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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순 / 밀고 밀리면서 쌓이는 시간의 층

이선영

밀고 밀리면서 쌓이는 시간의 층

 

이선영(미술평론가)


  

배상순의 작품은 겉으로는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그렇지만 휘저으면 감춰진 것들이 떠오를 듯한 잠재성으로 가득하다. 시간의 축만이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검은 벨벳에 하얀 젯소로 그려지는 형상은 애초에 명확할 수가 없다. 수 없는 필획이 거쳐야 겨우 명암 정도가 구별된다. 작가는 이러한 불투명성을 삶과 예술 모두에 적용한다. 매끄럽고 하얀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려지는 전형적인 회화가 아닌, 검은 벨벳에 하얀 젯소로 그려지는 모노 톤의 화면은 절제되며 세련되면서도 멜랑꼴리한 느낌이다. 거기에는 시간의 저항을 이기고 드러내려는 의지, 반대로 모든 행위를 무위와 죽음으로 덮어버릴 수 있는 어둠의 길항 작용이 있다. 작품들은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도 운동감이 있다. 밝음과 어둠의 상호관계는 기억과 망각의 상호관계와 연결된다. 물론 그것들이 이항대립의 관계는 아니다. 기억이나 망각 그 자체는 중립적이다. 가령 치유는 기억으로도 망각으로도 가능하다. 




이하 모든 사진의 출전은 갤러리 이배에 있음.



배상순의 작품은 하나의 항으로 귀결되지 않는 상호적 움직임을 나타낸다. 어두운 배경, 또는 잠재적인 바탕을 이루는 벨벳은 특이하다. 작품의 독특한 면은 검은 벨벳이라는 바탕과 관련된다. 작가는 이 재료에 대해, ‘검은 캔버스 벨벳은 나의 회화에 관한 모든 감각을 엎어주는 매체이다. 흰 캔버스에 드러나는 검은색은 온전히 그대로 원하는 대로 그려져 가지만, 검은 벨벳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온전히 아름다운 검은 바탕으로, 어느 색을 칠해도 강렬한 흡수로 그대로의 색을 드러낼 수 없다. 흰색의 젯소는 흰색으로 온전하기 힘든 상황에서 수만 번 되풀이되는 과정과 축척 된 시간처럼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그 색을 볼 수 있듯이 우리의 관계들도 그러한 과정 중에 발견된다’(2019년 작가노트)고 말한다. 벨벳 위에 청먹과 젯소를 바르고 먹선과 목탄으로 선을 그리거나 젯소를 희석한 물감으로 세필한 화면은 수많은 반복에 의한 명암이 명멸하는 장이다. 원래 이 선은 인체데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작가는 몸을 재현하는 대신에 몸의 리듬을 표현한다. 구조가 아니라 작동을 나타낸다. 작가는 벨벳 작품이 ‘복잡하고 알 수 없는 한 인간의 내면의 깊이와 그리고 또 다른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 생기는 파장과 깊이’(2019년 담 갤러리의 2인전 작가노트에서)에 대한 회화적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내면이나 관계는 명확하게 가시화되기 힘들다. 작품들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축적되어서야 겨우 드러나는 얇은 실 덩어리 같은 이미지들’로 나타난다. 2018년 더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의 작가 노트에 의하면 그것은 ‘관계 안에서 생기는 파장과 깊이’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많은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바람과 물결을 닮는다. 벨벳은 어떤 색을 칠해도 물감의 본연의 색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은폐된 것을 거듭해서 해석하는 과정과 중첩될 수 있다. 회화는 작은 파장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미묘한 연결망이 된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가장 검은 검정은 검은 벨벳이라고 하면서, 이보다 더 깊은 검정은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우주 공간에 있다고 말한다. 에바 헬러는 부패한 고기는 검게 변한다는 것. 그리고 식물이나 치아가 썩어도 검게 된다는 예를 들면서 모든 것은 검정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는 검정 옷을 입고 있다고 인용한다. 배상순이 캔버스나 종이 대신에 선택한 주요 매체인 벨벳은 묶인 매듭을 풀거나 잘라내는 극적 행위처럼, 빛과의 관계 속에서 이상적인 배경을 이룬다. 작가의 붓질은 이 절대적인 검정에서 기억과 의미를 길어내려는 무수한 해석의 몸짓이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의 운명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영겁의 시간이 쟁여져 있는 듯한 화면은 작가기 이미 휘저어 놓았지만 여력은 있다. 소리 없는 매체인 회화는 침묵으로 말한다.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한 작품은 살아있는 존재뿐 아니라 사라진 존재들의 목소리도 깔고 있다. 


