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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과 진주귀걸이의 소녀

오병욱

‘진주귀걸이의 소녀’(1660년께)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의 걸작 중 하나이다. 이는 어두운 실내를 배경으로 비스듬히 서서 고개를 좌로 돌려 관객을 바라보는 소녀의 초상이다. 베르메르는 화가의 소명이 순간을 영원으로 정착시키는 데 있다는 것처럼, 피어나는 청순한 소녀의 관능미를 차갑게 얼어붙은 듯 고요한 모습으로 재현했다. 베르메르의 모든 작품들은 속세를 그렸지만, 세상을 벗어난 것처럼 고요한 게 특징이다. 치밀하게 짜인 구도와 미동도 하지 않는 듯한 모델들, 정지된 필치, 유토피아의 황금빛이 은은하게 비추이는 듯한 배경색이 끝없이 고요한 정적을 이루어낸다.

베르메르가 활동할 당시에는 렘브란트를 비롯한 별처럼 빛나는 많은 동료 작가들도 전대미문의 걸작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들에 비해 베르메르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화공인 그의 부친은 여관을 운영했고, 화상도 겸했다는 것 정도다. 베르메르도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으며, 화가 조합에 등록되어 있었고, 높은 그림값을 받았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걸작으로 환생한 초상화

여하튼 1882년 경매에서 2길더30센트에 팔린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의 소녀’의 동명 영화가 작년에 상영됐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첫째 이유는 시나리오에서 보이는 감독의 대단한 상상력과 창의력에 있다. 제작 동기와 내용이 불분명한 이 그림에서, 초상화로서 이례적인 점은 크게 셋이다. 남다르게 묶은 두건, 예외적인 크기의 진주귀걸이, 얼굴에 비친 강한 빛과 상대적으로 너무 어두운 배경. 감독은 이 모호한 부분들을 모델과 화가의 사랑으로 풀어냈다. 그는 그림을 눈부신 미모의 하녀와 화가의 사랑의 결실로 해석했다. 영화는 둘의 사랑 전개와 초상화의 제작 과정을 따라간다.

감독은 하녀로 들어온 소녀가 화가의 아뜰리에를 청소하는 장면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들과 이에 대조되는 어두운 벽의 공간을 제시했다. 첫 눈에 반한 화가가 하녀에게 물감을 만들게 하면서 싹튼 사랑을, 과거에 사랑을 고백하면서 아내에게 주었을 의미심장하게 커다란 진주귀걸이를 걸게 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 청순한 얼굴과 사랑의 징표인 진주귀걸이를 모두 돋보이게 하려고 창의적으로 두건을 매는 하녀를 설정했다.

베르메르의 진정한 제작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감독은 탁월한 상상력의 발휘로 그림 속의 소녀를 피어나는 청순하고 풋풋한 관능미로, 입술을 살짝 벌린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으로 되살려 놓았다.

역사성과 리얼리티도 이 영화를 우뚝서게 한다. 상상과 해석을 현실적으로 만들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필요한 것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역사다. 감독은 17세기의 운하도시 델프트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 화가의 아뜰리에와 집안에 베르메르와 그의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걸어 놓아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양식을 보여주었다. 화가가 물감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화가와 후원자의 관계도 들어 있다. 델프트의 거리와 시장경제가 자리잡은 사회의 일각, 신교도혁명으로 일체의 종교적 장식이 없는 교회의 내부도 사실적이다. 감독은 17세기 네덜란드의 사회상을 총체적으로 되살려 놓고, 이를 바탕으로 평범할 수도 있었던 소녀의 초상화를 걸작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다.

<화가에 대한 오해 불러

화가와 작품을 소재로 한 영화는 우리에게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크게 결여돼 있어 불만스럽다. 영화 ‘취화선’은 19세기 후기의 화가 장승업의 생애를 그린 것이다. 그런데 장승업과 그의 작품들, 그 시대의 작품들에 대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현실성이 거의 없다.

또 두주불사나 취중작화하는 것을 직업적인 권리이자 의무처럼 알고 있는 화가를 불세출의 천재로 묘사, 일반인들에게 미술과 화가에 대한 대단한 오해를 심어줬다. 화가로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다. 영화 ‘취화선’은 영상미에서는 성공작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아름다운 영상이 역사와 진실과 예술을 대신할 수는 없다.




경향신문 2005.2.2 오피니언 '문화로읽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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