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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 희망에 대한 토포스

이선영

희망에 대한 토포스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철의 작품에서 인간 삶과 관련된 이런저런 구조물은 거대한 산으로 대변되는 대자연에 비해 소규모다. 집을 비롯한 인공구조물은 숨은 그림처럼 화면의 주변부에 자리한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 또는 문명과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휴가철 빼고는 자연에 대해 잊고 살다시피 하는 현대적 삶에서, 자연에 대한 이러한 비중은 그가 학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산수화로 대변되는 동양적 풍경화에서 인간은 미소하다. 서양화에서는 낭만주의 시대나 돼서야 인공/자연의 비율이 대폭 벌어졌을 따름이다. 미(美) 만으로는 재현될 수 없는 숭고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주체를 중심에 놓은 전통은 여전했다. 주체의 이성이 주체의 상상력으로 변모했을 뿐이다. 최근 정철의 구상적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 산 또한 ‘마음의 산’이라는 점에서 낭만적일 수 있다. 풍경의 중심은 산이지만, 부분으로만 드러나는 산의 중심은 숨겨져 있다. 또는 부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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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거기의 분위기로 푸근한 느낌이다. 지금 여기에서 각자 당면한 구체적 과제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망에 부응 할 수 있는 풍경이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것에 대해 인간은 관대하다. 그것이 누군가의 고난의 과정이나 산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예술은 대중문화가 그러한 역할을 본격적으로 담당하기 전까지 그 기능을 맡아왔다. 특히 멀찍이서 보는 풍경화가 그렇다. 요즘은 그 역할을 주로 사진이 맡고 있다. 멀리 있기에 편안한 대상에 대한 가상적 소유는 그림으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이다. 누군가에게 어디에 다녀왔다고 자랑하는 사진에는 얼마만큼의 풍경화가 있는 것이다. 정철의 작품에서 계절과 시점의 변화가 있을지언정, 산이라는 소재는 일관적이다. 그의 산은 지금 여기와 다른, 따로 존재하는 시공간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신화적 차원을 가진다. 신화는 신성한 시공간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신성한 공간이라는 개념은 주변의 세속적 공간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서, 이 공간을 축성했던 원초의 성현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성벽은 군사적 보루가 되기에 앞서서 주술적 방어물이다. 그것은 악마와 원령이 우글거리는 카오스적 공간의 한가운데에 조직화 되고 우주화 된, 즉 중심을 갖춘 공간이나 영역을 확보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주술적 원의 첫째 목적은 이질적인 두 공간 사이에 칸막이를 세우는데 있다. 정철의 작품 속 우주는 이러한 신성한 시공간의 반복이며 복제라고 할 수 있다. 산으로 겹겹이 둘러쳐진 공간에서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은 자연의 법칙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규칙대로 살아간다. 이러한 시공간 바깥은 혼란하고 위험하다. 실낙원 이후, 복락원을 꿈꾸는 현대인 중의 하나일 작가는 밖에서 안을 그린다. 하지만 현실은 신화가 아닌 역사의 압박을 받는다. 묵시록적 사건들로 점철된 뉴스를 보자면 역사 또한 신화의 하나 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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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에 살고싶네], 162x130cm, 2021.



진보와 새로움은 역사를 추동하는 관념이지만, 출발과 목적이 없는, 변화를 위한 변화는 삶을 고갈시킨다. 엘리아데는 현대인이 신화를 필요로 하는 이유로, 원초적 시공간으로의 복귀를 통해서 갱신을 꾀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본다. 작품을 통해서라도 그러한 신성한 시공간으로 복귀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작가다. 예술은 중요하지만 삶의 주요 무대에서는 사라진 종교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종교는 분업에 의해 갈갈이 찢어진 현대인에게 전체와 실재에 대한 느낌을 제공하며, 이는 예술도 공유하는 부분이다. 엘리아데는 [이미지와 상징]에서 인간 존재라면 모두 총체적 실재, 신성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중심, 스스로의 중심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지향한다고 말한다. 실재의 한가운데에 천상계와의 교신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중심이 있다. 인간에게는 여기에 있으려고 하는 뿌리 깊은 욕망이 있다. 많은 민족들의 신화에 등장하는 산은 중심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정철의 작품 속 산 또한 중심을 상실한 시대에서 ‘세계의 중심, 실재의 한가운데에 있고자 하는 욕망’(엘리아데)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중심은 처음부터 자명하게 존재하기 보다는 다시 찾아내야할 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일단 그의 작품에서 산의 모델은 마을의 뒷동산에 불과했다. 국토 면적에 비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의 산악 지형은 거의 모든 초등학교 교가에 근처 산 이름 하나쯤을 들어가게 했다. 어른이 되어 부쩍 좁아 보이는 이전의 교문만큼이나 상대화되기 마련인 그 산조차도 시시콜콜 재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산들이 작가의 마음 속에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고, 그것을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호출할 때 지금 여기에서의 어떤 욕망을 투사하는 것이다. 작품 속 산들은 중심이 있을만한 장소를 암시한다. 신화-종교적 사고는 구조적이지 개인적이지 않다. 정철의 산 또한 단순한 개인적 의미부여는 아니다. 