그 목소리들은 들으려는 의지가 있는 이들에게만 들리는 다소간 은폐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의 다수를 구성하는 무명의 존재들은 배가 지나간 흔적처럼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SNS 등을 통해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낱낱이 까발겨지는 사회가 도래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의 범람 속에서 그 또한 이전의 선사-역사 시대를 살아왔던 모든 존재들의 역사보다도 더 짧게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을까. 배상순의 작품에 빼곡한 선들은 지나간 것들에 대한 기억과 해석의 몸짓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자연과 역사가 그렇듯이 거듭해서 해석되어야 하는 오래된 텍스트다. 전시 제목으로도 쓰인 바 있고 작품 자체가 ‘시간의 층’이기도 한 작품은 농밀한 밀도를 가지는 추상적 언어를 구사하지만, 작품에 역사와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추상과 서사는 상충되는 면이 있다. 추상과 서사의 만남이 대부분 관념주의로 귀결되는 이유다. 




SangSun Bae_More&Less1_182x368cm_Gesso on velvet_2005~2018



한국과 일본에서 수학하고 양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작가는 매듭처럼 꼬인 한일의 역사 관계에 관련되어 심층 연구를 바탕으로 한 작업을 하기도 했다. 양국 간에는 실로 수많은 사건들이 있어 왔지만, 작가가 개별적 사건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 어법으로 서사를 담기는 힘들지만, 작가는 벨벳처럼 중성적이지 않은 표면 위에 무수한 선을 그으면서 서사의 과정에 상응하는 행위의 흔적을 남긴다. 그러한 행위들에 대한 의미 부여 또한 많은 층을 가지는 지난한 과정이다. 지상적 존재들이 유한한 삶을 살며 오갔던 발자국들 같은 무명의 흔적들이다. 흔적은 길 위에도 길 밖에도 있다. 드로잉 기반의 작품들은 드로잉이 쓰기의 연장임을 알려준다. 씌여진 것 위에 또 씌여지기를 반복한 사연들은 명쾌하게 읽을 수는 없다. 멀리서 본 화면에 파손된 기호 같은 형상이 떠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는 재현주의의 몫이었으나 배상순은 추상 또한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과 자연을 비롯한 지시 대상으로부터 자율성을 꾀한 추상은 피상적으로 될 위험이 늘 있어왔다. 잘못된 해결책은 갑자기 거대 관념으로 수직 이동하는 초월적 자세이다. 배상순은 역사로 확장될 개인의 목소리를 압축해서 담음으로써 잘못된 양자택일을 피해 간다. 벨벳을 포함한 여러 특이한 재료를 활용해서 입자와 선의 흐름을 드러나게 한 기법은 개체들의 삶에 대한 비유가 된다. 입자가 개체라면 개체는 또한 이합 집산하여 선적 흐름이 되고 다양한 방향을 가지는 선적 흐름은 복잡하여 얽힌다. 자연이 그렇듯이 거기에는 빈자리가 없다. 치열한 생존경쟁은 자연에서 자리가 비어있는 순간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배상순의 작품에서 빽빽함은 정지가 아니라 지속적인 운동의 궤적일 따름이다. 몸에서 출발한 지글거리는 복잡한 선적 운동은 고요한 초월과는 거리가 있다. 화면을 확대해도 흐트러지지 않는 작품의 밀도는 각자 유일한 삶을 영위하는 듯하지만, 차원을 달리해서 보면 격세유전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있다. 




