보다는 이방인이다. 그들은 뿌리내리지 않은/못한, 요즘 말로 유목민이다. 하지만 떠남도 머무름도 아닌 지연된 유예가 비장소에서 일어난다. [액체 근대]는 비장소가 표면상 공적이지만 이방인들이 어쩔 수 없이 더 오래, 때로는 매우 장기간 체류하는 것을 용인하며, 따라서 이방인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단지 물리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인다고 본다. 비장소에는 다양한 거주민들이 일시적으로 머물게 되는데, 그 비결은 주민들이 머무는 동안 모든 다양성들이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차이점들이 무엇이든 주민들은 동일한 행동 유형을 따라야 한다.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대중의 수동성을 분석한 리처드 세넷의 [살과 돌]의 연구를 참조하면서, ‘이방인들이 서로 마주칠만한 장소’(세넷)인 도시에서, ‘이방인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시련이나 동요, 기쁨이나 즐거움이 채워져 있지도 않으며 공동의 추억이랄 것도 없다. 이방인들의 만남은 과거나 미래가 없는 사건’(바우만)임을 강조한다. 차이는 이방인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차이는 늘 분란의 씨앗을 품고 있다. 비슷한 계층끼리 보이지 않는 담을 쌓으면서 나름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차이가 야기할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수많은 규칙이 생겨난다. 이전에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작가는 주민이 따라야 하는 규칙을 알려주는 아파트의 방송이 낯설기만 하다. 작가는 최후의 보루인 집마저 비장소에 의해 식민화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유령같이 텅 빈 장소의 역할 또한 분명하기 때문에 그토록 보편화된 것이다. 



전시전경 2층_1



전시전경 2층_2


[액체 근대]는 마르크 오제가 개념화한 비장소가 ‘진짜 중요한 공간들을 건설하고 난 뒤 남은 잔여물 같은 공간들’이라고 보면서, ‘그런 장소들을 배제함으로서 나머지 장소들이 빛나게 되고 의미를 가득 지닐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액체 근대]에 의하면 비장소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되지 않은 장소’이며, ‘금지된 장소는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특성 때문에 텅 비어있고 도달할 수 없다’. 김지은의 작품에서 가림막이 쳐진 붉은 대지들은 곧 도착할 집과는 다른 곳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이 현재 몸담고 있는 같은 지역 신도시 아파트의 시작과 끝을 거기에서 본다. 즉 이전과 이후라는 맥락 속에 현재를 배치한다. 실제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바탕으로 한 김지은의 최근작은 인구의 대다수가 수도권에서 아파트에 살며, 주기적으로 이동한다는 한국의 현실이 집과 비장소의 차이를 좁혔음을 알려준다. 비장소는 예외적이기 보다는 편재한다. 


특히 어디든 접속할 수 있는 곳이 자기 자리가 되는 정보사회에서 이 추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집은 비장소로 강등되었지만, 반대로 비장소는 집처럼 친숙해졌다. 작가는 이국땅에 있을 때 현지의 스타벅스에서, 한국 스타벅스에서의 추억을 떠올렸던 예를 든다. 동시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어느 날 동시에 생산된 상품의 일종이며, 조건만 맞는다면 당장에도 갈아탈 수 있다. 가격에 맞춰 입주한 곳이 서울이라는 중심에서 다소간 떨어져 있다는 것이 깊은 뿌리내림에 대한 잠정적 유예의 원인이다. 작가가 늘 다니면서 보던 풍경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재개발이 빈번한 한국의 상황에서 그 풍경은 특정 지역을 넘어선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들이 대부분 집과 작업실이 있는 실제 장소에 근거한다. 그곳을 잘 모르는 이를 위해 좌표를 찍자면, ‘병점역에 내려서 34-1번 버스를 타고 오는 길은 화성 태안 3 택지지구와 병점지구 지구단위계획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화성 풍경-가림막_2021, 리넨에 유채, 162.1x259.1(cm)