[파량새는 있다], 162x130cm, 2021.



 [청산에 살고싶네]. 227x181.8cm, 한지에 아크릴 과슈, 2021년.



젊은 시절 누구보다도 뜨겁게 작업했던 작가는 그동안 예술에 강한 의미 부여를 해 왔지만, 요즘은 주체가 아닌 대상의 시점을 중시한다. 내가 아닌 타자가 나를 보는 시점으로의 이동이다. 작가는 ‘근래에는 내가 바라보는 것이 아닌, 대상이 나를 바라보듯이’ 그린다. 그것은 시선의 교환에 있어서 타자의 몫을 늘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체는 발신자이기 보다는 촉발자의 위치로 변화한다. 주체를 유일한 발신자로 설정하지 않을 때, 의미는 다소간 모호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열릴 수 있다. 이때 작품은 작가가 집어 넣었다고 생각되는 의미를 온전히 다시 꺼낼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재현주의적 오류이며, 소유의 강박관념에 불과하다. 독백이 아닌 대화에서, 의미는 고정이 아닌 과정이다. 작품은 의미를 찾기 위한 작가와 관객의 대화이다. 문학과 비교하자면 산문이 아닌 시다. 최근 작품 [청산에 살고 싶네](2021)에는 눈구멍처럼 뚫린 산수가 있다. 난데없는 산의 구멍은 산에 있을 법한 샘의 변주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샘이 있는 산의 모습은 많이 발견된다. 한지에 아크릴 과슈로 그린 샘이 등장하는 작품들 하늘을 비추곤 한다. 소나무, 학, 정자, 버드나무, 작은 새와 아이 같은 소재는 동양화의 분위기를 풍긴다. 멀리서 포착된 듯한 풍경인데도, 생략되지 않는 것은 여기와 저기를 잇는 가느다란 길이다. 길과 연결된 샘은 하늘을 비추고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또한 그것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입구이다. 여기에는 선적인 길과도 다른 도약과 비약이 있다. 그의 그림이 자전적 기억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이다. 지금은 동/서양화의 기법과 재료를 모두 활용하는 정철의 작품 속에서 정자나 집, 오래된 방앗간과 동네 가게, 밭두렁 등 원래 작을 수 밖에 없는 것들은 그와 함께 하는 작은 인간들과 함께 한 시대와 공간을 상징하는 소재들이다. 작은 시골집이나 가게들, 사방이 뚫린 정자 등은 취약해 보이지만, 철학자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말한 집의 위상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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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는 집을 ‘세계에 내던져지기에 앞서 존재하는 요람’과도 같은 것이라고 비교한다. 삶은 이러한 요람같은 곳, 즉 포근하게 숨겨지고 보호되어 잘 시작된다. 바슐라르는 공간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은 공간에 머무르며,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곧 문 밖으로, 집의 존재 밖으로 내쫒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집이라는 모성적 존재의 원초적 충족성은 상실된다. 그것은 주체로 하여금 상실을 잃어버린 시공간을 찾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 정철의 작품 속 길은 그러한 운동을 상징한다. [공간의 시학]에서 인용되듯이, ‘길은 바로 활동적이고 변화 있는 삶의 상징이고 이미지’(죠르쥬 상드)인 것이다. 여기와 저기를 나누고 연결하는 길은 풍경 속의 여러 사물의 관계를 암시한다. 가령 낡고 작은 집과 비교되는 풍력발전기와 같은 보다 현대적 대상이 그렇다. 전경의 작고 오래된 구조물들과 원경의 거대한 기계는 대조적이다. 