SangSun Bae_The Chandelier 1_111x90cm_Archival pigment print, face mount(ed.9-1)_2018



SangSun Bae_The Chandelier 2_111x90cm_Archival pigment print, face mount(ed.9-1)_2018



멀리서 보면 인간의 역사도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쟁취한 자율성은 상대적이다. 회화뿐 아니라 지구에서의 삶 또한 시간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단 대지라는 지구의 표층 자체가 그동안 살다가 죽은 것들의 층 아니겠는가. 죽음 없이 삶이 있지 않음에도, 그 자명한 진리를 일단 인정하고 싶지 않다. 살면서 죽음을 자꾸 생각하는 것은 삶의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고대 철학자들이 말한 대로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고 그 역도 진리이기 때문일까. 삶의 의미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은 죽음을 포함한 좀 더 긴 시간의 주기를 생각한다. 모든 것이 끝인 종말론적 세계관이 아닌 순환적 세계관은 나름의 위로를 준다. 종말론이든 순환이든 개인의 인생을 넘어서는 시간을 서술하기 위한 방식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상순에게 추상은 현실의 배제가 아니라 현실을 축약해서 더 많은 현실을 내포하는 대안적 언어다. 


인간이 원초적 자연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꾀한 이후로도 지구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살기 위한 투쟁은 여전했다. 처음에는 자연과 이후에는 인간과의 게임이 중요해졌지만, 자연의 위상은 여전하다. 전 세계적인 감염병이나 그보다 더 충격적이라 예상되는 기후변화 등 악재가 줄줄이 대기 중이다. 그 모두가 작은 변화들이 쌓여 생긴 거대한 변화이다. 어두운 화면은 묵시록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종말이 아닌 또 다른 삶의 토대가 된다. 그리기와 지우기가 큰 차이가 안 나듯이, 사라지는 점과 선은 동시에 생겨나는 점과 선이기도 하다. 소용돌이 같은 흐름 속에 피드백은 즉각적이다. 자연 생태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인간적 삶 또한 항시적인 경쟁이다. 평화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전쟁 같은 삶의 짧은 막간극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힘의 균형일 따름이다. 전쟁과도 같은 경쟁 속에서 말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존재들의 사연은 더불어서 묻혀간다. 




SangSun Bae_The Chandelier 6_111x90cm_Archival pigment print, face mount(ed.9-1)_2018


SangSun Bae_The Chandelier 7_111x90cm_Archival pigment print, face mount(ed.9-1)_2018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시간을 더욱 가속시킨다. 화면을 덮는 일정한 굴곡 면을 가진 선들은 휘젓는 힘들을 연상시킨다. 인간은 맹목적 운명의 지배로부터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삶을 향해 진보해왔지만, 사회적 규칙이 강하게 작동하는 만큼 무질서의 위험 또한 커지는 것이 문명이다. 현대인은 역사 속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힘에 노출되어 있다. 최근 일본에서 발표된 작품들은 생성 소멸하는 미시-거시 우주의 역사를 표현하는 듯하다. 선들로 만들어진 또 다른 선은 풀려난 매듭처럼 느슨하다. 같은 크기의 화면에 끊어질 듯 연결된 방식으로 설치되어 있다. 밀도에 의한 명암 차이로 화면에 나타나는 형상은 매체를 다르게 사용한 배상순의 다른 작품들처럼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존재의 흔적들은 때로 기호 같은데,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변화의 과정을 살리려는 작가의 방식은 정지된 기호가 아니라 기호가 되기 이전이나 이후의 상황을 말한다. 


