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숙
蓮池의 생태까지 자연스럽게 재현 …보기만해도 즐거워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 국보 179호, 높이 22.7㎝ 입지름 4.8㎝ 굽지름 8.4㎝, 15세기 전반, 호림박물관. (앞면)
분청사기는 상감청자를 계승한 것이지만, 점점 상감청자 조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변모를 갖추게 되었다.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한 분청사기 유물은 상당량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것 하나 콕 짚어서 “최고다”라는 의견이 나오진 않았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에 따르면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과 ‘분청사기철화어문병’이 “가장 아름다운 분청사기”로 꼽히고 있다. 이번호에서는 강경숙 교수가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의 아름다움을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분청사기하면 “무기교의 기교”요, “무계획의 계획”으로 한국미술의 특징을 말한 고유섭의 표현이 먼저 떠오른다. 기교는 의도가 개입된다면, 무기교는 의도된 바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의도된 바 없는 표현은 진정성과 순수함이 느껴진다. 기교와 멋으로 잘 준비된 상차림은 막상 먹었을 때 별맛이 없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그러나 오래 숙성된 된장의 구수한 맛은 잊혀졌던 고향을 떠오르게 하듯 원초적인 향수를 느끼게 한다. 분청사기의 맛은 순수함과 구수한 즐거움을 전달한다. 이것은 장인으로서 학습한 경계를 훌쩍 넘어 분방한 즐거움으로 만든 작품이다. 여기에 때로는 익살스러움이 더해져서 마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쓱쓱 그린 선은 바로 연이 되고 모란이 되고 새와 물고기가 된다.
과감한 배치와 생략기법 돋보여
그 중에서도 전해지는 박지 분청사기에는 현대인의 미감과 어울리는 예술성 높은 작품이 많다. ‘현대적’이라 함은 전통적 틀에서 성큼 벗어나 무언가 새로움을 찾아냈다는 것인데, 이런 분청사기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것 하나가 바로 국보 179호인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이다. 고려청자에서처럼 깔끔하고 이지적인 느낌은 없지만 수더분하고 구수한 맛에서 자유 분방함이 느껴진다.
원래 둥근 병의 앞뒷면을 편편하게 두드려 약간 곡면을 이루게 납작하게 한 것이 편병인데, 이 병의 옆부분은 그다지 납작하지 않아 다소 두툼한 양감을 느끼게 한다. 편병의 전후 둥근 면에는 연못의 장면이 묘사되었다. 무늬는 사실적이 아니라 반추상화 되거나 도안화되었다. 한 면에는 너울너울한 커다란 연잎 서너 개가 거의 전면을 차지할 정도로 가득히, 입체적으로 포치되었고 그 아래로 물고기 두 마리가 나란히 헤엄치고 있다. 이들 주위에는 막 피려고 하는 연봉오리를 집중적으로 배치시켰는데 모두 열한 송이다. 연봉오리 중 가장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은 상단 중앙에 포치시켰다.
여기에 더하여 왼쪽 중간 지점에 연밥 뒤로 긴 몸을 가진 한 마리 물새의 몸부분이 묘사되어 한정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럼에도 입체적 공간처리가 탁월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하면서도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또 다른 면도 거의 같은 내용이지만 물고기가 생략된 대신에 하단 좌우에 긴 꼬리를 드리운 두 마리의 물새가 역시 연밥과 같이 살짝 겹쳐서 묘사되었다. 말하자면 편병 앞뒤 면에는 연잎을 중심으로 연봉오리, 연밥, 물고기, 물새 등의 연지 주변의 풍경을 주저함 없이 시원하게 도안화하여 한 여름날 오후 서정적인 연지의 풍광을 소박하게 감상하게 해주니 한 폭의 그림을 대하는 듯하다.