집이 그 근처로 정해진 이유는 가격과 거리 때문일 뿐이며, 교통인프라가 부족해 집값이 싼 이곳은 아이들이 있는 젊은 부부가 ‘갈 수 있는 마지막 땅’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작가는 자기가 던져진 조건에서 최대한 무엇인가를 끌어냈다. 소외와 충격 등이 어우러진 풍경이지만 스산한 아름다움도 느껴진다. [집 같은 비장소 Non-place Like Home]라는 전시 부제는 ‘세상에 집 같은 곳은 없다’는 노래 가사를 비튼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노래에 그토록 많이 등장하는 고향, 사랑, 정 따위의 관념은 그만큼 그것들이 희귀해졌음에 대한 반증 아닌가. 대중문화가 편안함과 위안을 주려 하는 지점에서 예술은 불편함과 도발을 꾀한다. 비장소에는 국가도 민족도 역사도 없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러한 가치들이 더 이상 편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편안함을 줄 수도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김지은의 풍경에는 인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장소에서의 정체성과 관련된다. 


익명성 속에 숨어들면서 개인으로서의 존재감을 휘발시키는 것이 피차 편한 것이다. 주로 소비자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인 현대인에게 장소 또한 소비 품목으로서 소외를 예고한다. ‘로얄, 팰리스, 캐슬’ 등등의 사치스럽고 이국적인 이름을 조합하여 외벽에 광고하는 아파트는 그 자체가 상품임을 드러내며, 그것이 상품인 한 상품에 필수적인 욕망과 소외를 각인한다. 공간 또한 상품처럼 생성과 파괴를 거듭하며 그 주기는 더욱 빨라진다. 추상적 공간에 의한 구체적 자리의 잠식이다. 김지은의 작품에 나타나는 철거 현장이나 철거 이후의 과도기는 위성도시만의 특징이 아니다, 코로나로 자영업이 어려워지자 서울 중심부에서도 자주 보게 되는 철거 현장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삶 자체가 뜯겨나가고 있는 듯하다. 더 비참한 것은 사라지고 있는 곳이 원래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날 때다. 기억이 없으니 망각도 없다. 



화성 풍경-흙_2021_리넨에 유채_181.8x454.6(cm)



화성 풍경-모델하우스_2021_리넨에 유채_227.3x363.6(cm)


생겨남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억과 망각 사이의 간격은 더욱 좁아진다. 작가는 시작과 끝이 아닌 과정에 주목한다. 계속 파괴되고 건설되는 과정만이 눈에 띄는 나라 전체가 늘 재개발 중인 지역적 특수성이 포함되었다. 전철역과 집 사이에 가림막만 있고 사막처럼 방치된 곳은 무엇인가 허물어졌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 들어서지 않은 과도기의 공간이다. 지구 지정만 되고 오래 방치된 곳도 많은 점이 화성(火星) 같은 풍경을 낳은 원인 중 하나다. 인적없는 붉은 흙더미들은 봉담 n지구의 풍경이다. 작품 속 철거된 모델 하우스는 한시적 수명을 가지는 가건물이자, 그러한 과도적인 공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양식이다. 얼마 전 미국의 대도시에서 홍수가 났을 때 지하에 살던 주거 빈민들이 자다가 죽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떠밀려온 쓰레기와 함께 물이 들이닥쳐 익사한 것이다. 대부분 개발이 된 이후에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철거민에게 철거는 죽음일 수도 있다. 해고가 죽음일 수 있듯이 말이다. 


창밖에 쏟아질 듯 가까이 있는 건축 쓰레기 장면이 절대 초현실주의가 아닐 수 있다는 반증이다. 비장소가 익명적이라고 해서 그곳이 자유로운 곳이 아니다. 그곳이 텅 비워진 것은 빨리 순환되기 위한 것이다. 비장소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빠른 회전율로 이익을 높이려 한다. 상시적인 이동은 누군가에게는 자유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강제다. 비장소는 투명성과 유령화를 요구한다. 머무름이나 삶이 아니라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비장소에서 장기 체류는 불법적이거나 불편한 것이다. 비장소에서는 삶의 흔적을 절대 요구하지 않는다. 그곳에 잠시 흘러든 이들이 돈만 쓰고 가길 원한다. 가격 지불을 비롯해, 경계를 통과한 이에 한해서 누구라도 있다가 갈 수 있는 곳이 비장소다. 모더니즘과 공유하는 어법인 근대 디자인은 이러한 익명적 공유영역의 확대와 관련된다.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없거나 깨끗하게 지워짐이 선호된다. 