그것은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자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어두운 바탕에 수없이 그어진 선들은 어떤 명확한 형태, 즉 의미로 귀결되기보다는 생성과 소멸의 흔적 그 자체로 남아있다. 2018년 마이클 위틀과의 2인전 (더 트리니티 갤러리)의 전시부제는 [circle] 이었지만, 배상순의 작품은 완전체의 상징이라할 수 있는 써클이 되려는, 또는 써클이 해체되려는 과정처럼 보이는 느슨한 형상. 풀린 실타래나 용수철 같은 운동하는 선들을 보여준다. 끝없이 움직이는 빛과 그림자의 무리처럼 보이는 화면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절대적 정지란 없다. 벨벳에 젯소에 그린 형상들은 작품 제목처럼 ‘행간’이다. 조형적 언어를 포함하여, 언어는 행간에서 의미 있는 변형이 일어난다. 2019년 갤러리 이배에서의 전시 [시간의 층]에서 벨벳 위에 젯소로 그린 작품은 패널마다 다른 명암의 분포가 반복 속의 차이를 보여준다. 




SangSun Bae_Untitled_Panorama-1s_190x130cm_Gesso on velvet_2019



완전한 동그라미가 아닌 조금씩 어긋나며 회귀하는 선들은 영겁회귀의 신화를 떠올린다. 영겁회귀하는 선들은 다른 밀도에 의해 블랙홀, 또는 화이트홀로 보이는 구멍을 통해 또 다른 차원에서의 영겁회귀를 보여줄 것이다. 최근 10여 년간 발표된 작품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배상순만의 특이한 화법인 벨벳에 젯소 드로잉으로 그려진 작품들은 선의 밀도의 차이에 의해 명암이 갈린다는 특징이 있다. 전시를 위해 걸린 벽면의 작품들은 그 자체가 또 다른 관계를 이루면서 전체가 연동된다. 보통 밑 작업으로 사용되는 젯소가 주요 미디어가 됨으로써 작품은 표면의 묘사가 아니라 그 아래의 실재를 암시한다. 그것은 지상에 태어나 생로병사를 거치며 노동과 예술, 전쟁과 평화의 여정들을 거치고 살아갔을 개체들의 흔적이다. 수많은 공회전, 헛수고, 우회로와도 겹치는 선들은 세상사에 직선적 해결책은 없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무수한 선들의 흐름을 통해 작가는 무명의 영토를 표현한다. 


이 가는 선들은 매듭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2013년 [부러진 매듭] 전(담 갤러리)의 전시 작품에는 잘려 나온 매듭 뭉치 이미지가 사진 프린트 작품으로 나와 있다. 확대된 이미지다 보니 밧줄을 이루는 또 다른 미세한 선의 흐름이 드러난다. 다른 작품들은 결국 매듭이 풀려나가는 과정이다. 잘려지고 풀어지는 매듭에서는 사람의 얼굴이나 몸 같은 느낌이 있다. 모체와의 연결을 끊어내고 시작하는 삶 자체가 매듭이 생기거나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또는 단호하게 잘라내는 과정의 반복 아니겠는가. 캔버스에 젯소, 목탄, 먹으로 그린 매듭은 얽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화이트의 경쾌한 선율이 겹쳐진다. 벨벳에 그린 회화 이외에 사진, 도자, 설치 등 다른 매체를 활용한 작품들 또한 선적 흐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지속적이다. 2019년 갤러리 이배의 전시 [시간의 층]에서는 그물에 걸려 나온 덩어리들이 담긴 사진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몸, 또는 마음에 뭉쳐져 있을 덩어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SangSun Bae_Untitled_Panorama-2s_190x130cm_Gesso on velvet_2019