오래된 집, 방앗간, 구멍가게, 정자 같은 구조물과 비교되는 풍력발전기에 대해 작가는 ‘나와 거리가 먼 이상’, ‘산 넘어 이상향’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대개 작가는 이쪽 집에서 저쪽 기계를 본다. 기계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중성적 모습이다. 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여기에 머물러 있는 나를 채근하고 각성하게 하는 불편한 존재일 수 있다. 대지 또는 산등성이와 밀착한 작은 집과 비교하면 멀리서도 보이는 그것들은 발전된 미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전체가 드러나지 않는 발전기는 자연을 ‘개발’하는 거대한 타워크레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을 통째로 갈아 넣을 듯 거친 개발의 광풍은 무늬만 생태주의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풍력발전기나 태양광발전 등은 한국적 지형에서 효율이 떨어지며, 미래의 대체에너지에 대한 상징적 구조물로 나타날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미래의 상징으로 제시된 저 너머의 기계는 그다지 우호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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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산등성이에 어색하게 꽂혀있다. 하지만 산은 그 조차도 넉넉하게 품고 있는 듯하다. 인간이나 자연으로부터 왔다면 산으로 대변되는 풍경은 모태적 공간일 터이다. 모태적 공간은 자연스럽게 중심이 된다. 하지만 늘 부분으로만 제시되는 정철의 산 풍경에서 중심은 모호하다.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에서 엘리아데의 ‘성스러운 중심’이라는 관념을 비판한다. 중심은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국가적 신화가 아니라 개인적 신화라 할지라도 말이다. [자리잡기]는 종교학자들의 글에 등장해서 익숙한 명사인 성스러운 공간(sacred space) 보다는 자리(plce)에 대한 사회적이고 동사적인 이해를 담고 있다. 중심은 연결보다는 분리의 장소를 표시한다는 것이 조너선 스미스의 논지다. 또한 그는 상실이 꼭 불화, 타락, 비존재라는 카오스로의 침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한다. 그 대신 상실은, 존재했지만 지금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현재로서 남아있는 것을 조율하고 변화시키는 복합적인 과정의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심을 찾으려는 자는 그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타자--사물, 사람, 혹은 표지--안에 자리잡음으로서 영속성을 성취한다. 즉 영원한 중심이 아닌 영원한 접근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영원한 접근은 기억을 위한 반복적인 표시를 낳는다. 그것은 안정적인 중심의 이미지가 아니라 ‘경로, 길, 자취, 표시 그리고 발자국의 언어’(조너선 스미스)이다. 그것은 중심이 아니라 차이(difference)의 문제다. 잃어버린 시공을 되찾기 위한 정철의 작품에서 반복적인 붓질은 차이를 발생시키는 원동력이다. 중심은 재현되지 않고 반복과 차이의 운동 속에서 제시될 따름이다. 모태적 공간은 중심이라고 할 수 없듯이 푸근한 것만도 아니다. 인간은 그곳에서 생겨났을지언정 문명의 세계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죽음이다. 정신분석학은 어머니, 또는 모성적 영역을 떠나지 못하는 이를 환자 취급한다. 인간은 상상적 자아를 떠나 아버지의 세계로 알려진 상징적 세계로 진입할 때 비로소 사회적 주체가 된다는 가설에서, 모성적 영역은 그것이 아무리 충만한 원천이라 할지라도 지양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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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개체가 되기 위해 전체를 떠나야 하는 문제다. 개체가 온전한 것인지 전체가 온전한 것인지는 전통/현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영역은 상징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근본적 현실이기도 하며, 사회에 널리 통용되는 지배적 언어의 공회전을 변경시킬 수 있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삶이 사회적인 영역으로 국한되면서 모성적 영역, 또는 자연은 양가적으로 다가온다. 요컨대 그것은 현실의 보이지 않는 몸통, 즉 실재지만, 코드화되어야 사회에 통용될 수 있다. 코드화의 대표적인 방식은 전체를 잘게 나누는 것이다. 분절화 되지 못한 것들은 생산되지 않은 것, 그래서 소비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누어지지 않는 것, 나머지들, 경계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는 것들은 배제된다. 그렇지 못하면 현실계(실재계)는 주체를 삼켜버릴 것이다. 정철의 작품에서 산으로 대변되는 자연 또한 모호한 대상이다. 작가는 그 산들을 무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산들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된다. 