화성 풍경-바리케이드_2020_리넨에 유채_97x130.3(cm)



화성 풍경-모란디_2021_리넨에 유채_112.1x193.9(cm)


모텔이나 호텔 등의 숙소 인테리어가 화이트가 많은 것은 그곳이 이전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도 안 되고 나의 흔적이 남아 있어도 안되는 전형적인 비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비장소는 여행 중에나 만나는 예외적인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점 차 확대된다. 비장소의 호환성은 노동/자본의 성격과도 관련된다. 자본에 이어 노동 또한 국제적이다. 노동 또한 호환 가능해야 한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화성(華城)시를 태양계 네 번째 행성인 화성(火星)으로 재해석해 개발 중인 신도시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화했다’고 말한다. 화성, 즉 별은 멀리 있는 희망이다. 별은 유목만큼이나 낭만적이다. 하지만 자기 발밑의 돌멩이도 별과 같은 구성인자임을 인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작가는 한국의 화성과 행성 화성이 동음이의어인 것에 착안하여, 회화나 콜라주 작품에 화성에 간 로봇이 찍은 사진도 활용했다. 


화성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지만, 일론 머스크 등 공격적 투기 성향의 자본가들이 사업에 눈독을 들이는 행성이기도 하다. 지구가 좁아진 모험적 사업가들의 구상은 이제 민간인들도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 부분 현실화 되고 있다. 먼저 가서 깃발 꽂은 기업/국가가 화성(火星)을 분양하는 일이 올 수 있다. ‘위성도시’라는 단어도 있는 것을 보면, 중심과 주변 사이의 관계는 우주적으로 확대될 수 있겠다. 지금 40대 중반의 작가의 최근 10년의 삶만 국한 시켜도 국내에서 이사 다닌 장소가 고양시와 화성시 등, 모두 재개발이 활발하게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 원래 집이나 도시 구조에 가졌던 관심을 지속시켰다. 이전의 대규모 설치 작업들이 국제적 문법에 충실했다면, 요즘 집중하는 회화는 지역성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이미 여기의 지역성이 단순한 지역성에 한정되지 않음에 대한 판단에 기인한다. 김지은은 국내외의 많은 레지던시를 다녔고 이를 바탕으로 관련 서적을 출판하기도 할 정도로  현대의 유목민이었다. 



화성 풍경- 이루세요 내집 마련의 꿈_2021_리넨에 유채_145.5x227.3(cm)


하지만 유목민은 그곳에 완전히 속하기도 전에 밀려나야 하는 신세다. 요즘 회화라는 자기반성적 장르를 주요 매체로 삼은 것은 삶의 어떤 시기를 마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몸이 직접 떠나는 괴로움은 면했지만, 작업 및 작업하는 삶 그 자체는 유목적일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잘하고 있든 아니든 지속적인 갱신을 요구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부터 시작한다. 그 현실은 유기적이기 보다는 단편적이다. 단편은 조화롭게 연결되지 않고 단지 집합되어 있거나 폐기물처럼 쏟아진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콜라주 및 콜라주적인 방식은 서로 다른 것을 충돌시키면서 불연속의 간극을 표현한다. 콜라주는 입체파로부터 비롯된 현대미술의 양식이기 이전에, 매우 다양한 요소가 공존하는 도시 자체의 특성이다. 어느 분석가는 시골이 서사의 장소라면, 도시는 시각의 장소라고 비교하기도 한다. 서사는 뜨겁고 시각은 차갑다. 