양 측면은 삼단 구도로 나뉘어졌다. 하단부에는 연판을 그렸고, 중단과 상단부에는 연꽃을 새겨 넣었으며, 주둥이 상단에도 연판문대를 그려 넣어 편병 전체가 통일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안을 담당한 조각장은 연지의 생태를 잘 아는 작가였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그는 탁한 물에서 맑게 피기 시작하는 연봉오리, 두 마리 물고기, 두 마리 물새의 상징으로부터 자손의 번영과 풍요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꿈꾸었으리라. 흙을 친구삼아 평생을 자연과 하나 되어 즐거운 물레질과 무늬를 넣는 손놀림은 연지에서 피어난 한 송이 연꽃으로 탄생되었다. 높은 차원의 작가수업을 받은 도화서 화가의 경지와는 다른 한국인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분청사기의 진면목은 바로 여기에 있다. ‘論語’ 雍也 편에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미학적인 분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그냥 보기만 해도 즐거움을 주는 것이 분청사기이다. 이런 작품을 만든 15세기의 작가는 현대인이 영원히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백토분장기법으로서 백토분장을 어떻게 구사하여 무늬를 넣는가에 따라 상감, 인화, 박지, 조화, 철화, 귀얄, 덤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편병은 백토 분장을 한 후, 무늬 외에 배경의 백토를 긁어내고 무늬는 선으로 조각함으로써 무늬의 흰색이 도드라진 박지기법과 조화기법을 혼용한 작품이다. 가마 안에서 산화되어 부분적으로 분청 유약이 갈색으로 변색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파르스름한 분청유약을 통해 회색 태토와 백색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4세기의 고려왕조는 유목민인 몽고족이 세운 원왕조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원의 새로운 기형과 무늬는 고려말 청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조선초의 분청사기·백자에까지 지속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편병으로서 용도는 술병이었을 것이며 조선시대에 유행한다. 분청사기의 편병 형태는 항아리의 앞 뒤를 눌러서 만든 둥근 양감을 가진 형태가 많은 반면, 백자편병에는 보다 날렵한 납작한 편병이 많으며 19세기까지 유행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즐거움 줘”
분청사기는 14세기 중엽 공민왕 때 태동하여 조선 세종 재위기간에 다양하게 발전한다.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그 당시에는 없었고, 1930년경 일인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의미불명의 三島라는 이름 대신 분장회청사기라는 특징을 들어 명명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줄여 분청사기로 일컬어졌다. 분청사기는 민족문화를 완성시킨 세종시대의 문화와 궤를 같이하며 활달하고 꾸밈이 없고 독창적이며 일탈된 자유분방함의 고유미를 보여준다.
세종시대는 유교국가의 이상적인 정치를 실천해 보고자 하는 이념 밑에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그 결실은 훈민정음의 창제이며 그 의도는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트이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므로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이 28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편하게 하고자 함이다.” 이 외에도 우리 풍토에 맞는 농서인 ‘농사직설’, 우리의 질병은 우리 산천에서 나는 약제로 치료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편찬된 ‘향약집성방’, 천문관측기의 발명 등은 모두 民本을 전제로 한 독창적인 민족문화의 개발과 창달이라는 차원에서 출발하고 있다. 세종은 외래문화의 수용보다는 자국문화의 고유성을 찾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사기의 전성기는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전개되었다.
明의 청화백자는 공무역, 사무역 혹은 진상의 방법으로 15세기 조선 도자계의 한 특징을 이루었지만, 이를 모방 재현하고자 한 적극적인 노력의 흔적은 세종시대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는 가운데 백자는 세종의 어기로 사용되었고 분청사기는 공납자기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처럼 분청사기는 貢物의 대상이었으므로 중앙 관아의 이름이 새겨진 예가 많은데, 관아 이름을 새긴 동기는 깨지거나 혹은 개인의 불법 소지를 막기 위해 태종 17년에 상납 관아 이름을 넣게 한 조처에서 비롯되었다.
관아는 공납품을 관장하는 장흥고, 어부로서 음식과 관계되는 내섬시·내자시, 공안부·덕령부와 같은 상왕부, 경승부·인수부와 같은 세자부 등이다. 특히 장흥고나 인수부가 새겨긴 경우는 경주, 언양, 고령 등과 같은 지명을 함께 새기고 있어 불량품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각 지방관의 책임을 후일에 묻고자 한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 것’에 대한 자각에서 탄생해
분청사기는 지역 특색이 뚜렷하다. 가령 호남지방은 박지와 조화기법의 분청사기에서 특징을 보이는데,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은 세종시대의 부안 아니면 고창지방의 제품이 아닐까 한다.
호남지방의 박지와 조화기법의 분청사기에 버금가는 곳이 공주 학봉리 계룡산록 일원에서 제작한 철화기법의 분청사기로 일명 계룡산 분청사기라고도 한다. 그 중의 하나가 호암미술관 소장의 ‘분청사기철화연화어문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려진 물고기와 연화는 물고기의 대표 속성인 머리부분과 등의 지느러미만을 강조하고 나머지 부분은 재해석한 도안으로 처리했다. 머리의 표현은 성깔이 성성한 쏘가리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그림 담당 장인의 기량이 돋보인다. 이와 같은 종류의 그릇은 당시 중앙관아의 공납용은 아니었지만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과 더불어 15세기 후반 도자문화의 일면을 유감없이 전달하고 있다.
/ 강경숙 (동아대ㆍ미술사)
※ 필자는 이화여대에서 '분청사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도자사의 연구', '분청사기'등의 저서가 있다.
