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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 / 기억의 지층 사이에 스며들다

이선영

기억의 지층 사이에 스며들다

  

이선영(미술평론가)

  


켜켜이 덮은 색층의 표면이 긁혀 또 다른 층위들이 드러나는 작품들은 작가가 정한 게임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우연성을 포괄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엄밀하면서도 트임이 있는 예술의 방식이며, 또한 놀이 방식이기도 하다. 마치 퇴적층처럼 여러 색이 깔리고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색도 여러 가지다. 예기치 못한 만남과 공존, 대화를 위해 깔려 있어야 할 맥락은 여러 갈래다. 밑색과 윗색, 즉 층위가 다르게 칠해진 색들이 순간적으로 만나는 상황을 작가가 완전히 조율할 수는 없다. 작업은 작가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장이다. 시간 차를 두고 켜켜이 덮여 있는 층이 어떤 원인에 의해 바깥으로 드러나는 과정은 트라우마와 기억을 연결시킨다. 작가가 ‘그리기’를 위해 붓 대신 사용하는 기구들은 매우 날카롭다. 기구 중 하나인 전각도는 창덕의 작품이 새겨지는 것이기도 함을 알려준다. 회화적 표면과 그 위를 덮는 물감을 몸과 체액과 비교한다면, 매끈한 표면이 열리는 과정은 폭력적이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 



1.Chora 21-1, 2021, Acrylic on canvas,117cm×91cm


2.Chora 21-2, 2021,Acrylic on canvas,117cm×91cm


3.Chora 21-3, 2021,Acrylic on canvas,117cm×91cm



색상의 대조에 따라서 감춰진 빛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으며, 화려한 색 뒤의 바닥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도 있다. 올해 일본 전시의 부제인 ‘숨’은 불현듯 열리는 틈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새로운 지각 또는 아득한 기억의 문턱이 될 수 있다. 화폭에 행해지는 작가의 행위는 지금 여기에 현전하는 것에 균열을 내고 숨통을 틔우는 것이다. 그러한 놀이의 과정이 지속되면서 현존의 체험이 가능할 것이다. 일순간에 고정된 시간의 단면은 과정 중의 한 국면으로 상대화된다. 작가는 다시금 시작하기 위해 마칠 따름이다. 예술은 놀이와 함께 이러한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인생의 여러 항목 중 되돌이표가 가능한 것은 많지 않다. 물론 작업은 동일한 것의 반복, 즉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의 드러냄이다. 그것은 반복과 차이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화면을 덮은 색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선, 표면에서 떨어진 흔적 같은 필연과 우연이 복합된 작품은 추상적이면서도 조형 언어 그자체에서 파생되는 의미에 의지한다. 하지만 형식주의는 아니다. 

덮기 또는 쌓기, 긁기와 같은 물리적 과정은 심리적 육체적 과정과도 비교될 수 있다. 긁혀지거나 떨어져 나간 표면은 가학/피학적인 과정처럼 고통이자 열락이다. 몸에 새겨지는 트라우마/기억은 명확히 재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기억의 장소인 무의식에는 시간성이 없기 때문이다. 순차적이고 단선적인 의미의 부여는 의식의 영역에서 가능할 따름이다. 트라우마/기억은 기저 면에 깔려 있다가 상층부의 요동에 의해 불현듯 위로 떠오르고 기약 없이 사라지곤 한다. 상처를 주는 행위가 계속되는 것은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해 충격을 반복한다는 프로이트의 가설을 떠오르게 한다. 원초적 위험을 닮은 현실적 위험을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행위로 무화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그들이 평생을 걸쳐 맞딱뜨릴 각종 위험을 예견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아이의 놀이에도 선명하다. 하지만 반복은 상처나 죽음을 넘어 쾌락과도 관련된다. 




4.Chora 21-5, 2021,Acrylic on canvas,117cm×91cm


5.Chora 21-8, 2021,Acrylic on canvas,117cm×91cm


6.Chora 21-4, 2021,Acrylic on canvas,117cm×91cm



쾌락적 요소가 없다면 예술/놀이의 과정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프로이트 사상의 거대한 전환점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나타난다고 평가한다. 죽음본능은 파괴적인 것도 공격적인 것도 아니다. 이전에 프로이트는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반복의 모델을 취했고, 이때 죽음본능을 무기적인 물질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반복에는 죽음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 반복에 내포된 쾌락적 요소의 발견을 통해 프로이트는 삶/죽음의 이원론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즉 재평가된 죽음본능은 무기 물질을 향한 회귀가 아니다. 생명체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무생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런 규정은 단지 과학적이고 외적인 정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창덕의 작품에서 삶과 죽음은 단절을 통해 연결된다. 층과 층의 관계가 단절적이기에 드러나거나 드러난 것들이 만나는 방식 또한 단층처럼 불연속적이다. 