도시는 서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무엇인가 지속하지 못한다. 서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사건은 대개 불행이다. 화성은 연쇄살인 사건으로도 알려진 장소 아닌가. 시각은 서사보다 무엇인가를 더 빨리 순환시킨다. 이미지의 순환에 가속도가 붙으면 충돌이 빈번하고 이는 순간적인 기분 전환을 가져다주지만, 상시적인 변화는 변화 자체를 무감각하게 한다. 몽타주가 시간을 충돌시킨다면, 콜라주는 공간을 충돌시킨다. 김지은의 콜라주 작업은 우주까지 확장했다. 척박한 폐허라는 닮음꼴로 행성 간의 먼 거리가 은유적으로 이어진다. 김지은의 콜라주는 큰 변형 없이 두 장면을 겹쳤을 따름이다.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기 때문에 과장이나 색다른 구성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밑그림 같은 무채색 실내와 사실감 넘치는 바깥의 장면이 거대한 창을 매개로 연결된다. 이 장소가 불시착한 낯선 행성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화성 탐사 로봇이 찍은 사진을 활용하기도 했다. 



분양성_2020_캔버스에 유채_지름 60(cm)


회화에 활용된 전단지 등은 대중교통 수단을 타고 다니면서 꾸준히 모은 것이다. 이번 전시가 한 두 해의 관심이 아니라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다가오는 이유다. 시간적 도약은 작품 곳곳에 깔려있다. 하지만 변화하기 이전의 모습은 없다. 재개발이 되기 전에는 그곳도 서울 인근의 작은 마을이었겠지만, 그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작가가 지역연구를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포크레인에 의해 거칠게 파헤쳐진 흙더미를 보면, 이미 한겹 한겹 조심스럽게 시간의 층위를 벗겨보는 고고학자의 섬세한 시선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번 작업의 출발이 된 화성이라는 장소가 ‘택지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사건을 지우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본다. 그것은 화성만의 경우가 아니어서, ‘신도시는 그 자체로 과거의 기억을 몸소 지우고 있다. 본인이 살고 있기도 한 개발이 마무리된 신도시 안에서는 그 어떤 지역색도 역사도 기억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김지은의 회화는 이야기 가득한 통시성보다는 공시성, 즉 시간의 단면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작품은 단편이나 단편의 조합이 되었고, 애초부터 단편적인 풍경에도 주목한다. 매일 보는 옆집 풍경(옆 라인의 아파트 벽면)을 소박하게 기록한 그림은 재개발이 완성된 이후의 장면들 또한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이며, 기하 추상 작품처럼도 보인다. 작품 [옆집 #1~#4]에서 마치 아파트촌을 상공에서 촬영한 구글 이미지처럼 보이는 사각형들은 늘 같으면서도 시시각각 빛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 작가의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우연히 포착된 한 사물의 표면임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이다. 서정적이면서도 냉정하다. 도시 전체의 설계가 외국으로 수출되기도 하는 현대에서 어떤 장면들은 철저히 무국적적이다. 어딜가도 기시감이 있다. 균질화된 유토피아이다. 작가가 살고 작업하는 장소이자 비장소는 파헤쳐진 흙과 건설 폐기물, 가림막과 바리케이드 등을 포함한다. 



옆집 #1_2021_리넨에 유채_100x80.3(cm)



옆집 #2_2021_리넨에 유채_100x80.3(cm)



옆집 #3_2021_리넨에 유채_100x80.3(cm)



옆집 #4_2021_리넨에 유채_100x80.3(cm)


애써 시선을 두지 않으면 곧 없어질 것이라고 간주 될 풍경이지만, 작가는 그곳에서 비장소로 특징될 수 있는 현대성의 본질을 본다. 작품 [화성 풍경-가림막]은 언뜻 저편으로 뻗어가는 아름다운 가로수 길 같은 풍경이지만 나무들 뒤에는 철제 가림막이 쳐져 있다. 그 뒤에는 집도 없고 그렇다고 자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없는데 빈 표지판만 서 있다. 무엇인가 건설되기 위해 이전의 것을 없앴지만, 그 과도기가 꽤 긴 듯하다. 붉은 흙더미는 작은 산처럼 보이기도 하며, 작품 [화성 풍경-가림막]을 보면 가림막 사잇길은 임시 우회로가 아니라 진짜 길 같은 관록이 있다. 이 임시적인 풍경은 오래된 풍경처럼 이미 자리를 잡았다. 현대를 과도기라고 명명한 비평가의 관점에 의하면 영원한 과도기인 현대는 역설적이다. 작품 [화성 풍경-모델하우스]는 임시적인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건축적 규모를 가지는 모델하우스를 주목했다. 