※ 출처-교수신문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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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조사:한국 최고의 분청사기
水草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듯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 분청사기철화연화어문병, 높이 31.1cm 입지름 6.8cm 굽지름 7.9cm, 15~16세기, 리움미술관.
한국의 대표적인 분청사기로 전문가들은 ‘분청사기박지연화문편병’과 더불어 철화기법을 쓴 ‘분청사기철화어문병’을 꼽았다.
“형태와 문양에서 박진감이 넘친다”, “과감한 생략으로 솔직함과 자유자재한 표현이 돋보인다”, “익살스럽다” 등이 ‘철화어문병’을 추천한 이유다. 병의 구연부는 나팔처럼 바깥으로 벌어졌고, 아랫배는 불룩하여 풍만한 감을 보여준다. 무늬는 매우 과감하게 그려졌다.
병 상층부는 연판무늬나 세로줄 무늬 없이 단순하게 세 개의 선으로 둘러싸여 단순 명료하고 소박한 미를 보여준다. 물고기 무늬는 억지의 흔적이 없고 시원스럽게 그려져 의젓해 보인다. 지느러미는 마치 날개처럼 묘사되어 운동감을 최대한 살려 주었다. 또한 아가미에서 몸 쪽을 향해 그려진 몇 개의 선은 비늘을 표현한 것으로 장인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다. 즉 다른 보조문양 없이 중심에 간결한 초화문을 두고 물고기가 빠르게 이동하듯 그렸는데, 이 물고기문은 한 마디로 “병에 생명감을 불어넣었다”고 평가된다.
철사안료는 잘못 사용하면 문양이 번지기 쉽다. 하지만 이 병은 15세기 말~16세기 초 사이에 발견된 철화 분청 가운데 안료 사용을 가장 능숙하게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 추천해주신 분들: 강경숙 동아대, 김영원 국립중앙박물관, 방병선 고려대, 윤용이 명지대, 이종민 충북대, 장남원 이화여대,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 최공호 한국전통문화학교, 이상 총 8명 가나다순.
※ 출처-교수신문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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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 분청사기와의 비교
淸逸의 기품으로 문인 사로잡아…간략 소박한 陶器
분청사기의 박지기법은 11세기 중국 송대 이래 금대를 거쳐 원대까지도 계속 사용한 기법이다. 예컨대 북송의 자주요, 요대의 건와요 등에서는 백지 바탕에 선으로 조각을 한다든지, 혹은 면으로 조각을 한 도자기가 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 분청사기 박지기법보다 일찍이 앞서 있다.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14세기 원 경덕진요에서 제작된 ‘백자청화어조문호’는 대표적인 중국의 분청사기라 할 수 있다.
주 문양은 연지와 물고기이다. 상하 종속문에는 화문과 연판문이, 구연부에는 파도문으로 구성되어 전체가 청화로 장식되었다. 사실적인 연꽃과 물고기의 표현은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항아리로서 원대 청화백자를 대표한다.
이처럼 도자기에 그리는 길상도는 14세기 원대 청화백자의 제작과 더불어 원·명대에 크게 유행했다. 길상도에는 흔히 세한삼우, 사군자, 국화 등이 있지만, 연은 세속의 풍요를 상징함과 동시에 진흙물에서 피어나는 꽃이므로 청향이 있는 淸逸의 기품을 보여주어 일찍부터 문인들이 좋아했다.
북송 주돈이의 ‘愛蓮說’ 중에 목단은 세속의 부귀, 국은 세속을 떠난 은일, 연은 세속을 떠난 君子로 찬양하고 있다. 중국 청화백자에는 연지백로, 연지어, 연지원앙 등 복합적인 도안으로 풍요와 번영, 부부화합, 자손번영, 과거급제 등의 길상의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적인 종교의 의미도 담고 있다.
중국의 분청사기는 조선시대 장인들도 접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은 중국과 직접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상감청자에서 백자제작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고안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연꽃과 물고기라는 길상무늬는 공통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요업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도기제작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 도기 가운데는 조선의 분청사기의 모방품이 제작되거나 혹은 도쿄의 하타케야마 키낸칸 박물관 소장의 쉬노(志野) 자기(분청사기와 비슷한 자기 종류)의 하나인 ‘鼠志野蓮文平鉢’과 같은 그릇이 제작되었을 뿐이다. 이 평발은 넓은 사발 안바닥에 연잎, 연밥, 얼기설기 묘사된 연줄기를 간략히 배치시키고 있다. 백토를 일부 사용하고 그 위에 유약을 씌워 초보의 자기 제작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의 본격적인 자기요업은 임진왜란 이후 끌려간 조선의 장인들의 기술 위에서 17세기 중국의 수입자기에 힘입어 백자와 청화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 강경숙 (동아대ㆍ미술사)
※ 출처-교수신문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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