이러한 작업은 재현에 전제되는 전략적 순서 대신에 다소간 운에 기대야 하는 과정이다. 화폭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힘에 의해 시공간의 층위는 순간 흐트러지며, 힘과 힘이 집중되는 결절지점에서는 선이 아닌 얼룩의 흔적이 남는다. 지도처럼 드러나는 비정형적 형태는 시공간의 축을 가로지른 흔적들과 함께 하는 미지의 대륙인 셈이다. 4-5 겹으로 칠해진 색 면을 횡단하는 것은 수직, 수평, 그리고 사선이다. 자를 대고 명확히 그어지는 선이나 특정 형태를 겨냥한 의도적 선이 아니다. 작가는 단지 씨실과 날실을 교차한다는 기분으로 긋는다. 그리는 것인지 쓰는 것인지 무엇인가를 지우는 것인지 모호한 선들은 유희적 리듬을 타고 칠해진 색 면을 횡단한다. 작가는 특히 사선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선은 재현의 축과 중첩될 수 있는 수직/수평의 좌표축을 비스듬히 벗어나기 때문이다. 창덕의 작품에서 사선들은 보다 역동적이다. 기원과 목적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가속도를 붙여야 하는 작업에 필수적이다. 




7.Chora 21-9, 2021,Acrylic on canvas,53cm×73cm


8.Chora 21-13, 2021,Acrylic on canvas,72cm×91cm



몰입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올 수 없는 작업에서 시간의 흐름은 균질하지 않다. 특히 창덕의 작품은 탄생의 과정을 중시한다.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코라’라는 탄생과 그것의 결과이기도 한 죽음을 포괄한다. 이번 전시는 최근 1-2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작품들로 이루어졌지만, 최근까지도 한 작업의 주제는 ‘CHORA (MATERNAL SPACE)’였다. 창덕의 작품 기조에 깔려 있는 ‘코라’는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관심을 받은 중요한 개념이다. 리처드 커니는 [이방인, 신, 괴물]에서 이성을 무시하고 우리를 해석학적 이해의 경계선으로까지 떠미는 개념이 코라라고 말한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처음 등장한 이 개념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이나 해체주의 등에서 재해석되었다. 플라톤의 코라는 모든 사물의 기원을 탐구하는데서 생각한 것으로, 어디에도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리처드 커니가 [티마이오스]에서 인용한 대목은 코라와 모성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이것은 그릇이며 모든 생성과 변화의 양육하는 자이다...우리들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의 어머니이자 그릇이다....영원하고 소멸되지 않는 공간, 생성될 모든 것에게 그 지위를 제공하는 공간, 감각을 동원할 필요 없이 일종의 비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해되지만 그래서 믿기는 어려운 공간, 우리는 이것을 일종의 꿈에서 본다...’(티마이오스) 창덕은 몇 년전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우리 세계에 있는 모든 것보다 앞선다’(플라톤)는 ‘이 무정형의 공간’을 중첩시킨다. 리처드 커니는 철학자 카푸토를 인용하면서 코라의 모성적 특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한쪽에 융합, 현전, 통합, 순환성, 총체성, 경제성, 동일성 같은 아버지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열거되고, 다른 한쪽엔 코라의 ‘어머니적인 시뮬라크르들(simulacrum)’이 정렬된다. 이때 코라는 ‘무한한 수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공간적 배치'(카푸토)이다. 시작은 플라톤이었지만, 코라는 여성 저자들에게 특히 영감을 주었다. 




9.Chora 21-17, 2021,Acrylic on canvas,53cm×45.8cm


10.Chora 21-19, 2021,Acrylic on canvas,53.4cm×45.8cm


11.Chora 21-11, 2021,Acrylic on canvas,91cm×72cm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티마이오스]에서의 코라를 ‘존재를 담아두는 그릇이자 유모이며 보관장소’(플라톤)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대조한다. 그에 의하면 형상과 질료를 구별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머니에게 형태 없고 수동적이며 무정형적인 질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통해 형태를 부여받는다고 규정함으로서 모성을 수동화시켰다고 본다. 하지만 코라로서의 모성은 ‘고정된 존재태라기 보다는 일련의 생성과정’(스피노자)으로 파악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코라란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원초적 수용기로서 그것은 일자(一者)와 부성은 물론 음절 형성까지도 선행하는 그 무엇’이라고 하면서 몸을 넘어서 언어적 은유까지 확장한다. 이 경우 시적 언어를 말한다. 코라에 관심을 가졌던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코라를 모성을 기호적(semiotic) 과정들과 연결시켰다. 