급히 세웠다가 급히 허물어지는 모델하우스는 재개발공화국의 개발 주기를 더 압축적으로 실현한다. 그것은 단순한 모델 하우스가 아니라, 현대적 거주 공간의 원본인 것이다. 모델 하우스는 계획된 진부화나 자본의 회전주기를 빠르게 하기 위한 집도 유행하는 상품임을 알려준다. 전경에 흙더미가 가득한 [화성 풍경-흙]은 건물 잔해가 그 가장자리에 널려있다. 삶의 흔적은 처치 곤란한 쓰레기로만 남아 있다. 흙이 있는 풍경은 관객 앞으로 쏟아질 듯한 위기감을 준다. 둥근 캔버스에 그려서 전시장 높이 붙여 놓은 작품 [분양성]은 화성시와 동음이의어인 화성을 겹쳐 놓는다. 분양이라는 말을 선명하게 새긴 채 떠 있는 붉은 별은 비록 변두리일지라도 새로 지은 아파트를 쉽게 분양받을 수 없는 서민에게는 별나라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풍자하기도 한다. 또한 분양시장은 늘 벌겋게 과열됨을 풍자한다. 비장소라고 해서 자유로운 곳은 아니다. 



전시전경 3층_1



전시전경 3층_2


그곳이야 말로 아무 특징이 없기에 더 규칙이 엄격할 수 있다. 김지은의 작품에서 철제 가림막이나 플라스틱 바리케이드는 추상적인 공간의 좌표가 된다. 그것은 삶의 터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랜드마크는 아니다. 실재하는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추상적 공간인 장소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작가는 중첩을 통한 원근법을 적용했다. 차이지는 평면이 수평적으로 후퇴하는 장면은 마치 무대 같은 느낌이다. 작품 [화성 풍경- 이루세요 내 집 마련의 꿈]은 몇 겹으로 이루어진 평면적 풍경으로, 플라스틱 바리케이드 뒤에 완성 시점의 조감도가 그려진 가림 벽이 있고 그 뒤에 올라가고 있는 중의 건물 끝이 보인다. 그 뒤는 화성의 땅 같은 불모의 풍경이 있다. 작가가 보는 우리 삶의 무대는 디스토피아를 가리는 유토피아 같은 것이다. 작품 [화성 풍경-모란디]는 이쪽의 폐허에서 바라본 저쪽의 폐허다. 한국의 작은 땅덩이를 잊을 만큼 나름 광활하고 이국적이다. 바리케이드 저편으로 보이는 파헤쳐진 붉은 땅 [화성 풍경-바리케이드]는 이 무명의 영토에서 경계는 무엇인지 묻는다. 


갤러리 3층에 집중적으로 걸린 콜라주 작품은 반투명 종이에 연필로 그린 실내와 화성의 사진이 조합된 것으로 다양한 변주로 파생된다. 반투명 종이와 큰 창은 바깥 풍경과 실내를 동시에 보여준다. 개발에 대한 사회의 밑그림을 공시적 구조로 표현하는 것이다. 드로잉으로 표현된 실내는 창밖의 대지보다 더 얇다. 작품 [모델하우스 화성 #2-드로잉]은 지상에 단단히 뿌리박은 집이 아니라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모습이다. 작품 [모델하우스 화성시 #1-드로잉]은 창밖으로 쏟아져 들어올 듯한 건축 폐기물이나 지진이나 해일, 산사태 등, 마치 재난 상황 같은 모습이다. 재개발 현장(현실)과 이 이후의 조감도(미래)를 겹쳐 놓은 작품들은 풍자적인데 작가는 전시장의 벽 또한 같은 맥락에 배치했다. 작품 [갤러리 월 #1-드로잉] 시리즈는 작가가 생각하기에 작품 그 자체로도 보이는 현실의 단편을 그대로 작품으로 제시했다. 