작가는 아이의 시점을 택함으로서 동네의 작은 산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했다. 그 산은 어린 눈으로 볼 때 매우 컸기 때문에 전체가 포착되지 않는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유년시절의 관점을 되찾고자 했다. 현실보다는 상상의 세계가 더 강한 유년시절의 관점은 정확한 이해와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지만, 그것은 마법환등(판타스마고리아)과도 같은 자본주의적 현실과 오히려 거리를 둘 수 있다. 오해는 이해를 위한 전제조건인 셈이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어린 벤야민이 당면한 세계에 대한 첫인상, 이방인의 시점, 잘 알지 못함을 강조한다. 동네의 작은 뒷동산을 절대적 존재로 여겼던 작가의 ‘오해’는 이후 그 시공간을 다시 기억하기 위한 반복적 행위를 낳았는데, 그것은 퇴행이라기 보다는 세계와 마주했던 신선한 느낌의 회복을 위한 것이다. 철학자든 예술가든, 모든 게 말랑말랑하고 신선했던 어린아이의 시선을 회복하는 것은 세계의 재발견을 위한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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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램 질로크는 벤야민에게 어린아이의 알지 못함은 때로는 통찰력을 발휘하는 또 다른 방식의 앎이라고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벤야민은 묘사 가능한 공간을 생성하기 위해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잃어버린 지각, 어린아이의 습관화되기 이전의 시선을 다시 포획하려 시도한다. 아이, 즉 ‘잘 알지 못하는 주체’는 예술에 있어서 새로움과 각성을 야기할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거는 정확히 기억되고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어린 시절로 대변되는 과거는 끝이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성격을 가졌을 뿐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고 현재 속에서 변형되는 대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벤야민의 역사와 구원 개념의 기초가 된다고 평가한다. 물론 그램 질로크는 유년 시절 그 자체가 순수하게 행복한 상태는 아님도 덧붙인다. 성인들은 이상형을 유년 시절에서 찾으려 하지만 어린아이도 천국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유년 시절에 대해 낭만적인 관점을 갖지 않았고 유년 시절로의 회귀를 옹호하지도 않았다. 다만 어린아이의 첫인상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중요했다. 동화같은 장면이 겹쳐지곤 하는 정철의 작품은 입체작품에서도 반복되곤 한다. 조각칼을 이용한 작은 목각작업은 만화적 인물을 보여주는데, 마치 캐릭터처럼 지인들의 인상을 뽑아 간결하게 표현한다. 아이, 또는 아이적 관점은 그가 속했던 자연-문화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일 수 없다. 내가 태어난 터전이고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지만, 동시에 그 밖으로 가야 하는, 즉 알을 깨야 하는 양가적 상황은 늘 존재한다. 떠남과 극복이라는 원형적 사건은 자연에서 인간이 되는 과정에 필연적인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그러한 통과의례를 실제적 위험 없이 대신 실험하게 한다. 작가는 한 영역과 또 다른 영역 사이의 경계를 가느다란 선으로 연결한다. 예술은 시공간을 거슬러 이동할 수 있는 유력한 장치이다. 




[기운의 조율], 100x50cm, 캔버스에 아연 파우더



[기운의 조율], 100x50cm, 캔버스에 아연 파우더



정철은 그림같은 풍경을 그리기는 하지만, 대부분 도시인일 관객의 향수에 호소하는 상투적 소재를 나열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실제 체험은 자연에 대한 도시인의 원형적 이미지와 가까울 따름이다. 산자락 아래의 마을 아이들은 고향을 원형으로 하는 유토피아의 전형적인 표현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정철에게는 그것이 실제의 체험이었고 기억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산이 둘러싸인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햇빛이 잘 드는 산자락에 앉아 신작로 쪽을 바라보며 산 너머의 세계를 꿈꾸었다. 그 자리는 대개 무덤이었다고 한다. 산 안의 또 다른 산이라고 할 수 있는 무덤가에서의 상상은 작가로 하여금 30대까지 [무덤 앞에서]라는 제목의 작품을 하게 했다. 하지만 생의 끝이 아니라 생과 사의 동시적 터전인 산-무덤은 어둡지만은 않았다.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동양에서 자연스러운 순환적 세계관은 종말론적 비극과는 차이가 있다. 