코라(기호적 코라)는 ‘정체성과 이성 없이 존재하는 요소들을 담고 있는 자궁’(크리스테바)으로 비유되었다. 코라는 ‘처음으로 측정 가능한 육체를 구성하는 것에 앞서 존재하고 생성되는 혼란의 장소’(크리스테바)라는 점에서 모성적이다. 작가는 작품을 모성이 가득한 원초적 시공간과 중첩 시킨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지만 삶의 어떤 시기에 그림자는 전면화된다. 건강했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작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어머니에게 태어난 존재 누구나 격는 일이지만 애써 잊고 억압하는 삶의 어두운 면이 새삼 의식된 것이다. 단절, 부재, 상처, 기억, 망각 등등의 상념이 작업의 전면에 출몰하게 됐다.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던 작업 스타일이었지만, 무의식의 과정은 의식화되었다. 작업이든 자신이든 언제나 (재)발견의 과정일 따름이다. ‘근원적 모태’를 탐색하는 코라 시리즈는 모래로 그려져 완성된 후 다시 흐트러지는 만다라처럼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 한가운데 있음을 보여준다. 



12.Chora 21-20, 2021,Acrylic on canvas,45.8cm×52.9cm


13.Chora 21-22, 2021,Acrylic on canvas,30cm×30cm


14.Chora 21-24, 2021,Acrylic on canvas,162cm×130cm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지만, 어머니로 되돌아간다 함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이 있어야 삶이 있는 것은 종교를 넘어 생태학의 기본이기도 하다. 인류학적 상상계에서 자궁은 무덤이기도 했다. 덮기와 드러내기, 지우기와 그리기, 구성과 해체가 순환적으로 작동하는 창덕의 작업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끝없는 조우이다. 그리고 이별이다. 그러한 역설적 과정을 통해 드러난 것은 일종의 풍경이다. 특히 그것은 차이를 통해 만들어진 풍경이다. 리처드 커니는 코라에 대한 해체주의자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코라를 차연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신비주의자인 앙겔루스 실레지우스는 ‘신은 이 바닥없는 붕괴, 언어의 끝없는 불모화의 이름’이라고 했는데, 데리다는 실레지우스의 신을 ‘코라(간극, 공간, 간격)’와 연결시킨다. 그들의 논지에 의하면 신이 세계를 창조했을 때 신은 무, 카오스, 코라, 혼돈과 공허로부터 모든 것을 만들었다. 

도가니와도 같은 코라에는 흔적과 표지들(희랍어 ‘sémeion’)로 가득하다. ‘신은 창조하며 논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신 스스로의 놀이다.’ (실레지우스) 고대에 상상되었던 원초적 공간에서의 생성과 소멸의 놀이는 현대의 예술가에게도 반복된다. 어두운 색으로 덮인 표면을 수직 수평으로 그어 흔적, 또는 상처를 남긴 작품에서, 가로줄 세로줄의 교차점, 즉 힘을 여러 겹 받은 부분의 표피는 떨어져 나가 바닥에 깔린 색이 드러난다. 표면이 어두워서 그런지 바닥에서 올라오는 색은 빛이 난다. 표면이 떨어질 것을 예견은 하지만, 일부러 떼어내지는 않는다. 아래로 죽죽 그어 내린 선들 사이사이에 사선들이 배치한 작품에서 사선은 수직/수평과 달리 좀 더 모호하다. 그것은 재현의 축을 이루는 좌표로부터 벗어난다. 명확한 좌표를 찍을 수 없는 그것은 방황, 또는 탈주한다. 떨어져 나간 물감의 흔적은 좀 더 복잡다단하다. 작가가 시작은 했으되 완결을 장담할 수 없는 과정 중의 작품이다. 