모델하우스 화성 #2-드로잉_2018_디지털 C 프린트 및 반투명 유포지에 연필_29.7x42(cm)



갤러리월 #1-드로잉_2018_디지털 C 프린트 및 반투명 유포지에 연필_29.7x42(cm)



모델하우스 화성시 #1-드로잉_2018_디지털 C 프린트 및 반투명 유포지에 연필_29.7x42(cm)


어떤 현실은 예술보다 더 예술 같으며, 폐허 또한 거리를 두고 보면 아름다울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작품과 관련된 자기 지시적 언급이기도 하다. 화이트 큐브 또한 냉정하게 분석된 아파트나 모델하우스 실내처럼 비장소를 목표로 한다. 무엇을 가져다 놓든 그것이 빛나게 하는 중성적인 배경이 이상적이다. 일반인에게 설치미술을 포함한 많은 현대미술품이 주목할만한 값비싼 쓰레기일 수도 있다. 이 시리즈는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있으면서도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여러 물리적 재료를 공간적으로 구성하는 설치작품은 원래부터 콜라주적이다. 이번 전시의 콜라주 작품은 유화로도 옮겨졌다. 그것은 단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가? 하지만 작가는 콜라주를 형식만이 아닌 내용으로도 파악한다. 즉 콜라주는 현대 도시의 지각방식과 연결될 수 있는 형식이다. 콜라주는 사회학자 안토니 기든스가 ‘멀리 있는 사건의 일상 의식으로의 침입’을 지적했을 때, 현대사회의 전형적 특징이 되었다. 


스코트 래쉬가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학]에서 말했듯이, 연결되지 않는 신문 기사들의 콜라주가 일상생활에 침입하고 일상생활을 형성시킴에 따라 시간-공간 압축이 일어난다. 각각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지속되며 전후에 오는 것과 어떤 특수한 관련도 가지지 않는다. [액체 근대]는 ‘중단, 불일치, 놀라운 일은 우리 삶의 일상적인 조건이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이러한 조건들을 꼭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정신은 갑작스런 변화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자극 이외의 것들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폴 발레리)이라고 인용한다. 파편들이 다시금 조화로운 총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림을 한시도 놓은 적은 없지만 설치 작가로 각인된 김지은에게 회화는 날 선 파편들을 다시금 품어 종합하는 장이라는 매체로 다가온다. 양 매체에 대해 작가는 ‘설치는 발산하는 느낌, 회화는 응집되는 느낌’으로 대조한다. 



모델하우스 화성시1_2020_캔버스에 유채_130.3x193.9(cm)



모델하우스 화성1_2020_리넨에 유채_112.1x145.5(cm)


물론 김지은에게 양자는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지시하면서 공(共)진화하는 매체이다. 붉은 폐허가 보이는 작품 [모델 하우스 화성 1]에서 원래는 창밖으로 푸르른 풍경이 보여야 함을 배반한다. 실내든 밖이든 사람의 흔적은 없다. 작품 [모델하우스 화성시 1]에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않을) 가구들이 채워진 중산층적 실내는 백지같이 하얗다. 광고를 위한 디자인처럼 추상적인 실내는 우리 조상의 어법으로는 ‘터 무늬가 없는’ 황당한 장소다. 그러나 창밖 풍경은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듯 한 건축 폐기물들로 가득하다. 불연속적인 장면을 연결하는 창은 양자의 인과관계를 표현한다. 두 장면의 조합은 파괴를 통해 이 자리가 만들어졌지만, 이 자리의 지속 기간 또한 그리 길지 않을 것임을 알려준다. 세계를 자신에게 품었다가 다시 꺼내는 매체인 회화는 현실을 이루는 불연속적인 단편들을 사뭇 자연스럽게 연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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