삶과 죽음은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비춰준다. 죽음은 삶의 보이지 않는 배경 막을 이루며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작품 속 여기와 저기를 잇는 가느다란 선(길)처럼 무한과 유한은 연결된다. 그의 풍경은 어느 정도까지는 안빈낙도로 보일 수 있다. 무덤의 분위기를 걷어낸 요즘 스타일의 산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무렵이다. 어릴 때 부모와 떨어져 살았기에 저 너머의 세계는 여기의 부재와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희망의 방향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색의 계열로 표현되기도 하는 첩첩산중은 희망으로의 여정이 쉽지 않음을 알려준다. 산 너머에는 또 다른 산이 있을 것이고 그런 연쇄는 끝이 없는 욕망, 삶, 특히 예술의 여정 그자체일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살았던 그에게 산은 ‘내가 머물고 먼 곳을 바라보는 곳’이자 ‘절대적 존재’이며. ‘저기를 넘어야 하는 장벽’이었다. 초교 4학년 이후부터는 계속 도시에서 살았지만, 인간의 원초적 감성과 경험의 기반을 이루는 시기를 그곳에서 보낸 것은 중요하다. 




[기운의 조율], 100x50cm, 캔버스에 아연 파우더



[기운의 조율], 100x50cm, 캔버스에 아연 파우더



나이를 먹을수록 그 시절에 대한 비중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잊혀졌거나 억압되어 있던 것은 복귀되는 것이다. 추상화를 그리기도 하지만 형상이 있는 작품을 할 때 산 풍경이 나오는 것은 추상화와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 침전되어 있던 것이 작업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형태 뿐 아니라 기법도 삶을 반영한다. 세필로 쌓아 만든 산의 몸통은 도시에 나가 있는 부모님과 함께 살기를 손꼽은 시간 만큼이나 수없이 세어진 선들이다. 그것은 특정한 산의 재현이 아니라 자연의 실재성에 상응하는 두툼함 층위들을 반영한다. 최근 전시에도 일부 출품되었지만 그에게 추상은 구상 이전의 그의 주요 어법이었다. 그는 추상의 언어로 ‘내적인 기운’을 표현했다. ‘먹으로 긋듯이’ 조율하는 형태가 특징적이다. 한 개, 두 개, 세 개의 필 획들이 보이는 화면은 녹이 스는 철가루를 활용하여 시간의 흐름을 새겼다. 도자기 같은 물성을 가지는 바탕은 속도감 있는 붓의 흔적을 두드러지게 한다. 


하지만 자연의 경우 한 번의 붓질로는 불가능하다. 그의 산은 나무도 풀도 없이 오직 세필의 선만으로 채워진다. 한 겹도 아니고 여러 겹이다. 위아래로 그은 선들은 위로는 태양을 향하고 아래로는 대지를 향하는 식물적 존재의 방식을 제시할 뿐, 산에 서식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요소들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그것은 자연의 과정을 작업의 과정에 중첩시키는 것이다. 동양화 붓으로 그리고 나중에 서양화 세필로 덧그리는 화면은 여러 층의 복합체다. 때로 산이라는 글자 세필로 찍어서 쌓아 올리기도 한다. 수많은 반복을 행하는 작업은 미의 창조를 넘어선 수행의 차원에 접어들게 한다. 어떤 것이 그려졌던 그림 자체가 추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작품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작은 집과 사람, 동물, 구조물 등을 나타내는 재현적인 선이 아니라 추상적인 선이다. 종이나 캔버스 위에 아크릴 과슈로 그려진 풍경은 서양화/동양화의 구별을 무색하게 한다. 




[무덤 앞에서], 53x45cm,한지에 먹, 2003년.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 구별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지만, 전통이든 현대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모색을 통해 발견해야 하는 과제이며, 작가 또한 자신의 감성에 맞는 재료와 기법을 꾸준히 실험해 왔다. 동서양화 붓을 모두 활용하는 그의 붓질에는 스밈도 있고 겹쳐짐도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불투명 수채나 분채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고 말한다. 화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은 색감을 결정한다. 녹색은 여름, 붉은색은 가을, 흰색은 겨울을 연상시킨다. 산이 품고 있는 것은 야생 동물 또는 가축과 사람들, 그리고 자연에서 필요한 만큼만 얻는 고풍스러운 삶의 장치들이다. 그러나 그의 풍경에는 불연속의 지점들이 있다. 우선은 산 안쪽과 산 저편이지만, 산 안에도 다른 계절이, 가령 전경은 봄, 원경은 겨울 같은 모습 있다. 순차적으로 짙어지는 색조의 계열과 글자 등이 중첩된 선들은 무거운 느낌 없이도 자연의 깊이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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