15.Chora 17-3, 2017,Acrylic on canvas,113cm×161cm


16.Chora 17-4, 2017,Acrylic on canvas,113cm×161cm


17.Chora 17-9, 2017,Acrylic on canvas,113cm×161cm



과정 중의 작업은 그러한 주체에 상응한다. 상응은 반영도 표현도 아니다. 반영이나 표현은 명확한 중심, 즉 주체를 전제하지만, 상응은 작업과 평행한 세계 어딘가에 있는 미지의 존재를 말한다. 책상에 남은 어지러운 칼자국 같은 모습을 한 작품은 표면을 긁는 밀도와 강도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작품의 주조 색은 표면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창덕의 작품들은 대부분 모노 톤이다. 작가는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에 대한 영향과 동시에 처음에 수묵화로부터 시작했던 이력을 언급한다. 강한 집중과 몰입을 자아내는 선 긋기 행위는 점과 점을 이어 재현의 망을 촘촘히 짜는 작업이 아니라, 수묵화 작업을 할 때의 시원하게 내지르는 느낌을 내포한다. 그것은 노동하듯이 하는 작업이 아니라 유희적인 것이다. 유희 또한 코라의 모성적 속성과 관련된다. 언어 이전의 단계인 모성은 새로운 또는 이질적인 것들이 생성 소멸하는 장이다. 

모성은 ‘아버지의 법’인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단절돼야만 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리처드 커니에 의하면 코라는 정체성, 통일성, 신성 등 아버지의 속성을 결여한다. 그러나 코라는 ‘상징적 법과는 다르지만, 불연속성들을 일시적으로 접합시키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불연속성의 효과를 발휘하게 한다’(크리스테바) 현대의 정신분석에 의해 다시 읽혀진 코라는 언어 이전의 기호의 영역이며 사회의 상징적 질서보다는 상상적 혹은 실재의 질서에 가깝다. 리처드 커니에 의하면 코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으며 이야기될 수도 없다. 언표될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다. 하지만 말하기 불가능해도 그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 특히 이전 시대의 재현주의를 넘어서, ‘표현 불가능한 것의 표현’이라는 숭고함의 미학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현대예술은 ‘의미화 내의 이질적인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곧 크리스테바가 말한 기호적 코라이다. 




18.In the arms of THE BAKDUDEGAN,2013, Oriental ink, oriental paper,130cm×67cm


19.In the arms of THE BAKDUDEGAN,2013, Oriental ink, oriental paper60cm×63cm


20.Stratum, 2014, Mixed media,Variable Installation



즉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는 언어의 자취’(데리다)인 코라는 심연의 경험에 접근하는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코라는 ‘해체의 공간’으로, ‘그것 안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그것 안에 놓여진 공간 혹은 간격의 관계이다’ 코라는 ‘닫혀진 열림 그리고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구멍 뚫린 그릇’이며, ‘셀 수 없으며 계산될 수 없는 효과’(데리다)이다. 켈리 올리버의 [크리스테바 읽기]에 의하면 크리스테바는 코라를 ‘법 이전의 법, 먼 공간, 모성적 육체 및 여성과 연관 짓는다. 작가는 ’상실한 어머니/땅의 자리에 남겨져 있는 공허를 메꾸기 위해 글을 쓰고 또 쓴다. 그녀는 코라를 낱말로 채우려고 노력한다.‘(크리스테바)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정신분석]에서 의미 생성을 이처럼 성층화 하는 방식은 언어의 하부적 표상들(세미오틱)에 의해 강화된 논리적 언어가 어떻게 신체적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한 크리스테바는 [시적 언어의 혁명]에서 코라 세미오틱의 개념의 희랍적 어원을 ‘변별적 표지, 흔적, 지표, 징조, 증거, 각인 되었거나 쓰여진 기호, 자국, 상형’ 등으로 설명한다. 작가가 중층적 표면 위에 긋는 형상들은 기호적 코라의 속성이 강하다. 요즘 작업이 나오기 이전에 창덕은 동양화로 시작했다. 작가에게 동양화는 모태 언어인 셈이다. 모든 색이 다 들어있다는 먹, 무엇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필획 등 또한 코라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다. 요즘 주로 쓰고 있는 아크릴 물감은 서양화 재료지만, 유화의 대안으로 이전 동양화 작업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작가에 의하면 동양화는 스미면서 나오는 간 색이 매력적인데, 유화로 대표되는 서양화는 덮고 쌓는 기조를 가지고 있는데다 다음 작업을 하기 위해 말려야 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대안으로 택한 것이 아크릴 물감이다. 요즘 작업에는 이전의 동양화 색감과 방식이 깔려있다. 흐르고 스며들며 담백한 동양화의 매력을 다른 어법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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