이미지에 포함된 수많은 선적 흐름은 한시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개체들이 행해왔을 그만큼의 몸짓들이다. 배상순의 작품은 타자와의 관계를 역사적 관계까지 확장 시킨다. 2015년 대전문화재단의 지역 리서치 프로젝트를 통해 한일 근대사에 관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기억을 수집하고 해석했다, 사진과 영상작품으로 만들어진 이 주제는 국가 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태어난, 가령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 사람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배상순의 작업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풀 수 없는 매듭을 사회나 개인의 차원에서 풀 수 있음을 암시한다. 국가 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관계 속에서 이름 없는 민초들의 이야기는 묻혀버리기 마련이다. 2019 작가 노트에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개개인의 이야기에는 관계를 형성해가는 치열한 삶의 과정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수없이 되풀이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 벨벳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역사 속의 무명인들의 운명을 본다. ‘생존하여 살아남은 자들의 아우성처럼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침묵하는 것에 말을 부여하는 힘든 작업이다. 작가에게 매듭은 관계의 은유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체로부터의 분리라는 원초적 트라우마로부터 삶을 시작하지 않는가.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 즉 관계의 연속이다. 여기에는 순리적인 관계도 잃고 꼬인 관계도 있다. 작가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의 예를 들면서, ‘우리 안에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매듭처럼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매듭이든 풀거나 잘라내야 자유로워진다. 그러한 모색 속에서 생겨난 해법에 대해 당면했던 매듭 짓게 된다. 매듭과 매듭에서 풀려난 듯한 선적 흐름들을 보여주는 배상순의 작품은 조형적 언어와 내용을 중첩시킨다. 매듭은 신화부터 심리학까지 보편적인 상징으로 등장해왔다. 



(참고) 2013년 [부러진 매듭] 전(갤러리 담)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이미지와 상징; 주술적-종교적 상징체계에 대한 시론]에서 묶음과 풀림의 관계 속에서 매듭의 상징을 해석한다. 엘리아데는 선사시대에 올가미를 무기 삼아 실제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들면서, 원시적 사고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무기라도 주술적 수단이 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질병이 바로 올가미이므로 죽음은 최고의 결박인 셈이다. 질병과 죽음, 이것은 거의 전 세계에 가장 대중적으로 유포되어 있는 결박의 주술적-종교적 복합체를 구성하는 두 요소이다. 배상순의 조형어법에 깔린 반복의 방식 또한 주술적 느낌이 있다. 주술에 대항한 주술이다. 배상순의 작품에서 매듭은 개인적 차원이나 역사적 차원에서 지상의 한 자리를 잡고 살아가야 하는 모든 존재들이 피할 수 없는 삶의 투쟁을 상징한다. 작가는 벨벳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거의 불가능한 행위를 전쟁과도 비유한다. 하지만 매듭은 풀림을 위한 전조이기도 하다. 매듭이 풀리기 위해서는 관계의 재설정이 필요하기에 타자와의 관계는 중요하다. 


신화학자 진 쿠퍼 또한 매듭의 속박하는 힘은 항상 풀어주는 힘을 내포하고 제약과 동시에 결합의 뜻을 가지므로 매듭의 의미는 양면 가치적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매듭은 또 연속, 연결, 계약, 고리, 숙명, 인간을 숙명적으로 속박하는 것, 결정론, 불가피한 일을 상징한다. 매듭을 끊는 것은 구제와 인식에 이르는 지름길을 취함을 나타낸다. 정신분석은 매듭에 대한 이러한 고풍스러운 상징에 현대적 함의를 제시한다. 자크 라깡의 보로메오 매듭(Borromean knot)은 심리적 존재에 대한 모델이다. 이 매듭의 모델에 따르면 인간은 실재와 상상, 그리고 상징으로 얽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은 더 이상 깊이의 모델이 아니라 표면의 모델로 설명된다. 이러한 심리적 모델에서 실존의 세 영역은 하나가 풀리면 다 풀리게 되어 있다. 세 영역은 각각의 본질보다는 상호 간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현대의 언어학이나 기호학은 의미가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고 정의한다. 수많은 결의 관계 그자체가 본질이 된 배상순의 작품 또한 기호적 차이 속에서 의미를 길어낸다.

  

출전; 우수전속작가 비평지원 프로그램(예술경영지원센터-갤러리 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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